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1년 을해(1455, 경태 6) 8월 9일(임자)
사헌부 지평 안중후가 집안을 잘못 다스린 김문기의 공조 판서 제수의 불가함과 이유의 중벌을 청하다
지평(持平) 안중후(安重厚)가 본부(本府)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이유(李瑜)는 죄(罪)는 무겁고 벌(罰)은 가벼우니, 고금(古今) 천하(天下)를 통하여 어찌 그 죄악(罪惡)이 이와 같은데도 중한 법[重典]을 가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 김문기(金文起)의 딸인 이번(李蕃)의 처가 일찍이 임중경(林重敬)과 간통하여 일이 발각되어 탄핵(彈劾)을 받은 사실이 있는데, 이제 김문기에게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제수하시니, 집안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을 육경(六卿)의 반열(班列)에 서게 하심은 불가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절제사(都節制使)는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그 직질(職秩)이 마찬가지인데, 김문기가 이미 절제사를 역임하였으니, 판서가 된다고 거리낄 것이 없다. 더욱이 그 딸의 실행(失行)은 김문기가 외방(外方)에 있을 때 있었던 일로서 비록 요(堯)임금·순(舜)임금일지라도 능히 그 자식을 교화하지 못하였을 것인즉 김문기는 족히 허물할 것이 못되며, 또 그 변방(邊防)을 지킨 공로(功勞)는 갚지 않을 수 없다. 유(瑜)의 일도 역시 들을 수 없다.”
하였다. 안중후가 다시 아뢰기를,
“유(瑜)는 종실(宗室)의 지친(至親)으로서 대역(大逆)을 범하였으니, 이는 옛날에도 역시 듣기 드문 일입니다. 또 김문기(金文起)는 당시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어 딸의 일로서 피혐(避嫌)하였으니, 어찌 몰랐겠습니까? 만약 가장(家長)도 아울러 좌죄(坐罪)하지 않는다면, 뒤에 징계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김문기를 위로하셨고 또 신 등의 말로써 개전하신다면, 김문기는 은혜에 감동하고 그리고 두려움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다시는 계달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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