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黃眞伊)
가정(嘉靖)초 송도 명창(名唱) 진이는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여협(女俠)이었다.
서화담(서경덕)이 지조가 굳다는 말을 듣고 실을 꼬아 만든 끈을 허리에 두르고 대학(大學)을 끼고 그를 찾아갔다.
앞에 나아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남자는 가죽 띠를 띠고, 여자는 실띠를 띤다’고 하기에, 실로 띠를 띠고 왔으니 글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서화담은 웃고 진이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밤에 진이가 온갖 유혹을 했다. 그러나 서화담은 흔들림이 없었다.
진이는 재상 아들 이생원(李生員)을 설득하여 데리고 단 둘이 금강산 여행을 떠났다. 이생원은 초립에 베옷을 입고 양식을 짊어졌고, 진이는 칡넝쿨로 만든 삿갓〔圓頂〕을 쓰고, 베옷에 짚신을 신었다.
금강산의 곳곳을 돌면서 양식이 떨어지면 진이가 절의 스님들에게 몸을 의탁하여 양식을 충당했다. 몸이 수척하고 초라해졌는데, 한 곳에 가니 냇가에 선비 십여 명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기에, 진이가 나아가 절하고 술을 얻어 마신 다음, 노래를 부르니 산이 떠나가는 듯이 울렸다.
선비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술과 안주를 많이 주었는데, 진이는 선비들에게 “저기 있는 내 종에게도 음식을 좀 나누어 주십시오." 하면서 이 생원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생원도 술과 안주를 얻어먹었다. 이렇게 해 반년 만에 집에 오니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선전관 이사종(李士宗)이 노래를 잘 불렀다. 송도에 사신으로 나가 천수원(川壽院) 냇가에 안장을 풀어놓고 누워, 갓을 벗어 배에 올리고, 두세 곡 노래를 불렀다. 진이가 노랫소리를 듣고 보통 노래 솜씨 같지 않아, 서울 풍류남아 이사종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하니 과연 이사종이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유인해 집으로 데리고 와 며칠 머물렀다. 그리고 이시종에게 육년 간 함께 살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진이는 삼년 간 살 수 있는 재산을 이사종 집으로 옮기고, 삼년 간 가정내 여자의 도리를 다했다. 그리고 다시 이사종에게 앞으로 삼년 간 자기가 한 것처럼 해달라고 해서, 이렇게 또 삼년을 살고 헤어졌다.
뒤에 진이가 병들어 죽을 때 집안 사람들에게 나는 평생을 호화롭게 살았으니 외로운 산골짜기에 묻지 말고 큰길가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개성 대로변에 ‘송도명창진이묘’가 있다. 임제(林梯)가 평안 도사(都事)되어 가서 여기를 지나다가, 진이 묘 앞에서 제문을 지어 제사했다. 이 일로 임제는 조정 대신들의 비난을 받았다.
(어우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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