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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세계/우리문학현장기행

고려를 그리워한 황희의 문학

by 竹溪(죽계) 200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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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그리워한 조선의 제상 황희

  고려가 기울어가던 공민왕 12년(1363)에 태어난 황희는 공양왕 2년인 1390년에는 성균관학록에 제수되나 1392년 이성계의 구테타로 고려가 망하자 강원도의 두문동으로 숨게된다. 그러나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의 부름과 두문동 선비들의 권유로 인하여 세상에 나온 그는 9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60여년의 관직생활과 18년에 걸친 영의정을 역임하였는데, 조선시대 최고의 명재상이며 가장 청렴한 청백리라는 칭호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조선조 역사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영의정을 가장 오랜 동안 지낸 명정승이기는 하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품과 하늘을 찌르는 강한 기개를 가졌던 그는 절은 시절에는 여러 번 부침(浮沈)을 거듭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중에는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어주었던 군주인 세종을 만났기 때문에 그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에 일생을 바친 때문인지 그의 문학작품은 남아전하는 것이 많지 않는데, 한가로운 농촌의 가을 풍경을 그림처럼 그려낸 시조 한편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대추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떨어지며,  벼를 벤 그루터기에 게는 어찌 내려오는고,  술 익자 체장사 도라가니 아니 먹고 어이하리" 조선조 전기의 시조들을 보면 자신의 정서를 강조하여 표현하는 것, 산수자연을 찬양하고 선계의 생활을 동경하는 것, 교훈적인 유교이념을 노래한 것 등이 중심을 이루는데, 황회의 이 시조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시조의 초기 형태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몸과 관직은 조선조에 있지만 마음의 뿌리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작품이 가지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작품이 이렇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은거했었다는 사실과 세상에 나온 뒤로도 세상의 부귀와 공명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그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조는 지금까지 해석되어 온 것처럼 농촌의 한가로운 풍경과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뿌리를 드러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사회의 명재상으로만 인식할 것이 아니라 고려의 멸망을 가슴 아파하면서도 백성의 안일과 세상의 평안을 위해 할 수 없이 세상으로 나왔던 시인의 심정이 "아니 먹고 어이리"라는 마지막 구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이 태어났던 시대의 왕조인 고려를 따르려는 마음이 뿌리를 이루면서도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는 선비의 이념이 공존했기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를 기리는 유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두 가지인데,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당동리에 있는 반구정(伴鷗亭)과 강원도 원덕읍 노곡리에 있는 소공대비(召公臺碑)가 그것이다. 반구정은 임진강변에 있는 조그만 정자인데, 갈매기를 짝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연의 위에 군림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동등한 입장에서 그것의 부속물로서 갈매기와 짝한다는 의미를 지닌 반구정이란 말은 그 어휘가 갖는 뜻만으로도 환경오염에 시달리는 현대의 우리들에게는 샘물과 같은 시원함을 제공해주는 듯 하다. 소공대는 세종 5년(1423) 동해안 지방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관찰사로 부임하여 식량을 나누어주며 어려움을 구해준 황희 정승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산 위에 돌을 모아 쌓은 것이다. 나중에 비석을 세워서 소공대비라 했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명정승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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