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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비사육신관련/금성대군

학봉속집 금성대군 기록(복작을 청하는 상소)

by 竹溪(죽계) 2006.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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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속집(鶴峯續集) 제2권 소(疏)

  

노릉(魯陵)을 복위(復位)시키고, 사육신(死六臣)을 복작(復爵)시키며, 종친(宗親)을 서용(敍用)하기를 청한 상소(上疏) 신미년(1571, 선조 4)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신(臣) 김성일(金誠一)은 참으로 황공하게도 머리를 조아려서 두 번 절하고 주상 전하께 삼가 말씀 올립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하늘이 경계를 보이고 땅이 편안함을 잃어, 나라가 망하는 요사함과 급박하게 닥치는 재앙이 한꺼번에 겹쳐 나타났습니다. 이에 성상께서는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여 구언(求言)하는 교서를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야(朝野)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마디 말을 올리거나 한 가지 일에 대해 진달한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간혹 초야에 있는 사람이 기휘(忌諱)하지 않고 올린 말이 있었으나, 전하께서는 문득 잘난 체하는 기색을 드러내면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 엄하게 꾸짖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거짓으로 구언한다는 이름을 빌려서 간언(諫言)을 막는 실제를 보인 것입니다.


신은 형편없는 자질을 가진 몸으로 사국(史局)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매번 임금의 거조를 기록할 적마다 붓을 잡고서 개탄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신에게 지금 부족하나마 한 가지 견해가 있는바, 만 번 죽는 형벌도 피하지 않고 전하께 아뢰고자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낮은 직위에 있으면서 중대한 말을 하여 직위에 벗어난 짓을 한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만대의 대의(大義)에 관계되고 국가의 흥망(興亡)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어찌 한갓 언론의 책임을 맡은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말고삐를 잡는 천한 마부나 악기나 다루는 눈먼 소경도 모두 풍자하여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은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어서 은혜를 받은 것이 중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할 말을 하고서 형벌을 받아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할 말을 하지 않아서 전하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혁명(革命)을 일으켜 전 임금을 내치는 거조를 어찌 성인(聖人)이 하고자 하는 바이겠습니까. 이는 실로 부득이하여 한때의 권도(權道)를 행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마음씀과 일을 행함은 대공 지정(大公至正)하여 하늘의 뜻에 호응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순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하로서 임금을 치고서도 은(殷) 나라의 탕왕(湯王)과 주(周) 나라의 무왕(武王)은 임금 자리를 잃지 않았으며, 임금을 폐위시켜 내쫓고서도 은 나라의 이윤(伊尹)과 한(漢) 나라의 곽광(霍光)은 충신 됨을 잃지 않았는바, 만대가 흐른 뒤에도 누가 감히 그 사이에 의심을 두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세조 혜장 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는 뛰어난 무략(武略)으로 어지러움을 바로잡는 자질을 가진 분으로서, 노산군(魯山君)이 어린 나이로 임금 자리에 있을 때 권신(權臣)들이 서로 알력을 부려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성조(聖祖)께서 무력으로 평정한 공이 아니었다면 백 년을 지켜 온 조종들의 왕업이 장차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노산군은 임금 자리를 맡아 지켜 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또 천명이 돌아갈 바가 있음에 순응하여, 하루 아침에 왕위를 선양해 공손하게 물려주는 아름다움을 이루었습니다. 그 당시에 성조께서 아무리 필부(匹夫)의 뜻을 따라 자장(子臧)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였던들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임금 자리가 이미 정해진 다음에도 노산군은 오히려 상왕(上王)이라는 호칭을 누려 양궁(兩宮) 사이에 정의(情意)가 막히지 않고 통하였으니,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서로 임금 자리를 주고받은 것에 비해 보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당시의 신하들이 성조의 마음을 체득하지 못하고, 또 때에 맞게 권도를 쓰는 도리에 어두웠던 탓에, 앞다투어 음모를 꾸며 큰 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화란의 근본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직을 안정시킬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폐위시켜 추방시키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성조의 본마음이겠습니까. 탕왕과 무왕의 마음으로써 이윤과 곽광의 일을 행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졌다가 다시 안정되었으며, 천명이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는바, 그 공은 조종들에게 빛나고 그 사업은 후손들에게 드리워졌습니다. 성조의 큰 공렬이 이에 이르러서 더욱 빛나니, 말할 만한 부끄러운 덕이 뭐가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노산군의 왕위는 그 당시에 있어서는 오히려 폐위시킬 만하였으나, 후세에 있어서는 역시 복위시키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큰 화란이 겨우 평정된 탓에 뭇사람들의 의심이 풀리지 않아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이 몹시도 급하였는바, 그 당시에 참으로 크게 권한을 행사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지 않았다면, 국가의 존망(存亡)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폐위시킬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째서 복위시키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습니까? 노산군이 비록 나이가 어렸던 탓에 짊어진 짐을 감당하지 못하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종묘사직에 죄를 지은 임금과 비교해 볼 적에 역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선양하는 거조가 있었던 것이며, 계속해서 또 상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높였던 것으로, 성조께서 종시토록 잘 보전해 주고자 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신하들이 비록 화란을 일으키려고 모의한 자취가 있기는 하나, 이것이 어찌 나이 어린 노산군이 참여해 들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종묘사직을 위한 큰 계책이 급하고, 또 신료들이 요청한 바를 위하여 마침내 노산군으로 하여금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게 하고 말았는바, 성조께서는 참으로 마음속으로 측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미 제사를 받들 후사(後嗣)가 없고 또 반장(返葬)을 하지도 못하여 1백여 년 동안이나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강가를 떠도는 혼령이 되었으니, 친한 이를 친히 대하는 국가의 의리에 있어서 어찌 몹시도 상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제왕(帝王)의 도리는 상(常)도 있고 변(變)도 있는 법으로, 상이란 것은 천하의 대경(大經)이고, 변이란 것은 천하의 대권(大權)입니다. 대권이 아니면 한때의 민명(民命)이 서지 못하고 대경이 아니면 만대의 대의(大義)가 밝아지지 않는 법이니,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말하는 자들이 한갓 형적(形跡)만을 가지고 의심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조종들의 마음과 제왕의 효를 아는 것이겠습니까.


성조께서는 한때의 대권을 행사하였으니, 전하께서 만대의 대의를 거행한다면, 성조의 마음이 바로 전하의 마음인 것입니다. 왕위를 폐위시킨 것이 이미 사사로운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었는데, 왕위를 복위시키는 것이 어찌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은혜와 의리가 나란히 행해지고 대경과 대권이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이므로, 성인께서 하신 바가 천리(天理)의 공정함과 인심(人心)의 바름이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건문제(建文帝)가 실정(失政)을 하자 태종 황제(太宗皇帝)가 대의(大義)로써 멸친(滅親)하였는데, 화란을 평정한 날에는 오히려 천자를 장사 지내는 예로써 장사 지내고 다시는 폄출(貶黜)하는 글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홍치(弘治) 연간에 이르러서 소인(蘇人) 양순길(楊循吉)이 건문제에게 시호를 내리기를 청하였는데, 효종 황제(孝宗皇帝)가 양순길을 죄주지 않고 예부(禮部)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신하들이 용렬하고 무식한 탓에 그 의논을 마침내 기각하였습니다. 이에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이 지금까지도 한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경태제(景泰帝)에 이르러서는 영종 황제(英宗皇帝)에게 죄를 지었는바, 영종 황제가 북쪽을 순수(巡狩)할 적에는 오로지 황제의 자리만을 탐내어 어가(御駕)를 모시고 올 뜻이 없었고, 어가가 돌아오게 되어서는 남쪽에다가 유폐시킨 다음 이미 세워 놓았던 세자를 바꾸었습니다. 그러니 천순(天順) 연간에 이르러서 영종이 황제 자리에 다시 오르던 날 그의 죄를 성토하면서 폐위시킨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헌종 황제(憲宗皇帝)는 경태제가 사직에 공이 있다고 하여 곧바로 작위를 회복시켰으며, 또 휘호(徽號)를 올려 높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에는 이론이 없었으며 후세에는 그 효성을 칭송하여, 끝내 아버지가 폐위시킨 것을 자식이 복위시킨 것임을 의심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참으로 영종 황제가 폐위시킨 것은 경태제의 죄를 성토해서이고, 헌종 황제가 복위시킨 것은 경태제의 공을 녹공(錄功)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공과 죄가 서로 가리지 않고, 은혜와 의리가 각각 마땅함을 얻었으니, 또 어찌 피차간에 말할 만한 혐의스러운 점이 있겠습니까.


지금 노산군에게는 비록 경태제와 같은 공은 없지만, 또한 경태제와 같은 죄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조께서 노산군을 폐위시켜 추방시키는 거조를 한 것은 단지 종사의 큰 계책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일 뿐이지, 실로 노산군의 죄를 성토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성조께서 이미 노산군을 죄주려는 마음이 없었으니, 오늘날에 복위시키는 거조는 참으로 그만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멸망당한 나라를 부흥시켜 주고 끊어진 집안을 이어 주는 것은 제왕의 인(仁)이다. 더구나 국가는 노산군에 대해서 친한 이를 친하게 대우하여야 하는 큰 의리가 있는데, 차마 제사를 받들 후손이 끊어졌는데도 돌보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산군의 왕위는 비록 복위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후사는 결단코 세워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노산군의 왕위를 복위시키지 않으면 노산군의 후사를 이어 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노산군에 대해서 아무리 왕위에 있지 않았던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그래도 한 해를 넘겨서 왕위에 있었던 임금입니다. 왕위는 잃었으나 상왕의 칭호는 아직도 천자(天子)의 창고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그 뒤를 이어서 제사를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무릇 노산군과 세조의 관계는 후릉(厚陵)과 태종(太宗)의 관계와 같습니다. 태종께서는 상도(常道)를 만났던 탓에 후릉의 제사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 것이고, 세조께서는 변도(變道)를 만났던 탓에 노산군의 왕위가 저절로 하늘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한갓 노산군만의 불행이겠습니까. 아마 성조께 있어서도 불행한 바일 것입니다. 이제 만약 성조께서 불행으로 여기는 마음을 미루어서 노산군의 왕위를 복위시켜 후릉에게 제사 지낸 것처럼 제사 지낸다면, 조종들께서 만난 바가 비록 상도와 변도의 다름이 있었지만, 조처한 것은 전하의 효성에 힘입어서 끝내 하나로 귀일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노산군의 외로운 분묘가 아직도 영월(寧越) 땅에 있는데,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향화(香火)를 피워 제사 지내지 않은 탓에, 황량한 무덤이 깊은 산속에 버려져 있어서 인근 사람들이 손으로 가리키고 길 가는 사람들이 눈물을 떨군다고 합니다. 그 누가 임금의 한 몸이 살아서는 존귀한 임금의 몸이었다가 죽어서는 해골을 의탁할 곳조차 없어서 산구렁에 버려진 채 뭇사람들과 같은 언덕에 묻히게 될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국가에서 인후함으로 왕업을 열어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앞뒤로 공적을 이은 덕분에 여러 대토록 승평을 누리면서 넓고도 큰 은택이 금수들에게까지 두루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노산군 한 사람에 대해서만 친한 이를 친히 대하는 어짊을 미루어 가지 않아, 원망이 황천에 맺혀 있는데도 끝내 그것을 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마음이 기뻐하지 않는 것 가운데 큰 것이고, 온 나라 신민들이 다 함께 원통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당시에 부득이하였던 권도를 체득하시고, 오늘날에 그만둘 수 없는 의리를 살피소서. 그리하여 아래로는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전례(典禮)의 상도(常道)을 참작하여 정하고, 위로는 종묘에 고하여 추후에 복위시키는 의식을 거행하소서. 그리고 곧바로 영월 고을을 맡고 있는 수령에게 명하여서 남아 있는 분묘를 찾아 예를 갖추어 개장(改葬)하고, 수호(守戶)를 두어 나무꾼이나 목동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하며, 세시(歲時) 때 올리는 제사를 한결같이 후릉의 규례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친한 이를 친히 대하는 어짊이 유명(幽明) 사이에 감통(感通)되고, 만대의 대의(大義) 역시 이로써 수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다음에야 성조께서 종사를 위하였던 지극히 공정한 마음이 후세에 더욱 드러날 것이며, 하늘에 계신 열성들의 혼령들 역시 아득한 가운데에서 서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윤리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바르게 되고, 종사의 복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두터워질 것이니, 국가가 억만년토록 번성할 아름다움이 반드시 이번 거조에 기초할 것입니다. 참으로 혹시라도 선왕(先王)께서 하신 일이라고 핑계 대고서 오직 거부하거나 숨기기만 일삼는다면, 신은 아마도 성조의 마음을 천하에 드러낼 수가 없고, 전하께서도 역시 후손다운 후손이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노산군의 왕위가 복위되고 나면 그 당시 사육신(死六臣)의 관작 역시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사육신은 성조의 마음을 체득하지 못하고 감히 난역(亂逆)을 도모하였으니,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걸(桀)의 개가 요(堯) 임금을 보고 짖은 것은 요 임금이 옳지 않아서 짖은 것이 아니라, 주인이 아니어서 짖은 것입니다. 그러니 깊이 죄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창업 수통(創業垂統)한 임금은 혁명을 일으키는 즈음에 불충한 자들에 대한 주벌을 엄하게 하고, 충절을 위해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상을 중하게 주었습니다. 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정공(丁公)을 죽이고, 송(宋) 나라 태조(太祖)가 한통(韓通)을 표창한 것과 같은 것은, 천하 후세를 위해 염려한 것이 또한 원대하지 않습니까.


황명(皇明)에 이르러서는, 영락(永樂) 초에 방효유(方孝孺), 연자녕(練子寧), 황자징(黃子澄), 제태(齊泰) 등의 무리는 모두 태종 황제(太宗皇帝)에 대해 명령을 거역하고 건문제(建文帝)에게 절개를 바쳐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인종 황제(仁宗皇帝)는 즉위한 처음에 가장 먼저 그들의 충성을 칭찬하면서 그들의 자손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효종(孝宗) 홍치(弘治) 연간에는 급사중(給事中) 오세충(吳世忠)이 또 은전을 미루어서 충의를 장려하기를 청하였는데, 그의 소장(疏章)이 한 번 올려지자 천하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겼습니다.

아아, 군부(君父)의 원수에 대해서는 천하 사람들이 모두 함께 분노하는 바이며, 사람마다 반드시 주벌해야 할 바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들 몇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인종 황제는 태종 황제의 아들이면서 그들의 충의를 칭찬하고, 오세충은 신하로서 그들의 의로움을 사모하여, 처음 황제 자리에 올라서 조서를 내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고, 후세에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군신간의 큰 의리는 바로 천지의 경위(經緯)로서 하루라도 민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아, 한 나라와 송 나라 및 황명에서 한 일은 다른 세상의 먼 일이니, 신이 본조(本朝)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증명해 보겠습니다. 고려(高麗)의 국운이 궁해져서 천명과 인심이 이미 참 임금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도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만은 왕씨(王氏)에게 마음을 두어 갖은 방법을 다 써서 가로막고 방해하였습니다. 만약 정몽주의 계책이 성사되었더라면 조종들께서 어떤 경우에 처하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니 정몽주는 바로 나라의 원수인바, 의당 용서해 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몽주가 죽자 태조께서는 오히려 그를 위해 애통해하였고, 태종 대왕께서는 즉시 추숭하는 은전을 내렸습니다.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는 또 문묘(文廟)에 종사하는 전례를 거행하고 자손들을 녹용(錄用)하였는바, 아주 융숭하게 권장하면서 마음속으로 조금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삼강 오륜(三綱五倫)의 도로 하여금 동방의 일월이 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게 하여, 충성스럽고 의로운 혼백이 구천에서 생기가 돌고, 높고도 우뚝한 절개가 백대에 빛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 나라와 송 나라의 여러 임금들이 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뛰어난 것입니다.


성종 대왕께서는 사육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들의 충성을 애처로이 여겨 그들의 당파 가운데 쫓겨나 귀양 갔던 사람들은 모두 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는 성조(聖祖)께서 무력으로 평정한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신(逆臣)의 무리들을 가벼이 석방해서는 안 될 것 같았으며, 선왕(先王)께서 하신 일을 가벼이 고치는 것도 역시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성종께서는 그 일을 시행하면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으니, 성종의 원대한 계책과 심원한 생각을 어찌 일반 사람이 능히 헤아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노인들에게 듣건대, 그 당시에 경악(經幄)의 신하들 가운데 ‘그들은 충신이고 우리들은 역적이다.’ 하면서 사육신을 칭찬한 자가 있었는데, 성종께서는 명언(名言)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 뒤로부터는 사람들이 비로소 사육신의 충성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여 기휘(忌諱)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에 처사(處士) 남효온(南孝溫)이 드디어 사육신의 전기(傳記)를 지어서 행적을 드러내었는데, 그들의 전기를 보는 자들은 글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모두들 눈물을 흘렸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끝내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전기가 인륜에 관계되는 바가 큽니다.


아아, 하나의 전기가 지어지는 것이 경중(輕重)이 되기에 부족한 것 같은데도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하여 흥기시키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전이(轉移)의 기틀을 잡고 교화(敎化)의 근원을 맡고 있는 자가 만약 숭상하는 바를 분명하게 잘 드러내 보여 천하 사람들을 격려한다면, 그것을 보고 듣고 감화되는 묘함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태종과 성종께서 이미 정몽주에 대해서 시행하고 사육신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대하였으니, 열성(列聖)들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먼저 힘써야 할 바를 알았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사육신의 이름이 아직도 죄적(罪籍) 가운데 들어 있어서 신원(伸冤)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육신의 작위(爵位)가 왕부(王府)에 새겨져 있는데도 관작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의 일대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아아, 섬기는 바에 대해서 충성을 바쳐 뜻과 소원을 이미 이루었으니, 포숭(褒崇)하고 신설(伸雪)하는 은전을 내리는 것이 사육신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국가를 위하여 원대한 생각을 하는 자는 단연코 한때의 속된 견해를 따라서 만대의 큰 의리를 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듣건대, 그 당시에 죄를 받은 자 가운데 금성대군(錦城大君)과 같은 자는 그 역시 용서해 주는 은전을 받았는데도 작위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고, 적몰(籍沒)당한 재산을 아직도 다 돌려받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 또한 매우 원통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역대의 절개를 장려한 은전을 살펴보고 조종들께서 이미 시행한 규례를 본받아, 특별히 관작을 회복시켜 주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높이고 장려하는 뜻을 보이소서. 자손들 가운데 누락된 자들 역시 의당 녹용(錄用)하고, 적몰한 재산 가운데 되돌려주지 않은 것은 모두 추가로 되돌려주소서. 그렇게 한다면 군신간의 대의가 천지 사이에 크게 밝아질 것이니, 지금 이후로 우리 동방의 억만년토록 절개에 죽고 의리에 죽는 선비들은 터럭 하나도 모두 전하께서 권장하여 기른 것이 될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굽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일이 이미 이와 같은데, 또다시 길게 탄식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종친(宗親)들을 폐고(廢錮)시키는 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대종은 나라의 큰 줄기이다.[大宗維翰]”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종자는 나라의 성이다.[宗子維城]” 하였습니다. 종성(宗姓)들이 국가에 대해서 무슨 해 되는 바가 있어서 금법(禁法)으로 묶어 두기를 한결같이 이와 같이 엄하게 한단 말입니까.


옛날의 밝은 임금은 반드시 동성(同姓)의 사람을 세워서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는 도리를 도타이 하였으며, 반드시 이성(異姓)의 사람을 세워서 어진이를 어질게 대하는 도리를 밝혔습니다. 그리하여 친한 이와 소원한 이를 나란히 등용하여 이쪽과 저쪽을 서로 잡아 묶었으니, 그 깊은 계책과 원대한 염려가 어찌 그렇게 한 까닭이 없겠습니까.


대개 공성(公姓)의 친족은 한 기운에서 나뉘어져 여러 갈래가 된 것으로 골육으로 맺어진 은혜가 있고, 기쁨과 슬픔을 왕실과 함께하여 어려울 때 떠나가는 의리가 없습니다. 이에 조정에 들어와서 왕실을 보위하면 손과 같고 발과 같으며, 외방으로 나가 외적의 침입을 막으면 병풍이 되고 울타리가 되니, 강함은 족히 왕실을 보호하고 은혜는 족히 어린 임금을 부탁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종족을 임용하여 흥성한 자만 보았을 뿐, 종족을 소원하게 대하고서도 망하지 않는 자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전대의 일을 역력히 거론할 필요도 없이 주(周) 나라, 진(秦) 나라, 한(漢) 나라, 위(魏) 나라의 일만을 가지고 그 득실에 대해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주 나라는 관작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천위(天位)를 같이하였습니다. 안으로는 공(公), 경(卿), 대부(大夫)의 관작이 있었고, 밖으로는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나라가 있어서, 별이 늘어서서 북극성을 향해 조아리는 것처럼 원근에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 희성(姬姓)의 친족이 열에 여덟을 차지하고 있었는바, 전적으로 위임하고 성대히 봉건(封建)함이 이때보다 더한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왕실을 핍박하는 걱정은 대대로 없었으며, 울타리가 되고 보필하는 이로움만 대대로 있었습니다. 이에 깊은 뿌리가 단단하게 얽히었고 잡아 묶은 것이 공고하여 개의 어금니처럼 서로 맞물려 있었는바,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폐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동주(東周)가 쇠약해져서는 왕의 위엄을 떨치지 못했는데도 오히려 천하의 임금 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방백(方伯)과 연수(連帥)로 있는 자들 역시 주(周) 나라를 높이는 것이 의리라는 것을 모두 알아, 혹 왕실을 보위하는 부지런함을 드러내었고, 혹 추대하는 정성을 바쳤습니다. 이에 비록 솥을 묻는 참람한 자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간웅(奸雄)이 군침을 삼키면서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감히 군사를 일으켜 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겠습니까. 참으로 종성(宗姓)들이 강한 것을 두려워하고 천하 사람들이 함께 토벌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던 것입니다.


광포하였던 진(秦) 나라는 한갓 나라가 미약한 것을 징계할 줄만 알았지, 고립되는 것이 걱정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는바, 객경(客卿)을 중용하고 종신(宗臣)을 멀리했습니다. 이에 봉건제도가 한번 무너지자 나라의 근본 뿌리가 저절로 뽑혀, 마을의 왼쪽에 사는 군졸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일어나 한 번 소리치자, 견고하였던 함곡관(函谷關)이 다시는 침입을 막는 울타리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만약 친왕(親王)과 자제(子弟)들이 연(燕)과 제(齊) 지방에 나누어 있고, 종실(宗室)과 대신(大臣)이 중외에서 굳게 맺어져 있었다면, 진 나라가 아무리 무도하였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렇게까지 빨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漢) 나라 고조(高祖)는 진 나라가 망한 것을 거울로 삼아 동성(同姓)의 친족들을 많이 봉하였는바, 비록 잘못을 시정하려고 하다가 지나치게 한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 의논하는 자들이 이미 종족이 반석처럼 튼튼하다고 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 여씨(呂氏)들의 화란을 꺾고서 대저(代邸)를 세우는 일을 이루었으니, 유씨(劉氏)를 편안히 하고 종사를 안정시킨 공은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제(武帝)는 칠국(七國)의 변란에 징계되어 종친들의 힘을 약하게 하였는바, 제후로 있는 종친들에게 조세(租稅)만 받아 먹고 살게 하고, 정사에는 일절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쇠약하였던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때에 이르러서는 친족들이 더욱 소원해져 형세가 마치 부민(富民)과 다름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망(王莽)이 내외(內外)가 잔약해졌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황제 자리를 찬탈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 당시에 참으로 남양종실(南陽宗室)의 어짊이 아니었더라면 한 나라 황실의 제사가 거의 끊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조위(曹魏) 때의 일에 이르러서는 본디 말할 만한 것이 못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위 나라가 망한 까닭을 따져 보면 실로 종친들을 스스로 버린 데에서 말미암았습니다. 그 당시에 이성(異姓)의 신하들은 모두 수천 리의 땅을 차지한 채 군무(軍務)를 주관하는 임무를 겸하고 있었는바, 혹 몇 사람이 여러 나라를 나란히 차지하기도 하고, 혹 형제가 나라를 나란히 점거하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실의 자제들은 텅 빈 지역의 왕으로 있으면서 부리지도 못할 백성들의 임금 노릇이나 하고 있었던 탓에, 일찍이 한 사람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그들과 서로 견제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망하지 않으려고 한들 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위 나라의 종실 신하 가운데 조식(曹植)이나 조경(曹冏)과 같은 자들이 이미 그에 대해 애통해하는 말을 하였지만 끝내 그것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여러 마리의 말이 한 구유에서 먹는 화(禍)를 그 누구와 더불어서 막겠습니까.


아아, 전대의 일을 잊지 않는 것이 후대의 분명한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몇 대의 일을 하나하나 거론하였으니 그에 대한 득실이 그 안에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지금 어느 것을 본받아야 하겠습니까? 본받아야 할 것이 주 나라와 한 나라에 있지 않습니까. 지금 어느 것을 삼가야 하겠습니까? 삼가야 할 것이 진 나라와 위 나라의 일에 있지 않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성조께서 왕업을 여신 이후에 거룩한 임금이 대대로 나와서는 종친들과 화목하게 지낸 요(堯) 임금의 어짊을 본받고, 종족들을 융성케 한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교화를 미루어 나가, 집안을 바르게 해 나라를 바르게 하고, 친한 이부터 먼저 하여 소원한 자에게 미쳐 나갔습니다. 이에 많은 어질고 훌륭한 사람들이 뭇 관직에 나란히 있으면서 서로 더불어 국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왕실을 보위하고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의 성대함과 나라의 성처럼 견고함이 천고에 뛰어남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중엽 이후로 종실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염려함을 면치 못해 마침내 일절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였는바, 《선원록(璿源錄)》에 들어 있는 종친들에 대해서는 친소(親疎)도 묻지 않고 현우(賢愚)도 구별하지 않은 채 모두 금고시켜, 그들로 하여금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직책에는 한계가 있어서 끌어안고 있는 것은 헛된 명호(名號)일 뿐이며, 몸은 귀척(貴戚)의 신분이면서도 쳐다보고 있는 것은 반록(班祿)일 뿐입니다.


국가에서는 종실 신하들을 적국 사람들처럼 대해 방금(防禁)이 엄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고 있고, 종실의 신하들은 나랏일을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정(情)과 의(義)가 미덥지 못하고 은혜와 믿음이 흡족하지 않게 되어, 골육간에 서로 단단하게 맺어지는 튼튼함은 없고, 근본 뿌리를 뽑아 내는 걱정만 있습니다. 임금의 형세는 위에서 날로 외로워지는데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종실들은 아래에서 날로 낮아져 가는데도 돌볼 줄 모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국가의 체모입니까.


지금 말하는 자들은 혹 종성(宗姓)의 친족들은 지위가 높고 세력이 큰데 만약 또다시 그들에게 권한까지 빌려 준다면 반드시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아아, 어쩌면 그렇게도 생각이 짧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천하 국가를 차지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 흥망과 치란에 있어서 모두 말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난망(亂亡)을 당한 자들은 그 원인이 과연 모두 종성들에게서 말미암았습니까? 그리고 외신(外臣)에게 전적으로 내맡긴 자들은 반드시 흥하고 또한 다스려졌습니까?


무릇 권한이 있는 바에는 비록 소원한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형세가 중해지는 법이고, 세력이 제거된 바에는 아무리 친한 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가벼워지는 법입니다. 만약 종신(宗臣)의 세력이 크다고 해서 반드시 외신에게 권한을 빌려 주어야 한다고 한다면, 유독 제(齊) 나라를 차지한 자가 전씨(田氏)이지 여씨(呂氏)가 아니고, 진(晉) 나라를 쪼개어 차지한 자가 조씨(趙氏)와 위씨(魏氏)이지 희성(姬姓)이 아니었다는 것은 보지 못한단 말입니까? 좋을 때는 그 직위를 독차지하고 어려울 때는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은 이성(異姓)의 신하들이고, 보존됨에 그 영광을 함께하고 망함에 그 화를 함께하는 자는 공족(公族)의 신하들인 법입니다. 그러니 지금 공족을 소원히 대하고 이성을 친하게 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점을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아, 국가의 성쇠(盛衰)는 일정하지 않은 법이고, 천하의 사변(事變)은 무궁한 법입니다. 지금의 경우를 보면, 국가의 형세가 당당하고 위복(威福)의 권한이 옮겨지지 않아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각자 자신들의 직분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종족의 신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어서, 있고 없고에 따라 달라질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만일 이성의 신하 가운데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 예(羿)나 한착(寒浞)과 같은 간사한 자가 있어, 위복의 권한을 농락하면서 조정에 걸터앉아 있다가 종친이 단약(單弱)하다는 것을 알고는 왕위를 찬탈할 흉모를 꾀해, 사문(私門)에서 당파를 결성하고 조정에서 임금을 고립시킬 경우, 그때 가서는 나라를 성(城)과 같이 막아 주는 종친과 어려움에 먼저 달려나가는 형제가 있다 하더라도, 손에는 주허후(朱虛侯)의 칼이 없으니 그 누가 여씨(呂氏)를 제압한 공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짐을 떨어뜨리고 난 다음에는 백(伯)을 청하여 도와 달라고 하더라도 어찌 미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밝은 자는 일이 드러나기 전에 도모하는 법이고, 지혜로운 자는 일어나기 전에 기미를 밝게 살피는 법입니다. 오늘날의 형세로써 뒷날의 환난을 살펴본다면, 드러나지 않았고 일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말하기를, “쌓아 놓은 섶 아래에 불씨를 놓아 두고서도 불이 타오르지 않자 안전하다고 여긴다.”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오늘날의 형세를 두고 한 말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난망이 항상 외척(外戚)에게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으로 있었던 사람들이 혹 외척의 권한을 억제시키고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던 경우가 있었는데, 조위(曹魏)의 저령(著令)과 명(明) 나라의 가법(家法)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척리(戚里)들을 중용하여 조정에 포진시키고 있어서 나라를 그르친 간인(奸人)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는데도 오히려 막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유독 동성(同姓)의 종친에 대해서만은 미처 금하지 못할 듯이 금고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걱정해야 할 바는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걱정하지 않을 바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는 꼴입니다.


아아, 국가의 법이 이미 이와 같으므로 종친된 자들은 스스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고 자중하는 뜻이 없이 달가운 마음으로 자포자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의 부형들은 자제들을 가르칠 줄 모르고 자제들은 부형을 섬길 줄을 몰라서 예법을 팽개친 채 마음내키는 대로 행동하는바, 그들이 평생토록 하는 일이라곤 닭싸움이나 개 달리기 같은 놀이가 아니면 기방 출입과 사냥 등의 오락입니다.


귀로는 육예(六藝)의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하고 눈으로는 반 줄의 글조차 보지 않아, 무지하고 몽매하며 불량스럽고 무뢰합니다. 이에 법망에 걸려들어서 패가망신하는 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혹 선을 행하기를 동평(東平)과 같이 하고, 학문을 좋아하기를 북해(北海)와 같이 하는 자가 있더라도 재주를 쓸 곳이 없고 덕을 베풀 데가 없습니다. 그러니 봄가을로 조현(朝見)하는 반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일생을 마치는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이 또한 몹시 애통한 일입니다.


아아, 밖으로 국학(國學)을 설립한 것은 선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안으로 종학(宗學)을 설립한 것은 공족(公族)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학교 정사는 자못 개혁한 것이 있어서 인재양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학에 대해서는 유독 폐기한 채 거행하지 않고 있으며, 비록 종실의 신하들이 청하는 바가 있어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동성들을 도리어 소원한 관계인 외신(外臣)들만도 못하게 보아서 그들의 재주와 어짊을 길러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진(秦) 나라에서 선왕(先王)의 법을 폐기하여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었는데, 지금은 종학에서의 가르침을 폐하여 공족들을 우매하게 만들고 있으니, 국가의 정사가 형편없는 것이 불행하게도 진 나라와 서로 비슷합니다.


신은, 융성하였던 삼대(三代) 시대 때에는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준수한 종자(宗子)들을 모두 함께 태학(太學)에 입학시켜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가르쳤다고 들었지, 학교를 둘로 나누어서 가르쳤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후세의 학교에 관한 법은 이미 성왕(聖王)들의 제도를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또 이것마저 폐한 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폐고(廢錮)시키는 법이 이미 그들의 선을 행하려는 마음을 꺾었는데, 종학을 폐하여서 또다시 그들을 이끌어 양성하는 방도를 잃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종족들이 근후(謹厚)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역시 틀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역대의 득실을 거울 삼고 조종조의 좋은 규정을 본받아서 폐고시키는 법을 없애고 등용하는 법을 회복시키소서. 그리하여 그들의 현부(賢否)를 가려서 재주에 따라 임용하여 혹 대신(大臣)의 반열에 올려 놓거나 감사(監司)의 직임을 떠맡겨서, 그들로 하여금 백료(百僚)들 사이에 섞여 있고 중외(中外)에 포진해 있게 하소서. 그리고 녹봉을 많이 주어서 은혜를 융성하게 하고 직임을 맡기어서 능력을 다하게 하여, 안으로는 골육의 은혜를 다하고 밖으로는 군신간의 의리를 밝힘으로써,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면서 복심(腹心)처럼 내맡기소서. 가지와 잎이 무성하면 근본은 저절로 튼튼해지는 법으로, 형제들간에 각궁(角弓)의 원망이 없고 국세(國勢)는 백족(百足)의 지탱이 있을 것이니, 그 이해와 득실은 명약관화하여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다음 또 종학에 관한 법을 밝혀서 경학과 행실을 구비한 사람을 가려 뽑아 사표(師表)로 삼고, 종실 가운데 근후하고 노성한 사람을 뽑아서 종학에 관한 정사를 주관하게 해, 효제(孝悌)의 의리를 신장시키고 수기치인의 도를 가르치게 하소서. 그리고 위로는 왕자로부터 아래로 종실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친소를 따지지 말고 오직 학행의 높고 낮음만을 보아 등용시키거나 버리소서. 그렇게 한다면 종실 사람들이 모두 부지런히 학문에 힘쓸 것이니, 누가 감히 자포자기한 채 흥기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조종조 때에는 종친들이 모두 문무과(文武科)에 응시하여 거자(擧子)들과 차별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친소를 똑같이 보고 피차를 차이가 없게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시험을 설치하여 인재를 뽑는 것은 본디 삼대 시대의 법이 아니라, 쇠미해진 시대에 행한 것으로, 이는 단지 요행을 바라는 풍조나 불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종실의 자제들로 하여금 종이에다가 붓이나 희롱하면서 유사(有司)들 앞에서 득실을 겨루게 한다면, 믿음직하고 덕이 도타운 공성(公姓)으로서 부박한 사습(士習)만을 다투게 될 것이니, 그에 따른 말류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종친들이 입사(入仕)하는 것은 별도로 한 길을 만들어서 오직 덕(德)만 보고 선발하도록 하고 과거 시험을 치르지 말도록 하며, 문학의 재주가 있는 사람은 동반직(東班職)에 서용(敍用)하고, 무예의 재주가 있는 사람은 서반직(西班職)에 서용하도록 하여, 재주와 덕을 헤아려서 각자 그 재주에 맞게 직책을 제수하여야 할 듯합니다. 또 대대로 경대부(卿大夫)를 세습하는 법을 엄하게 해서, 주(周) 나라의 윤씨(尹氏), 무씨(武氏), 잉숙씨(仍叔氏)와 같은 자가 있을 경우에는 비록 귀척의 반열에 있더라도 권세와 지위를 대대로 누리지 못하게 해야 할 듯합니다. 그럴 경우 지나치게 염려하여 막거나 화란이 싹트는 계제가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굽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지금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일은 바로 현재 꺼리고 있는 일들로, 신하로서는 말하기가 어려운 일들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일에 천하의 공적인 큰 의리가 있으면 임금이 신하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할 수 없는 법이고, 신하 역시 임금에게 말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노산군의 직위는 당시의 큰 권도(權道)에 있어서는 폐위시켜야 하고, 만대의 큰 의리에 있어서는 복위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은 역모를 도모한 죄를 가지고 논하면 삭직하여야 하고, 절개에 죽은 마음을 가지고 따져 본다면 권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종성 친족들의 일에 이르러서는, 한때의 지나친 염려를 위해서는 금고시켜야 하고, 역대의 득실을 가지고 살펴보면 등용시켜야 합니다. 당시의 큰 권도를 쓴 것을 가지고 기휘하여야 한다고 한다면 탕무(湯武)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왕명을 거역한 죄를 가지고 주벌해야 한다고 한다면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절개를 아는 것이 아니며, 한때의 견해를 가지고 본받아야 한다고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말한 바는 천지의 상경(常經)이요 고금의 통의(通義)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황명(皇明)에서는 인종(仁宗), 헌종(憲宗)이 건문제(建文帝)의 신하들을 용서하고 경태제(景泰帝)의 황위(皇位)를 복위시켜 주었으며, 본조(本朝)에서는 태종과 성종께서 정몽주의 절개를 표창하고 사육신의 당파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종친들을 서용하는 법과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또 성조(聖祖)들께서 이미 시행한 것입니다. 역대의 사실에서 상고해 보면 이미 저와 같고, 당대의 사실로 미루어 보면 또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시행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현재 여러 대 동안 권간(權奸)이 용사한 뒤라서 삼강이 밝혀지지 않고 절의가 하나도 없어서, 인심이 날로 더러워지고 있으며 사기(士氣)가 날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에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만 있고 절개에 죽고 의리에 죽는 풍조가 없어, 조금이라도 이해에 관계가 있으면 문득 지키는 바를 잃고 있습니다.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이처럼 극도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국가의 복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 데다가 종친들이 외롭고 단약하여 사직을 보위하는 사람이 없는 탓에 칡덩굴이 뿌리를 보호하는 것만도 못합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자가 오늘날의 일을 본다면 어찌 한심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동한(東漢)은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빠르게 흥성하였고, 서진(西晉)은 명검(名檢)을 천하게 여겨서 갑작스럽게 망하였습니다. 한때에 숭상하는 바가 그 시초는 아주 미약하나, 그 성과가 흥망 성쇠에 드러나는 것은 아주 원대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 번 시행하는 수고를 아까워해 만대토록 무궁한 염려를 하지 않으십니까.


신은 직책은 미미하고 말은 천하여 참으로 성상께서 들으시고 믿기에 부족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견마(犬馬)와 같은 하찮은 충성은 참으로 직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시사(時事)를 눈으로 목격하고는 비분한 마음이 가슴을 메워, 감히 베를 짜는 과부의 걱정을 가지고 삼가 미나리와 햇볕을 바치는 정성을 본받았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굽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은 가슴이 북받쳐오름을 금치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