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1년 신미(1451, 경태 2) 1월 6일(병오)
이부·조극관·이순지·이숭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부(李溥)를 가덕 대부(嘉德大夫) 영순군(永順君)으로, 조극관(趙克寬)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이순지(李純之)를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이숭지(李崇之)를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우효강(禹孝剛)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강맹경(姜孟卿)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신자근(申自謹)을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로, 주백손(朱伯孫)을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김문기(金文起)를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김유양(金有讓)을 판 안주 목사(判安州牧事)로, 박유성(朴柳星)을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삼았다. 이부(李溥)는 광평 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아들이다. 임금은 이여(李璵)가 일찍 졸(卒)한 것을 애도하여서, 이를 아들같이 사랑하여 항상 궁중에 두고 세자와 더불어 벗하여 글을 읽게 하니, 나이는 비록 어렸으나 특별히 일품(一品)을 제수하여 작질(爵秩)이 임금의 여러 아우의 아들보다 높았다. 강맹경은 총명하고 민첩하여 이재(吏才)에 뛰어났으나 자격(資格)이 오랫동안 미달하였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탁용(擢用)되었다. 김문기는 성질이 통달(通達)하고 말을 잘하였는데, 그때에 임금이 함길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자 하니 불가하다는 조정의 의논이 많았으나 김문기 만이 홀로 그 이익을 말하였고, 또 무예(武藝)도 조금 아는 까닭에 마침내 기건(奇虔)을 대신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