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의 동제와 굴뚝막기
몇 달 동안의 싸움 끝에 땅벌을 쫓아낸 것으로 하여 우리들은 스스로 영웅이 되었다고 뻐기면서 더욱 의기 양양하여 산과 마을, 들판 등을 휘젓고 다니면서 말썽을 부리고 놀았는데, 그처럼 정신없이 보내는 동안에도 어느덧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오면서 농한기의 끝을 알리는 정월 대보름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월보름은 새해의 농사 풍년과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무병무탈하기를 기원하는 洞祭가 열리게 되기 때문에 농촌 마을에서는 설날보다 훨씬 더 큰 명절로 여겨졌다. 특히 우리가 땅벌을 쫓아낸 神木아래에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게 되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우쭐해졌다. 땅벌을 쫓아내어 기가 오를대로 오른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 해의 보름 洞祭는 다른 해와는 견줄 수 없는 특별한 행사가 되었던 것이다.
동제는 보름이 되는 날 새벽에 지내게 되는데, 이를 위해 동네 어른들은 제일 먼저 마을 회의를 열고 지난해에 궂은 일을 전혀 겪지 않은 집을 골라 有司를 맡기게 되는데, 유사를 맡은 사람은 그 때부터 매일 沐浴齋戒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심신을 다스리며 제사를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동제 때 쓸 제수를 마련하기 위해 동네 청년들과 함께 총무를 맡은 어른이 소달구지를 끌고 장터에 가서 여러 가지 물건을 사오기도 하면서 마을전체가 잔치를 하듯 부산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제를 위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는데 신목으로 모시는 나무와 동네 입구에는 금줄을 걸어놓아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마을의 입구부터 시작하여 안쪽 끝까지의 길 양옆에는 엇갈리게 붉은 황토를 군데군데 뿌려놓아 외부로부터 나쁜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철저하게 차단시킨다.
마지막으로 동제 전날이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우물을 청소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삼발이처럼 생긴 큰 나무를 우물 위에 걸쳐놓은 다음 그곳에 도르레를 달고 큰 물동이를 아래로 내려보내서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물을 모두 퍼낸 후 체구가 작은 어른이나 청년이 삽과 빗자루 등을 들고 물동이를 타고 내려가서 우물 안을 깨끗이 하게 되는 것이다.
우물 청소가 끝나면 뚜껑을 덮고 다음 날 동제가 끝날 때까지 그 우물의 물을 길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동제가 끝나기 전에 우물물을 길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큰 재앙을 받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동제가 끝난 후 제일 먼저 우물물을 길어 가는 사람은 그 해의 운수가 대통한다는 것과 함께 일종의 금기를 통해 마을의 동제를 경건하게 치루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동제는 보통 새벽 한시 정도가 되어서 지내게 되는데, 유사를 맡은 제관이 제의 절차를 주관하게 되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신목에 큰절을 하면서 그 해의 소원을 빌고 마을의 안녕과 화목을 기원하게 된다.
그리고 일정한 금액의 돈을 내게 되면 소원을 적은 한지종이를 불에 태워서 공중으로 날려보내면서 이름을 불러주는 燒紙儀式을 갖게된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제물로는 전날 잡은 돼지의 머리를 비롯한 온갖 고기와 과일 그리고 여러 종류의 떡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준비하여 상을 차리게 되는데, 제사가 끝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서 집으로 가져가게 된다.
그것을 먹으면 일년 내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마을사람 모두가 믿고 있었으므로 나도 열심히 떡을 먹곤 했던 기억이 난다. 제사가 끝나면 새벽닭이 울 때까지 풍악을 울리면서 뒷풀이를 하다가 새벽이 되면 각자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어느 사이엔가 누군가에 의해 마을의 공동우물을 덮고 있었던 뚜껑은 열려지고 동네 어머니들은 깨끗한 정화수를 길어와서 식구들의 일년 안녕을 기원하는 오곡밥을 만들기 시작하느라 분주한 손길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들 역시 바빠지게 되는데 온 동네의 굴뚝을 틀어막아야 하는 매우 막중한 임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곡밥은 화력이 강한 불로 지어야 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가정에서는 겨울에 꽁꽁 얼은 소나무 가지를 준비해두었다가 그것을 사용하여 밥을 짓곤 하였다.
추운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푸른빛의 소나무는 불을 붙이기만 하면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며 세찬 불길을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게 되는데, 우리들이 하는 일은 굴뚝으로 연기가 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모든 집의 굴뚝을 가마니 같은 것으로 덮는 것이었다.
굴뚝을 덮어서 연기가 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부엌에 연기가 가득 차게 하여 어머니들이 눈을 뜨지 못하는 사이에 부엌 부근에 있는 김치독에서 김치를 훔치고, 처마 밑에 달려 있는 시래기를 훔쳐가기 위한 것이고, 다음으로는 열기가 굴뚝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 오곡밥을 잘 익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첫 번째 이유보다는 두 번째 이유가 더 중심일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아궁이와 구들을 통하여 굴뚝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많은 열을 빼앗아 가므로 굴뚝을 막지 않고 지은 오곡밥과 굴뚝을 막고 지은 오곡밥에는 맛의 차이가 현격하게 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밥짓는 시간이 모두 비슷한 관계로 짧은 시간에 수 십 군데의 굴뚝을 막아야 하므로 이 일은 우리 같은 개구쟁이들과 동네 청년들이 힘을 합쳐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청년들과 우리들은 한 사람씩 짝을 지어 이인일조가 되어 움직이는데, 우리들이 가마니로 굴뚝을 막는 일과 처마 끝에 걸려서 알맞게 마른 맛있는 시래기를 낫으로 싹둑 잘라서 가져가는 임무를 행하는 동안 청년들은 김치독에서 김치를 훔쳐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굴뚝을 막으면 그 때부터 연기가 아궁이로 역류하게 되므로 부엌은 순식간에 너구리를 잡을 정도로 자욱한 연기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일은 일년에 한번 정도 있기 때문에 어머니들과 누나들은 거의 모두 일년 전의 일을 잊어버리고 연기를 내보내기 위하여 모든 문을 열기도 하고 소나무에 불이 잘 붙도록 하기 위하여 쉴새 없이 아궁이를 부쳐대느라 정신없이 분주해지는 것이다.
눈물과 그을음으로 범벅이 된 어머니들과 누나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한지라 우리들은 한동안 굴뚝을 지키면서 가마니가 바람에 벗어지지는 않는지, 아니면 어머니들이 나와서 그것을 벗겨내지는 않는지를 감시해야 했다.
그 중에는 일찍 눈치를 챈 어머니들은 나와서 굴뚝을 덮은 가마니를 벗겨내곤 하는데, 그것을 어두운 데서 지켜보고 있던 우리들은 어머니들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말자 잽싸게 다시 덮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기를 최대한 많이 피워서 눈을 뜨지 못하도록 해야 청년들이 김치를 안심하고 훔쳐낼 수 있었으며 우리들 역시 시래기를 안전하게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가다가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한 집에 김치 한 포기씩을 훔쳐서 어른들이 없는 집을 골라 그 곳의 사랑방으로 모여들게 된다.
그렇게 하여 모인 김치와 시래기는 상당한 량이 되는데, 이것은 점심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먹는 비빔밥의 재료로 사용하게 된다.
임무를 완수한 우리들은 일단 집으로 흩어졌다가 아침에 오곡밥을 먹은 후 동네에서 가장 크고 넓은 부잣집의 마당이나 신목 아래의 공터로 다시 모이게 되는데, 이 때부터 약 세 갈래의 놀이패가 형성되게 된다.
남자 어른들과 나이든 여자 어른들이 한 패를 이루어서 동서로 나누어 윷놀이를 시작하고, 젊은 처녀들은 안마당에 모여 널뛰기놀이를 하고, 나이가 비교적 어린 청년들과 우리들은 제수용으로 잡은 돼지의 오줌통에 공기를 넣어 양쪽을 묶은 다음 그것으로 축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동네의 좁은 공터에서 공놀이를 하면 별로 재미가 없으므로 마을 앞에 있는 논에 가서 주로 하게 되는데, 우리들이 논을 밟아서 반질반질하게 해 놓으면 그 땅이 굳어져서 농사철에 논을 갈기가 매우 힘들어지기 때문에 주인에게 발각되면 다른 곳으로 쫓겨가야 했지만, 어른들은 윷놀이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던 터라 우리들은 안심하고 돼지오줌통 축구를 할 수 있었다.
동네 공터에서는 어른들이 도야, 모야 하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윷놀이를 하고 있고, 논바닥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공놀이를 하고 있으며, 안마당에서는 처녀들이 널뛰기를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고,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꼬맹이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조그만 동네를 뒤흔들고 있기 때문에 정월 보름날은 일년 중 가장 시끄러운 날이 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되면 우리들이 훔쳐다 놓은 시래기와 김치 등을 이용하여 어머니들이 준비한 비빔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구 뛰어다녀서 배도 고프지만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먹는 보름날의 점심 비빔밥은 일년 내내 우리들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도 각자의 놀이에 열중하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가 되면 일단 각자 집으로 흩어져 돌아가게 된다. 하루 종일 굶었을 소와 돼지, 개, 닭 등의 가축에게 먹이를 주어야 하고, 저녁의 쥐불놀이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개는 보름달이 뜨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도록 묶어 놓아야 했었는데, 보름달이 뜨기 전에 개가 무엇인가를 먹게 되면 그 해는 개의 뱃속에 벌레가 생기고 날궂이(헛구역질)를 자주 하게 된다는 금기 때문이었다.
소와 닭, 돼지, 염소 등의 가축에게 먹이를 주고 난 후 우리들은 해가 지기 전에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쥐불놀이 준비를 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보름달이 뜨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洞祭와 燒紙儀式, 그리고 제사 음식에 대한 飮福으로 시작된 정월 보름날은 그렇게 하여 저물어 가게 되는데, 온 동네가 떠나갈 듯한 고함소리와 새롭게 시작될 한 해에 대한 기대로 들뜬 분위기는 그 해의 길흉을 좌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신명을 다하여 보름 행사를 치루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런 보름 놀이는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민속경연대회에서나 겨우 그 명맥을 잇게되는 화석화된 행사 정도로 되어 버렸다. 애석한 일이다. 내게 있어 어린 시절의 정월 보름날의 하루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가슴 설레이는 놀이가 아닐 수 없었다.
아마도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물이 찰랑찰랑 고여들어 옹달샘을
이루듯 어린 시절의 추억들은 내 영혼을 적셔내고 성장시키는 샘물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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