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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눌재집 기록 訥齋集卷之六 附錄 遺事 端宗癸酉十一月。上御經筵。檢討官梁誠之奏曰。平安道長城之役雖罷。而閭延,茂昌,虞芮等郡。隔在江邊。南道軍士越大嶺往戍。人馬俱疲。多賣田產。逃入遼瀋。今雖棄此三邑。旣有大江以限之。則封疆固自如也。乞撤三邑戍。以慈城爲界。使休民固本焉。上遣.. 2006. 9. 14.
숙모전비명 김문기 기록(관란선생유고) 觀瀾先生遺稿事蹟卷之三 實紀 二 肅慕殿碑銘 甲辰○安東金福漢 維公州東五十里鷄龍山中東鶴之寺。有廟三間。奉神牌以祀我端宗恭懿敦孝大王定順王后宋氏。每歲孟冬季春。遠近士民。趨進祠下。薦籩豆。嗚呼惟王。世宗之嫡孫。文宗之長子。早冊儲貳。沖年嗣位。睿質聰明。聖學將就。.. 2006. 9. 14.
사육신 숙모전비명 기록(관란선생유고) 觀瀾先生遺稿事蹟卷之三 實紀 二 肅慕殿碑銘 甲辰○安東金福漢 維公州東五十里鷄龍山中東鶴之寺。有廟三間。奉神牌以祀我端宗恭懿敦孝大王定順王后宋氏。每歲孟冬季春。遠近士民。趨進祠下。薦籩豆。嗚呼惟王。世宗之嫡孫。文宗之長子。早冊儲貳。沖年嗣位。睿質聰明。聖學將就。.. 2006. 9. 14.
사육신 관란선생유고 기록 觀瀾先生遺稿事蹟卷之三 實紀 二 西山書院請享疏 癸未○郭億齡等 云云。奧在景泰。進士臣趙旅。遯跡於咸安地。守志以沒。而其鄕又有所謂伯夷山者。噫。趙旅之節。旣無讓於孤竹。玆山之名。隔宇宙而相符。至今數百載之後。因山而想其人。因人而仰其山。莫不齎咨景歎。曠世興感。而尙無報.. 2006. 9. 14.
사육신유응부 국당유고 공주동학사초혼록 菊堂先生遺稿卷之三 附錄 公州東鶴寺招魂錄 莊陵癸酉至丙子冤籍。皇甫仁錫欽等四人,金宗瑞承壁承珪等六人,李穰承胤承孝等▓人,閔伸甫昌甫諧甫釋等四人,趙克寬,尹處恭涇渭濯湜等六人,李命敏乾金乾玉乾鐵等,李耕㽥勿金秀同,元矩,趙蕃季同貴同,金衍木丁,韓崧.. 2006. 9. 14.
갈암집 육신묘치제글(이현일) 葛庵先生文集卷之五 獻議 六臣復官致祭賜額議 辛未九月 迺者主上殿下輦過六臣墓。嘉其忠義。以復官致祭賜額祠宇之意。下大臣諸宰議。旣又詢及遠外疏賤之臣。臣玄逸懵不曉事。且長途跋涉之餘。神精耗憒。茫然不知所以爲對。然竊感聖主詢蕘之至意。聊誦所聞。以備.. 2006. 9. 14.
회헌집 육신묘비명(조관빈) 悔軒集卷之十七 碑銘 露梁六臣墓碑銘 幷序 維漢師迤南越露梁津向午之岸。有五塚同域。各樹片石。只書姓氏如婦人之表。而過者皆下馬。指點咨嗟曰。萬古忠臣之葬。卽所謂六臣墓也。六臣者。參判朴公諱彭年,承旨成公諱三問,校理李公諱塏,司藝柳公諱誠源,參判河公諱緯地,都摠管兪.. 2006. 9. 14.
약천집 사육신묘 기록(남구만) 藥泉集第十九 碑 露梁六臣墓碑 戊子 惟昔端宗大王之遜國也。忠臣烈士爲之效死前後者多。而南秋江孝溫作丙子六臣傳行世。故有言及遜國時事。人必以六臣稱焉。自京城迤南十里。越露梁津岸上。有五墓。各有短碣。表曰朴氏之墓兪氏之墓李氏之墓成氏之墓成氏之墓。而不書其名。此於六氏.. 2006. 9. 14.
육신묘비 왕조실록 기록(영조 23년) 영조 23년 정묘(1747, 건륭 12) 3월 18일(무신) 노량의 육신묘에 비를 세우도록 명하다 노량(露梁)의 육신묘(六臣墓)에 비(碑)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육신묘가 노량에 있었는데, 황폐해져도 손질하지 않았으므로, 지경연사 권적(權)이 그 사실을 아뢰니, 이 명이 있었다. 2006. 9. 14.
육신묘봉축 왕조실록 기록(영조 10년) 영조 10년 갑인(1734, 옹정 12) 9월 18일(경인) 육신묘를 봉축할 것과 선혜청에 이관된 민절사의 선척을 환속시킬 것을 명하다 육신묘(六臣墓)의 영역(塋域)이 허물어지고 표석(標石)이 기울어졌으므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다시 봉축(封築)하게 하였고, 민절사(愍節祠)에 소속된 선척(船隻)으로서 선혜청.. 2006. 9. 14.
연려실기술 육신묘 기록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 노량(鷺梁) 남쪽 언덕 길가에 다섯 무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예전에 여기에서 죄인을 죽였다 한다. 이 있는데, 그 앞에 각각 작은 돌을 세워 표지를 하였다. 가장 남쪽은 박씨의 묘라 하고, 다음 북쪽은 유씨(兪氏)의 .. 2006. 9. 14.
사육신박팽년 연려실기술 기록(정난에 죽은 신하들)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박팽년(朴彭年) 박팽년은, 자는 인수(仁叟)이며, 호는 취금헌(醉琴軒)인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갑인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형조 참판으로 아버지 판서중림(仲林)과 아우 네 사..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어정배식록명단) 정조 15년 신해(1791, 건륭 56) 2월 21일(병인) 장릉 배식단에 배향할 사람의 명단 정단(正壇)에 배식한 사람은 32인 【안평 대군(安平大君) 장소공 이용(章昭公李瑢), 금성 대군(錦城大君) 정민공 이유(貞愍公李瑜), 화의군(和義君) 충경공 이영(忠景公李瓔), 한남군(漢南君) 정도공 이어(貞悼公李), 영풍군(..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장릉배식단 상소) 정조 15년 신해(1791, 건륭 56) 2월 21일(병인)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추향할 사람을 정하다 고 교리 성희(成熺)는 곧 성삼문(成三問)의 종숙부(從叔父)이자, 정숙공 성담수(成聃壽)의 아버지입니다. 선정신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희가 삼문과 함께 왕실을 보필하여 죽고 사는 일로 그 마음을 바..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상왕복위 모의)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6월 8일(병오) 의금부에서 성삼문 등의 반역죄를 고하니 연루된 자들의 처벌을 명하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명하여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윤사로(尹師路)·강맹경(姜孟卿)·이인손(李仁孫)·신숙주(申叔舟)·성봉조(成奉祖)·박중손(朴仲孫)·어효첨(魚孝瞻)과 승..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공초에 불복)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6월 2일(경자) 성균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를 고하다 1. 번역문 성균 사예(成均司藝) 김질(金礩)이 그 장인인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정창손(鄭昌孫)과 더불어 청하기를, “비밀히 아뢸 것이 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공조판서 불가 상소) 세조 1년 을해(1455, 경태 6) 8월 9일(임자) 사헌부 지평 안중후가 집안을 잘못 다스린 김문기의 공조 판서 제수의 불가함과 이유의 중벌을 청하다 지평(持平) 안중후(安重厚)가 본부(本府)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이유(李瑜)는 죄(罪)는 무겁고 벌(罰)은 가벼우니, 고금(古今) 천하(天下)를 통하여 어..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공조판서 제수) 세조 1년 을해(1455, 경태 6) 7월 22일(을미) 김문기·이변·성승·김말행·이예장·한종손·양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문기(金文起)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변(李邊)을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성승(成勝)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김말행(金末行)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이..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천추사 기용문제)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24일(정미) 이언·김계우 등이 김문기를 천추사로 차정하는 일의 불가함을 아뢰다 장령(掌令) 이언(李堰)·우헌납(右獻納) 김계우(金季友) 등이 아뢰기를, “김문기(金文起)는 그 딸이 실행(失行)하였기 때문에 헌사(憲司)에서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파면하기를 청하였는..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탄핵상소)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9일(임인) 우정언 공기가 김문기와 권수를 벌하기를 청하다 우정언(右正言) 공기(孔頎)가 본원(本院)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김문기(金文起)·권수(權需)의 죄상이 이징옥보다 못하지 않으니, 내버려 두고 묻지 않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 이세문(李世..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이징옥과 관련된 문제)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9일(임인) 허추가 이징옥을 강원도에 안치하는 일의 불가함을 아뢰다 좌헌납(左獻納) 허추(許錘)를 불러 전교하기를, “너희들이 아뢴 일은 이미 전지를 내렸으니, 추문할 수 없다.” 하니, 허추가 아뢰기를, “가만히 병기를 실어 나른 죄는 실로 현저한 일입니다. 배 두..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사헌부의 상소)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10월 12일(을미) 사헌부에서 김문기는 그 딸의 죄로 참판이 될 수 없음을 아뢰다 1, 번역문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어제 죄를 당한 사람들은, 청컨대 아울러 가산(家産)을 적몰하고 고신(告身)을 추탈하소서. 김문기(金文起)의 딸의 일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딸의 음란과 관련된 것) 단종 1년 계유(1453, 경태 4) 9월 27일(경진) 의정부에서 임중경의 일을 의금부에 내려 삼성 잡치하기를 청하다 1. 번역문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임중경(林仲卿)의 일은 의금부에 내려서 삼성 잡신(三省雜訊)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번(李蕃)의 아비 이효경(李孝敬)은 풍질(風疾)이 있..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친지관련) 문종 2년 임신(1452, 경태 3) 3월 28일(신유) 이양·안숭선·허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1. 번역문 이양(李穰)을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으로 삼아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게 하고, 안숭선(安崇善)과 허후(許詡)에게는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가(加)하고, 김조(金銚)를 인순부 윤(仁..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관직을 받다) 문종 1년 신미(1451, 경태 2) 1월 6일(병오) 이부·조극관·이순지·이숭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부(李溥)를 가덕 대부(嘉德大夫) 영순군(永順君)으로, 조극관(趙克寬)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이순지(李純之)를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이숭지(李崇之)를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우효..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사위에 대한 일) 문종 즉위년 경오(1450, 경태 1) 8월 2일(계유) 사간원에서 세자 좌참군으로 이번을 제수한 것을 개정하도록 요청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을 임기(任期)가 차면 서용(敍用)하는 것이 전례(前例)인데, 지금 형조 정랑(刑曹正郞) 남윤(南倫)은 임기가 차지 않았는데도, ..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관직제수) 세종 32년 경오(1450, 경태 1) 윤 1월 17일(임술) 김문기·홍심·신처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문기(金文起)로 병조 참의를, 홍심(洪深)으로 겸지병조사(兼知兵曹事)를, 신처강(辛處康)으로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를 삼았다. 문기(文起)의 사위는 이효경(李孝敬)의 아들인데, 효경(孝敬)이 본래 미친 병.. 2006. 9. 13.
왕조실록 김문기 기록(재산상속 문제) 세종 30년 무진(1448, 정통 13) 4월 9일(갑자) 수양 아비의 재산 상속을 둘러싼 분쟁에 대한 부지돈녕부사 권총의 상서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 권총(權聰)이 글을 올리기를, “신이 본래 침고(沈痼)된 병이 많은데다가 완만(緩漫)한 풍증이 있어, 무릇 동작을 하려면 오로지 남의 부축을 의뢰하여야 하.. 2006. 9. 13.
관란선생유고 김문기 기록(창절사사적) 觀瀾先生遺稿事蹟卷之三 實紀 二 彰節祠事蹟 正宗辛亥正月十七日。京畿儒生黃默等。上言和義君追配。判付曰。和義君之追配於是地是祠。神理人情。可謂俱當。而可合追配者。豈獨和義一人乎。日前駕過鷺梁。路出六臣祠與墓之傍。移時駐蹕。眺望咨嗟者久之。行殿宿次。不禁起感。六十.. 2006. 9. 13.
단계선생유고 김문기 기록 丹溪先生遺稿附錄 事實 天順皇帝沒北虜。時河緯地常感慨曰。天子蒙塵。天下所共憤。我輩雖海外陪臣。豈可恬然不預其憂乎。每處外廊。不入寢室。斯人之志行如是。其忠義殉國可知。 出戊寅記聞佔畢齋金宗直善山十絶迎鳳里詩曰。鄕人終古重膠庠。翹楚年年貢舜廊。一片城西迎鳳里。靑.. 2006.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