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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비사육신관련/금성대군

왕조실록 금성대군 기록3(금성대군의 고신을 거둠)

by 竹溪(죽계) 2006.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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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3년 을해(1455, 경태 6)   2월 27일(계묘)  



금성 대군 이유 등의 고신을 거두고 엄자치 등 환관을 외방에 유배시키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傳旨)하기를,


“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홍약(洪約)·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는 고신(告身)을 거두고,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은 고신(告身)을 거두고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김옥겸(金玉謙)·최영손(崔泳孫)·허축(許逐)·홍형로(洪亨老)·홍이로(洪利老)·홍구성(洪九成)·최인(崔仁)·홍오봉(洪五峯)·홍원효(洪元孝)·홍적(洪適)·홍승(洪昇)·이문(李聞)·진유번(陳有蕃)·최자척(崔自陟)·강종산(姜從山)은 아울러 고신(告身)을 거두고 먼 변방(邊方)에 충군(充軍)하고, 전농시(典農寺) 종 목효지(睦孝智)는 극변(極邊)의 관노(官奴)로 영속(永屬)시키고, 환관(宦官) 엄자치(嚴自治)는 본향(本鄕)에 부처(付處)하고, 김충(金忠)·최습(崔濕)·이귀(李貴)·인평(印平)·유대(柳臺)·박공(朴恭)·윤기(尹奇)·박윤(朴閏)·김득상(金得祥)·이춘(李春)·정복(鄭福)·길유선(吉由善)·정존(鄭存)·최찬(崔粲)·조희(曹熙)·문한(文漢)·유진(劉進)·문중선(文仲善)·김혁(金革)·유한(柳漢)·김결(金潔)·오율산(吳栗山)·안우상(安遇祥)·황사의(黃思義)·이간(李澗)·한존(韓存)·이효지(李孝智)·박존수(朴存壽)·이강(李崗)·오선(吳善)·황경지(黃敬之)·최잠(崔涔)·김종직(金從直)·김덕공(金德恭)·김처선(金處善)·최치돈(崔致敦)·이귀존(李貴存)·서의(徐義)·화계산(化繼山)·김흡(金洽)·이득무(李得茂)·김득손(金得孫)·최석강(崔碩江)·강희경(姜希敬)·김효손(金孝孫)은 아울러 고신(告身)을 거두고 본향(本鄕)에 부처(付處)하고, 여기(女妓) 초요갱(楚腰䡖)은 장(杖) 80대를 때리도록 하라.”


하고, 또 교지(敎旨)를 내려서 사표국(司豹局)·책방(冊房)·궁방(弓房)·보루각(報漏閣)을 혁파(革罷)하여 각각 유사(有司)에 붙이고, 환관(宦官)으로 하여금 맡아 보지 말게 하였다. 문종(文宗)이 훙(薨)하면서부터 환수(宦竪)가 마음대로 전횡(專橫)하여 그 세력이 타오르는 불길과 같았는데, 엄자치(嚴自治)·윤기(尹奇)·유대(柳臺)·박공(朴恭)·인평(印平) 등이 가깝고 친밀한 사람끼리 당(黨)을 만들어 순치(唇齒)처럼 서로 의지하였는데, 엄자치는 사람됨이 흉포하고 교활하여 남의 뜻을 잘 엿보아서 이미 문종조(文宗朝)에서부터 궁중(宮中)의 일을 맡아 보니, 사람들이 ‘도나연(都那衍)’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더욱 전횡하여 거리낌이 없었고, 조정(朝廷)을 얕잡아 보았다. 일찍이 금중(禁中)의 서쪽 액문(掖門)에 사사로이 청사(廳舍)를 짓고서 하룻밤에 그곳에 나아가더니, 매양 그 안에서 누워서 쉬었으며, 거처(居處)·음식(飮食)·의복[服用]이 실로 모두 지나치니, 사람들이 이를 갈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당류(黨類)를 끌어다가 뿌리를 박으니 감히 누구인가를 묻지 못하였다. 세조(世祖)가 이를 분하게 여겨 노산군(魯山君)에게 아뢰기를,


“환시(宦寺)인 사람들은 다만 쇄소(灑掃)에 대비하고 사령(使令)에 응할 뿐인데, 지금 엄자치 등은 교만하고 횡포(橫暴)하니, 이들을 제거하여 조정(朝廷)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엄자치 이하 수십 인을 외방에 유배시키니, 시의(時議)가 이를 통쾌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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