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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단상/고향이야기

농한기의 농촌겨울밤

by 竹溪(죽계) 2005.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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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한기의 농촌 겨울밤

 

   농촌의 길고 긴 겨울밤엔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나이와 성별에 따라서 노는 방법이 아주 다양했다.

 

   남자 어른들 중 노인 층은 새끼를 꼬거나 멍석 같은 것을 짜면서 옛날이야기로 긴 밤을 보내고, 장년 층은 화투를 해서 술내기로 겨울밤을 하얗게 밝히곤 하였다. 이와는 달리 여자 어른들은 장년 층 이상의 나이가 되는 사람들은 한 방에 모여서 고전소설을 읽거나 귀신 이야기를 하는 것 등으로 시간을 보내고, 그보다 젊은 층 부녀자들은 밤참 내갈 준비를 하느라고 긴긴 겨울밤을 바쁘게 지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들은 처음에는 각각 다른 집에 모였다가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면 어느 집으로 함께 모여 돈을 모은 다음 술이나 과자 등을 사다가 먹으면서 알콩달콩 겨울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이때 처녀 총각들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이었다.

 

    우리동네에 아직 가게가 없었던 까닭에  옆 동네까지 가서 과자나 카스테라와 같은 군것질 할 것을 사와야 했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잔돈푼을 주기도 하고 가게에서 사온 과자 등을 나누어주기도 했었던 터라 기꺼이 심부름꾼을 자청하였던 것이다.


    남자어른들이 노는 곳에는 무서운 싸움이 종종 벌어지곤 했었다. 술 심부름하느라고 남자어른들이 노는 곳을 어쩌다가 가보면 여러 명이 둘러앉아서 담배를 연신 피워대면서 화투장을 뚫어지라고 바라보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왜 그런 것을 열심히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렇듯 열심히 화투를 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서로 속였다고 욕을 하면서 싸움이 벌어지는 일이다. 남자어른들이 술을 먹고 싸우는 것은 매우 무서웠기 때문에 우리들은 놀라서 멀찌감치 도망쳐 버리곤 하였었다. 그러다 조금 지나면  부인들이 와서 싸움을 말리게 되는데, 어떤 때는 부인들끼리 또다시 싸움이 붙기도 하여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되면 일단 놀음판은 파장이 되고 어른들은 부인들의 싸움을 말리느라고 진땀을 빼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를 잡고 마구 욕을 하면서 싸우는 아주머니들을 말리는 일이란 보통 일이 아닌데다가 남의 부인을 함부로 때리거나 잡아챌 수도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안절부절하는 남자어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기도 했다.

 

   이렇게 싸움이 커지게 되면 종국에는 아이들까지 합세를 해서 싸우게 되고 아이들이 싸워야 어른들의 싸움이 비로소 끝이 났다. 


   비교적 젊은 어머니들이나 새댁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서 놀고 있는 할머니나 남자 어른들, 그리고 꼬맹이인 우리들의 시중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방에 들어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막걸리가 중심을 이루었던 시절인지라 남자 어른들에게는 따끈하게 데운 술을 내가야 하는데다가 술안주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물을 끓여서 곁들여야 하기 때문에 겨울밤이면 굴뚝을 타고 하얗게 올라가는 연기로 인하여 분위기가 더욱 고즈넉하고 아득해지기도 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간식거리를 내가야 하는데, 낮에 밭에서 갓 뽑아서 깍은 배추뿌리, 가을에 추수한 감이나 고욤을 항아리에 넣어서 잘 익힌 홍시 같은 것, 수정과와 곶감, 식혜, 한과 같은 것들이 주로 간식으로 올려졌다.

 

    젊은 부인들은 이런 일을 하면서 서로 모여 이야기를 하며 정보를 주고받기 때문인지 그리 싫어하는 눈치도 아닌데다가 준비한 야식들을 나르면서 남편들을 감시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시중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들의 놀이라는 것이 집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지라 주로 집밖으로 나가서 하게 되었다. 어릴 때 즐기던 여러 놀이 중에서 순사와 도둑놈이라는 놀이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우리 마을에는 나와 동갑내기 아이들이 열 명 정도가 되고 바로 일년 아래의 아이들이 약 열 명 정도가 되었는데, 동갑내기가 도둑놈이 되고 일년 아래 아이들이 순사가 되어 칠 흙같이 어두운 겨울밤에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붙잡고 도망가는 그런 놀이었다.

 

   동네 주변의 언덕과 산을 우리만큼 잘 아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우리들이나 따라오는 후배들이나 서로 잘 아는 처지에서 시작하고 진행하는 놀이였다. 온 동네를 이 잡듯이 돌아다니면서 숨고 찾는 놀이였으므로 남의 집 울타리를 뛰어넘어 방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몇 길이나 되는 절벽을 뛰어내리기도 하였지만 다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부드러운 흙으로 되어 있었고, 산에는 낙엽이 쌓여 있어서 미끄러지거나 넘어져도 약간의 찰과상을 입는 정도였다. 그럴 때면 동네에 있는 개들도 덩달아 우리들을 따라다니면서 짖어대기 때문에 사위가 적막한 농촌의 밤이 우리들과 개들로 인하여 시끄럽기 그지없는 소란한 밤으로 바뀌기도 했다.

 

   거기에 한가지 더 보태는 것이 있었는데 마을 주변에 있는 저수지에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찌지직, 짜자작 하면서 갈라지는 얼음 소리는 정말 대단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써 온도가 매우 내려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밤이 상당히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들은 서운한 마음을 남겨놓은 채 각각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눈이 내렸거나 내리는 날은 바깥에서 놀 수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우리들은 어른들이 놀러가서 비어 있는 집의 사랑방을 정해 함께 모여 놀곤 했었다. 이 때는 주로 귀신 이야기를 하거나 윷놀이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므로 별로 재미가 없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처녀, 총각들이 노는 방으로 가서 무엇을 하는지 훔쳐보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불 하나를 방 한가운데 펼쳐놓고 그 안에 발을 넣은 채 둘러앉아서 뭐가 그리 우습고 재미있는지 연신 웃고 떠들면서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훔쳐보는 것도 별로 재미가 없어지면 화투를 가져다가 민화투라는 것을 하고 놀기도 하는데, 주로 손목 맞기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므로 역시 별 재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나는 가끔 할머니들에게 호출되어 가기도 하였다.

 

   이는 고전소설을 읽어달라는 주문 때문이었다. 50대 이상의 할머니들만 모여 있는 곳은 주로 아늑하고 따뜻한 안방이었다. 호롱불을 중간에 놓고 10명이 넘는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가면 반갑게 맞이해서 아랫목에 앉으라고 한 후에 소설책을 주고는 읽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호롱불 바로 앞이 아니면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어둡기 때문에 내가 호롱불 앞에 앉아서 소설책을 손에 들고 소리를 내어서 읽을라치면 할머니들은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내가 글을 잘 읽어서라기보다는 곧 이어 나올 슬픈 내용 때문이었다. 할머니들은 소설책을  셀 수 없이 많이 읽고 들었던 터라 줄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할머니들이 각각의 슬픔과 회환에 잠겨 있을 때 집밖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리고 세상이 온통 하얀 가운데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찢어지는 소나무 가지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리면 나의 책 읽는 소리는 점점 더 낭랑해지게 마련이다.

 

    여기에 또 다른 화음이 무게를 더하게 되는데, 눈이 와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산 속의 늑대가 아이 울음소리를 내고 더불어 부엉이의 울음소리도 함께 들리곤 하였다.

 

    이러한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진 상태에서 집과 집 사이를 이어주는 골목길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시중을 들던 젊은 부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을 멈추고 잠시 동안 넋을 잃고 그 소리를 듣다가 가곤 하였다. 이렇듯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겨울 농촌의 밤은 자연과 사람이 하나된 상태에서 깊어가기만 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비록 풍족하지 못했지만 그 때의 생활이 얼마나 자연친화적이며 인간적이었는가를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물질의 풍요와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삶은 편리해졌는지 모르지만 잠시도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생의 수레바퀴 속에서 우리들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과연 그 때의 행복지수보다 높다고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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