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객 임제의 시조와 사랑
조선시대를 통틀어 제일 가는 풍류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임제(林悌)는 나주시 다시면 회진마을에서 무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호방한 성격과 함께 학문에 뜻을 두어 좋은 스승을 찾아 많은 공부를 하였고, 시도 잘 지었으므로 세상에 크게 쓰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궁달(窮達)에서 받는 속박을 싫어하였던 그의 성품으로 인하여 29세 때의 장원급제로 제수 되었던 예조정랑의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인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등과 사귀면서 산천을 유람하며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많은 시와 기녀들과의 사랑, 그리고 양반사대부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풍류객이었던 양반사대부의 행적에는 반드시 기녀와의 사랑이 따르기 마련이다. 기녀 쪽에서 보면, 그들이 가진 원초적인 신분적 속박과 더불어 성리학의 틀에 얽매여 있는 사대부와의 교류는 그들을 더욱 숨막히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틀을 깨고 자유롭게 활보하는 풍류객이야말로 기녀들에게 있어서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고, 바로 임제가 그러했다. 그가 평안부사로 부임하는 도중 기녀였던 황진이의 무덤 앞에 술 한잔을 부어 놓고 시조 한 수를 지어 살았을 때 만나지 못한 아쉬움에 대한 감회를 읊은 까닭으로 파직 당했다고 하는 일화와 함께 한우(寒雨)라는 기녀와 주고받은 시조는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북천이 맑다 기에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한우라는 기녀와 술을 마시던 임제가 이 시조를 지어서 그녀의 마음을 은근히 떠보았더니 한우
역시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라는
시조로 화답을 하였다. 이 작품이 실려 있는 해동가요에 의하면 그날 밤 두 사람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맺었다고 되어 있다. 임제의 시조에는
사랑을 구하는 마음이 시상으로 잘 나타나고 있으며 중의적인 표현이 그것을 잘 살려주고 있어서 시를 아는 사람의 작품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한우의 화답시는 아무래도 엉성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한우라는 말이 가진 중의적 의미에 대한 같은 의미의 중의적 표현은 좋은데, 그
다음의 녹아 잘까 하노라가 한우라는 말이 가진 중의적 표현을 무참히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찬비를 맞아서 얼어 잘까 한다는 임제의 말은 한우를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것인데, 녹아 잔다고 화답한 한우의 시조는 찬비를 맞아서 추우니까 녹여주겠다는
정도의 단순한 의미밖에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1000여수에 가까운 한시를 남겼으며, 가전(假傳)의 전통을 이어받은 [수성지(愁城誌)]를 비롯하여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의 산문과 3편의 시조를 지었던 그는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어느 누구보다 긴 삶을 살다 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고향인 회진마을에 그의 기념관이 서 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나주-목포간 1번 국도 변의 신걸산 꼭대기에는 그의 산소가 있다. 너무 높은 자리에 있어서 흔히 말하는 명당은 아닐지 모르지만 풍류시인으로 살 수 있게끔 자연사랑의 방법을 가르쳐 준 영산강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서 그의 혼백이 아주 행복해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다. 그의 산소를 찾아가서 술 한잔을 부어 놓고 수 백년 전 그가 황진이 무덤 앞에서 가졌을 아쉬움과 감회를 시공을 초월하여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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