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에서 내리는 따끈따끈한 비와 처녀에 대한 이야기
느릅나뭇과에 속하는 느티나무는 우리의 삶 속에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생활속의 친구로 생각될 만큼 정겨움이 묻어나는 존재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가장 넓은 지역에 심어져 있으며,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던 나무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유달리 느티나무를 좋아했던 우리 선조들은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반드시 이 나무를 심어서 마을의 입구임을 표시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서든 이것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지금은 거의 없어진 풍속이지만 이 나무는 보통 마을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 의해 심어져서 정성스럽게 가꾸어지고 모셔졌기 때문에 동구 밖에 서 있는 느티나무의 크기만 봐도 그 마을의 역사가 대략 얼마나 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고도 믿었던 관계로 모든 정성을 기울여서 나무를 사랑하고 가꾸었기 때문에 나무가 심어지는 순간부터 금줄(禁柵)을 쳐서 철저하게 보호를 하면서 소원을 빌 것이 있으면 그곳에 돌을 던지면서 빌곤 하였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정월 보름이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의 안녕과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행사의 하나인 동제(洞祭)를 느티나무에 지내기도 했기 때문에 그때만 되면 그곳은 축제의 마당으로 바뀌곤 하였다.
수백 년에 걸쳐 보호를 받으면서 튼튼하게 자란 느티나무는 수십 미터가 넘을 정도로 키가 커지면서 수많은 가지가 옆으로 벌어져서 울창한 숲은 이루기 때문에 정자나무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름이면 엄청난 크기의 그늘을 만들어주는 관계로 길가는 사람이 쉬어가기도 하고, 동네 어른들은 장기나 바둑을 두다가 낮잠을 자기도 하는 최고의 쉼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신으로 모셔지기도 하는 느티나무지만 나와 같은 개구쟁이들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놀이터가 없을 정도였으니 나무 위에 올라가서 원숭이처럼 가지를 타고 다니면서 놀기에 안성맞춤인 나무가 바로 동구 밖의 느티나무였기 때문이었다.
느티나무는 크기도 크지만 나무의 재질이 단단해서 여간해서는 부러지지 않기 때문에 몸무게가 가벼운 우리들은 아주 가는 가지의 끄트머리까지 나가서 앉아있어도 휘청거리기만 할 뿐 찢어지거나 부러지지 않는 관계로 짜릿한 스릴을 느끼기에 이것만한 것이 없을 정도다.
학교에서 보았을 때 남쪽 방향에 집이 있었던 나는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통 두 세 개의 느티나무를 지나야만 하는데, 학교에서 남쪽으로 약 500미터 정도 떨어진 길 가에 서있는 느티나무가 우리들이 올라가서 놀기에 가장 알맞은 크기였다.
돌다리(石橋)라는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이 나무는 우리가 통학하는 큰길가에 걸쳐서 서 있는데, 수백 년도 넘게 살아서 그런지 키도 큰데다가 옆으로 벌어진 수많은 가지가 커다란 원을 그릴 정도로 둥글게 되어 있어서 나무에 올라가서 가지타기를 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나무를 보호하느라고 밑동은 돌로 만든 받침대까지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고, 잎이 무성하여 나무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아래쪽에서는 쳐다봐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리를 내지 않고 있으면 사람이 있는 것을 모를 정도로 풍성한 놀이터를 제공해주는 곳이 바로 이 느티나무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봄부터 가을까지의 기간에는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는 거의 매일 이 나무에 올라가서 싫증이 날 때까지 가지타기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어떤 때는 너무 신나게 놀다보면 해가 지는 때도 있어서 어두운 뒤에야 집으로 와서 늦게 왔다고 혼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우리 같은 개구쟁이들이 얼마나 많이 아무에 올라가 놀았는지 아이들이 주로 가지타기를 하는 나뭇가지는 반질반질할 정도로 윤이 나있었다. 우리들은 누가 더 가는 가지를 탈 수 있는지를 뽐내면서 최대한 끝까지 나가는 경쟁을 많이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작았던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도 작은 체구를 그대로 유지해서 몸무게도 별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가는 나뭇가지까지 타고 나갈 자신이 있었다.
이처럼 나무 위에 올라가 놀다보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몇 시간이 훌쩍 가는 것은 예사였는데, 가끔씩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곤 하였으니 소변을 보고 싶어지는 일이 그것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나무에서 내려와 소변을 보고 다시 올라가는 방법을 모색하겠지만 내려오고 올라가는 수고로움이 귀찮은데다가 내려오고 올라가는 시간 또한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가능한 한 나무 위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냥 나무 위에서 아래를 향해 소변을 보는 정도로 하다가 내가 친구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오줌을 누되 그냥 허공에 버리는 것은 너무 아까우니 사람들이 지나갈 때 그 위에 누면 훨씬 재미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다들 좋다고는 했지만 혹시 어른들이 화를 내며 붙잡아서 혼을 내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이 앞서서 망설이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정했으니, 첫째, 남자는 제외한다. 둘째, 우리 같은 꼬맹이도 제외한다. 셋째, 우리보다 학년이 높거나 나이가 많은 남자 형들은 제외한다. 등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보니 남은 것은 할머니들과 아주머니, 그리고 나이가 젊은 처녀 누나들뿐이었다. 그래서 나무 위에서 다시 회의를 하기를, 할머니는 걷기도 힘드니 제외하도록 하고, 아주머니와 처녀를 기다렸다가 지나갈 때 동시에 공격을 하자고 약속을 하였다.
이처럼 많은 대상을 제외 시키다보니 여간해서는 딱 들어맞는 대상을 만나기가 힘들었는데, 며칠에 한 번씩은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경우가 있어서 놀라게 해드리는 일을 가끔씩 만들게 되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따뜻한 비를 맞은 아주머니들은 처음에는 놀라다가 곧 알아채고는 고함을 지르면서 혼구녕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는 하였지만 나무 위로 올라오거나 아래에서 기다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몇 번 소리를 지르면서 누구인지를 알고 있으니 빨리 내려오지 않으면 학교 선생님한테 일러바친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우리들은 일단은 겁을 먹고 조용히 있었는데, 그 일로 학교에서 혼나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어떤 아주머니도 학교에 일러바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신나게 놀다보니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는데, 좋은 대상이 지나가지는 않는지 살피기 위해 가장 높은 가지로 올라가서 남북으로 뻗은 도로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멀리서 어떤 아주머니가 예쁜 한복을 차려 입고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옳다구나 하고 생각한 나는 아래에 있던 친구들을 적당한 자리로 불러 올려서 모두 함께 준비를 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한 참을 지난 후에 그 아주머니가 아래를 지나갈 때 동시에 소변을 보았는데, 그 순간 상상도 못할 일이 발생하여 우리들은 벌린 입을 한참 동안 다물지 못하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이미 한번 쯤 당한 경험이 있었던지 나뭇잎에 오줌 떨어지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양산을 꺼내서 쫙 하고 펼지는 것이 아닌가! 곧 이어 후두두두둑 하고 따듯한 물이 떨어졌으나 양산 위에 부딪쳐서 물방울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으로 그날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나무 아래를 지난 아주머니는 우리가 보라는 듯이 바로 옆 개울에 가서 양산을 씻어서 툭툭 턴 다음 여유만만하게 길을 가는 것이었다. 느티나무 위에서 일을 벌인지 꽤나 오래되었지만 이처럼 무참하게 당한 경우는 없었던 터인지라 나로서는 인생 최대의 실패를 맛본 셈이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우리는 더욱 절치부심하여 주위를 살피게 되었으니 양산이나 우산을 들고 있는 아주머니는 무조건 보내드리기로 약속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차츰 좋은 대상이 줄어들면서 성공하는 횟수가 줄어들 때쯤에 놀라운 대상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그날도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길 양쪽을 열심히 살피며 좋은 대상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볼일을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속으로 생각하면서 초조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변은 참을 만큼 참아서 거의 터질 지경이 되었는데, 마침 멀리에서 양장을 곱게 차려 입은 처녀 한 사람이 버스가 다니는 시내인 학교 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역시 하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서 그 처녀가 가까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처녀가 나무 아래를 지나가는 순간 우리 다섯 명은 동시에 볼일을 보기 시작했으니 오래 참아서 그런지 그날따라 상당히 많은 양의 따뜻한 물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물방울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그 처녀는 곧 그것이 오줌이라는 것을 알았차렸는데, 그 때는 이미 곱게 차려입은 옷이 거의 다 젖어버린 뒤였다. 너무나 놀란 그 처녀가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우리들의 볼일도 모두 끝났기 때문에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고 쥐 죽은 듯이 앉아 있는 중이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개구쟁이들의 짓이란 것을 안 그 처녀는 나무 위를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빨리 내려오라고 성화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겪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우리들은 태연자약한 척하면서 그대로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또다시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으니 길 가는 것을 포기한 그 처녀가 나무 아래 그늘에 앉아서 우리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들은 겁만 주고 그냥 가버리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인지라 속으로 얼마나 당황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진땀이 날 정도다.
우리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지금은 화가 나서 그렇지만 조금만 지나면 곧 포기하고 가던 길을 가겠지 라고 손으로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 처녀는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다리는 것이었으니 그때부터 우리는 거의 울상이 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누구인가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은 은근과 끈기를 자랑하는 무적의 청개구리부대가 아니었던가? 몇 시간 정도는 간단하게 버틸 수 있다고 자부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네 시간 이상이 지나서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지게 되었을 때에야 그 처녀는 겨우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가 있는 쪽을 향해 다시 한 번 매서운 눈길을 뿌리더니 외출을 포기했는지 오던 길을 되짚어서 가는 것이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 질 때까지 처녀가 가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 졸이던 길고 긴 시간이 정말로 지옥 같았던 하루였다.
전날 고생을 많이 했던 터라 다음날은 쉬기로 하고, 마을에 와서 선배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형들이 하는 말이 “아마도 그 처녀는 선을 보려고 나가는 길이었는데, 옷이 물에 젖는 바람에 선 보는 것을 포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에 그 처녀가 그 일 때문에 시집을 못가고 죽으면 처녀귀신이 되어서 너희들을 평생 동안 따라다니면서 괴롭힐지도 모른다.”고 우리를 겁주었지만 처녀 귀신은 내 전문이기도 했기 때문에 별로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의 그 말은 상당한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그날 밤 꿈에 그 처녀가 정말로 귀신이 되어서 나를 쫓아오는 바람에 밤새도록 도망 다니느라 고생을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심하기는 심한 장난을 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게 된다. 우리에게 엄청난 즐거움을 선사했던 그 느티나무는 10여년 전에 가보니 수명이 다해 죽어 버린 뒤였고, 그 자리에는 넓어진 도로만 휑하니 뚫려 있는 것을 보고 왔으니 참으로 세월은 무정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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