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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의세계/황진이

[스크랩] 黃眞伊, 惰性的 삶에 맞선 主體的 藝術魂-경희대교수 김진영

by 竹溪(죽계) 2006.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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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眞伊, 惰性的 삶에 맞선 主體的 藝術魂




김 진 영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차 례
1.머리말
2.說話的 一生의 解析
3.時調와 漢詩의 分析
4.맺음말
5.황진이 관련 문헌 자료




1.머리말

黃眞伊는 조선조 중종∼명종 연간을 살다간 16세기의 藝術家이다. 그는 비천한 신분의 妓女였지만 타고난 자색에다가 탁월한 時調, 漢詩 작품과 빼어난 음악적 재능, 그리고 남다른 파격적 행적으로 時空을 초월하여 여전히 살아있는 매혹적 여성이다.
그는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正史的 기록은 왕조실록이나 그와 교유한 名儒·文士들의 文集 어디에도 전하지 않아 정확한 生沒年代조차 파악할 수 없다. 다만 후대의 野談이나 記異 등 설화적으로 윤색된 문헌에 그의 출생과 행적, 죽음에 관련된 기사가 전하고, 시조집, 한시 선집 등에 그녀의 작품 약간 편이 수습되어 있을 뿐이다.
이같은 한계가 있지만, 관련문헌 자료를 주의 깊게 해석하면 어느 정도 그의 본래 면모를 추찰해 볼 수 있고, 또 그에게 드리운 신이한 베일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그려졌는지 헤아려 볼 수 있으리라고 판단된다. 동시에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가 얼마나 절실하게 자신의 삶을 형상화하였고, 또한 어떻게 그와 같이 뛰어난 언어적 예술성을 획득할 수 있었는가를 탐색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황진이의 예술가로서의 명망과 매력이 당대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늘날에도 여전히 숭앙할 수밖에 없는 가치, 즉 自由와 自尊의 정신, 解放과 相生의 논리, 궁극적으로는 주체적 사랑과 생명력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여겨진다.


2. 說話的 一生의 해석

1) 출생
황진이는 그 出生譚부터가 奇異하다. 문헌에 보면 그의 어머니는 陳玄琴(자료②, ⑦)이라거나 盲女(자료③)였다고 되어 있다. 진현금으로 기술된 쪽은 뒤에 아버지를 黃進士라 追記하여 황진이를 황진사의 庶女로 그려놓고 있다. (김택영, 「숭양기구전」)
이덕형의 「송도기이」는 그야말로 記異한 내용을 담고 있는 바, 현금과 한 사내의 만남에서 표주박 물이 술로 변하는 신이한 일이 있고, 그로 인연하여 정을 통하여 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사내는 술의 정령(일종의 酒神, 디오니소스)이요, 현금은 이름으로 보아 음악의 정령(일종의 樂神)이다. 즉 술과 음악의 정령이 만나 사랑을 나누어 진이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후대에는 "진이를 낳을 때 방안에 3일이나 異香이 풍겼다(「숭양기구전」)"는 追記도 자연스럽게 가능하였다. 이는 또 물과 같이 담박한 남녀 관계가 술과 같이 서로에게 취한 사랑의 관계로 진전된 것을 비유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盲女였다는 기록은 기실 사랑에 눈먼 여자를 말한 것이라고 보면 서로 다른 두 계열의 母系기록이 사실은 하나일 수도 있다. 좌우간 황진이는 출생부터가 예술적 천분을 지니도록 되어있는데, 문제는 버젓한 신분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술이 삶의 질적 도약을 꿈꾸는 행위의 하나라고 볼 때, 황진이의 신분이 열등하게 설정된 것은 잘 갖춰진 신분으로 태어난 것보다도 그의 천분을 발휘함에 오히려 덕이 된다. 이는 달리보면 民衆的 英雄像이 신이한 출생이면서도 缺損 부분을 반드시 지니는 類型에 부합되는 출생과정이다.

2) 妓界 入籍과 行蹟
일찌기 고려조의 문인 이인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에게 아름다운 것들을 독점하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뿔이 있는 것에는 이[齒]을 버리게 하고, 날개가 있으면 두 다리만 있게 했으며, 이름 있는 꽃에는 열매가 없고, 채색구름은 흩어지기 쉽게 되었으니, 사람에게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才藝를 주면 빛나는 功名은 주지 않게 되는 이치가 이렇기 때문이다.」
(「파한집」)

그러나 황진이의 경우 그의 기이한 출생은 두루 빼어난 자질을 담보하였다.
(자료①, ②, ③)
·걸걸하고 호협한 사람이었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한 때에 뛰어나고 노래도 또한 절창이었다. 사람들은 그녀 를 仙女라고 불렀다.
·國色으로서 광채가 사람을 움직였다.
·노래 소리가 신선 세계의 餘韻이었다.
·그대의 나라에 천하 絶色이 있구나!
·성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성품이 기개 있고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했다.
·色藝가 절등하여 이름을 온 나라에 퍼뜨렸다.

이상의 언급처럼 황진이는 여성으로서의 용모가 天下絶色이어서 남다른 관능미·육체미를 갖춘 데다가 재주 또한 詩歌와 거문고에 모두 능하였고, 더욱이 성품이 기개 있어서 구속받지 않는 당당함을 갖추었으며 혼자서 아름다운 것을 두루 독점한 셈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타고난 신분과 지닌 바 아름다움이 빌미가 되어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이 생겼으니 실연의 상처도 있었고, 生面不知의 총각이 상사병으로 죽어감으로써 운명적으로 사랑하나를 가슴 속의 상여로 평생 안고 살아야만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자진 결단하여 妓籍에 들어서 슬픔과 아픔을 타고난 생명력과 분출하는 예술적 天分을 살려 승화시켜 나갔다는 이야기는 바로 황진이다운 개성적 삶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깨어진 혼담과 이웃 총각의 상사병과 죽음을 통하여 내던져진 존재라는 實存的 被投性을 체험하게 되었을 때, 거기에서 절망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과감하게 그 운명적인 것에 도전하듯 자유의지로 妓界에 투신함으로써 스스로 선택하는 주체적 존재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하겠다.
妓女 황진이의 행적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사대부와 기녀 유형을 살펴보기로 하자.
기녀들은 우선 상대하는 인물이 양반 士大夫들이다. 기녀제도 자체가 사대부의 향락과 사치를 위해서 마련된 것이기에, 먼저 사대부 인간형을 보자면 學界에서는 대략 다음의 세 유형으로 구분한다.

①官人型 : 治人을 위해 관직을 추구함.
②處士型 : 修己를 위해 修道를 추구함.
③方外人型 : 자유의지적 삶을 추구함.

한편 妓女의 유형을 상정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지 않을까 한다.
①花草妓型 : 기생 본직에 충실함.
②節婦型 : 一夫從事를 추구함.
③藝術家型 : 예인으로서의 자유와 긍지를 추구함.

대다수의 기녀들은 ①유형에 속할 것이다. 그들은 운명에 순응하며 화초기생, 사치기생의 삶에 충실하고자 한다. 사대부들로부터 사랑받고, 재물까지 모을 수 있다면 그만이다. 그중 심한 경우는 貪財型이 있을 수 있다. 名妓 소춘풍이 문무 양반들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아 난처하게 되었을 때, 지혜롭게, 일면 풍자적으로 읊은 다음 시조는 ①유형 기녀들의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齊도 大國이오 楚도 亦大國이라
죠고만 國이 間於齊楚 ?엿신이
두어라 이 다 죠흔이 事齊事楚 ?리라.

孤竹 崔慶昌을 깊이 사랑한 洪娘이나 <춘향전>의 춘향은 ②유형에 해당되는데, 여기에는 홍랑처럼 기녀의 삶 안에서 妓生妾으로나마 한 남자를 섬기고자 한 경우와 춘향처럼 아예 妓女的 삶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人格的 삶을 도전적으로 추구하는 경우가 있다. 황진이의 경우가 바로 ③유형에 속한다. 그녀는 자신이 지닌 예술적 天分을 발휘하며 예술가의 긍지와 자존으로 자유분방하게 살고자 하였다. 그것은 그의 생명적 본능의 분출이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생명적 추동력이 강한 자일수록 자유분방한 삶을 지향한 사례가 많다. 그들은 제도나 규범 예법과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자 하기 때문에 흔히 일탈과 방탕으로 흐르기 쉽다. 황진이의 경우 조선조 양반 지배의 사회체제 속에서 여성 그것도 賤妓신분이었기 때문에 身分差待, 性差待의 가장 엄혹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가 반쪽 양반의 신분이나마 스스로 포기하고 자진하여 기녀가 된 선택이나, 훗날 소세양·벽계수·이언방·이사종·李生·서화담·지족선사 등과 맺은 관계를 볼 때, 그녀는 삶을 비인간적 체제나 규범으로 얽어매고 강제하려는 反生命的 현실에 대해 스스로의 방식으로 도전하고 거부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자료①에서 보듯 재상의 아들 李生이 方外에 놀만한 것을 발견하고 함께 금강산에 유람하면서 심지어 下人으로 치부하기도 한 것이나, 선전관인 名唱 李士宗과 6년간을 계약 동거하면서 각기 3년씩 살림을 대는 삶을 산 것은 바로 男女同權과 同一한 責任을 실행한 것이었다.
즉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통해 상징적으로 身分差待의 전복을 꾀하기도 하고 性差待의 관습과 규율을 혁파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같은 남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내면 속에 분출하는 열정과 야생적인 디오니소스적 생명력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요, 현실 안에서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자유의지가 샘솟았기 때문이겠다.
황진이는 타고나기를 色藝가 절등하여 에로스적 충동이 남달랐다. 그녀는 妓女의 삶을 통하여 오히려 성이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봉건적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節婦型 기녀들처럼 절제적이기보다 오히려 名儒·文士·武人·승려·예술가 등과 두루 어울려 분방한 성적 교유를 펼쳐 나갔다. 그는 본능적 육체성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논자들이 황진이를 이해할 때 더러 그녀의 육체성, 관능성을 배제하고 人格에만 촛점을 맞추려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자칫 황진이의 生命力의 한 축을 무너뜨려 관념화 함으로써 매력없이 만들거나, 춘향이와 같은 도덕적, 도전적 여성상으로 변질시킬 위험이 크다고 본다. 춘향이는 춘향이고, 황진이는 황진이인 점을 놓친다면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황진이는 세속적 도덕 규범의 질곡에서 벗어나려 했고, 인격적 만남 이상의 영혼의 만남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녀가 서화담에게 나가 학문을 배우고, 그를 崇仰하여 참 聖人이라고 評한 것은 화담이 양반이고 학문과 인격이 출중하면서도 세속적인 영달을 추구하지 않고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도저한 기상을 흠모하였기 때문이었다. 황진이가 기녀세계에서 예술가의 길을 가듯 화담은 사대부 사회에서 方外處士的인 독창적 哲學者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황진이에게는 화담선생이 정신적 계보를 같이하는 큰 스승이 되었던 것이며, 그리하여 평생에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자료③) 더구나 화담은 진이가 관능으로 매혹시키려 하였을 때도 이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재롱으로 귀엽게 받아들임으로써 어지러운 관계를 갖지는 않았으나 상대방의 육체성과 관능미를 인정하였다. 바로 聖俗의 二分法的 절연이 아닌 靈肉이 일체화된 인간적 삶을 긍정한 것이다.
서거정의 인간면모와 정신 지향은 다음 시에도 역력히 드러난다.

감회를 읊음[述懷]
공부하던 그 옛날엔 세상 다스리는 일에 뜻을 두었었건만
나이 늙자 이제는 안회(顔回)와 같은 가난함을 달갑게 여기며 사네
부귀(富貴)에는 다툼이 있게 마련이니 손대기 어렵고
숲과 샘물은 간섭하는 이 없으니 몸을 편히 담을 수 있네
산에서 약 캐고 물에서 낚시질하여 배를 채우고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으니 정신이 맑아지네
공부하여 의심없게 되면 쾌활하여짐을 느끼나니
헛되이 백년 사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리라.

독서당일지경륜 (讀書當日志經綸
만세환감안씨빈 (晩歲還甘顔氏貧)
부귀유쟁난하수 (富貴有爭難下手)
임천무금가안신 (林泉無禁可安身)
채산조수감충복 (採山釣水堪充腹)
영월음풍족창신 (詠月吟風足暢神)
학도불의지쾌활 (學到不疑知快活)
면교허작백년인 (免敎虛作百年人)

그 반면 지족선사는 30년을 면벽 수도하여 生佛이라고 불렸으나 황진이의 유혹에 처음에는 不邪淫 계율에 얽매여 육체성을 외면하다가 破戒 후에는 마음까지 빼앗김으로써 부처의 제자 아난존자가 마등의 유혹에 넘어가 몸을 섞었으되 마음을 끝내 빼앗기지 않아 마침내 成佛한 사적과 대비되고 있다.(자료③) 이는 知足 선사의 자칭이 참으로 외람되고 허구임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한편, 자료⑤에서의 어느 선비는 고루한 사고 때문에 황진이의 조롱을 받았다. 철석간장임을 자신한 소세양도 마침내 황진이의 곡진한 시에 감동하여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고백하도록 한 것(자료④) 역시 인간의 자만과 한계에 대한 경종이었다.
황진이는 이처럼 靈肉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俱有한 인간 본질에 충실한 삶을 통해서 그의 본능적이면서도 이지적인 생명의지를 추구하여 나갔다고 판단된다.

3) 죽음
·내 생시에 성품이 芬華함을 좋아하였으니 죽은 뒤 나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가 에 묻어달라. (자료①)
·출상할 때에 삼가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 (자료③)
·내가 천하남자를 위하여 능히 自愛케 못하고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으면 관도 말고 시체를 고동문 밖 사수 어름에 내버려 땅강아지와 개미, 여우와 이리가 내 고기를 먹게하여 천하여자가 眞으로써 경계를 삼게 하라. (자료⑦)

이상의 기사들에서 보면 황진이가 죽음을 당하여 슬퍼하기보다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의 行蹟에 대한 悔恨이 드러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양태이지만 공통점은 非日常的인 주문이라는 점이다. 허균이 황진이를 한 "異人"이라고 하였는데, 독자적인 平生의 삶처럼 죽음과 治喪도 그 자신의 독특한 방식을 요청한데서 과연 남다른 개성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백호 임제가 훗날 황진이의 무덤에 다음 글로 治祭했다가 朝野의 비난을 받았다.(자료①)

靑草 우거진 골에 자 다 누엇 다
紅顔을 어듸 두고 白骨만 무쳣 이
盞자바 勸?리 업스니 그를 슬허 ?노라

고 하는데, 임제 역시 "내가 이같이 좁은 조선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라고 탄식했다는 화통한 장부요 詩人으로서 황진이와 정신적 氣脈이 相通하는 바가 컸음을 알 수 있다.


3. 時調와 漢詩의 分析

1) 自在한 想像力
황진이 시의 두드러진 特長은 그야말로 童心과 같은 自由自在의 想像力의 발동과 운용에 있다.

冬至ㅅ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위의 시에서 황진이는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며 그리움에 밤을 지새우는 여인의 곡진한 심정을 대담한 상상력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三冬 중에서도 동짓달은 밤이 가장 길어, 一刻이 如三秋로 안타깝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기다림의 고통이 절정에 치닫는 시간이다. 물론 이때의 동짓달은 현실적인 동짓달일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임이 부재하는 밤이면 짧은 하지날 밤이라도 바로 동지 긴긴밤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다림의 밤이다. 한편 사랑하는 임과 함께 했던 봄밤은 또 얼마나 순식간이었던가. 그 역시 추야장 긴긴 밤에 임과 같이 지냈다 하더라도 짧기는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애틋한 사랑은 잠깐이었고 남은 것은 독수공방의 깊은 고독이다. 그러나 이를 견뎌내려면 초월적 상상력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즉 견딜 수 없는 情恨의 시간, 그 긴긴 허리를 베어내어 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감아 넣어두었다가 임과 만나는 밤 구비구비 펴겠다는 발상이다. 허리, 춘풍, 이불 등의 낱말이 주는 육체적 심상과 시공을 자유자재로 재단하는 상상력이 상승적으로 작용하여 임과의 사랑의 회포는 長江이 구비구비 끝없이 흐르는 것처럼 다함없이 풀어가야함을 所望하고 있다.

반달을 노래함[詠半月]
곤륜산 맑은 구슬 뉘라서 끊어내어
직녀의 멋진 빗을 솜씨 좋게 만들었나.
견우가 한번 떠나 다시 오지 못했으니
푸른 하늘 허공중에 수심겨워 던졌구나.

수단곤륜옥 (誰斷崑崙玉)
재성직녀소 (裁成織女梳)
견우일거후 (牽牛一去後)
수척벽공허 (愁擲碧空虛)

한편 위의 한시에서는 허공에 걸린 반달이 머리를 단장하는 얼레빗이 되고 허공에 던져버린 나의 수심이 되고 또 나의 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되고 있다. 松江 정철도 [思美人曲]에서 "연지분 잇 마  눌 위?야 고이  고"라고 하여 사랑하는 임이 없고 보면 시름과 한숨과 눈물 뿐, 곱게 단장할 의미조차 없는 삶이 됨을 노래한 바 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견우·직녀 설화로 그린 것에서도 그 사랑은 하루의 만남과 일년의 이별같이 운명적으로 안타까운 사랑임을 말하고 있다.

2) 萬物照應과 物活論的 思考

靑山은 내  이오 綠水  님의 情이
綠水 흘너간들 靑山이야 變 손가
綠水도 靑山을 못니져 우러예어 가 고

靑山裏 碧溪水ㅣ야 수이 감을 쟈랑마라
一到滄海?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明月이 滿空山?니 수여간들 엇더리


*한역시:<신위(申緯), 해동소악부(海東小樂府)>
청산영리벽계수 (靑山影裏碧溪水)
용이동류이막과 (容易東流爾莫誇)
일도창강난재견 (一到滄江難再見)
차류명월영사파 (且留明月暎裟婆)


소판서를 보내며[奉別蘇判書世讓]
오동잎은 가을밤에 달 아래 떨어지고
들국화는 제철 만나 서리 속에 누렇구나
누대는 높이 솟아 하늘과 한 자 사이
사람은 석잔 술에 취해 누웠네
유수 곡조는 거문고 소리와 어울려 차가운데
피리소리 구성진 속에 매화[낙매화(落梅花):피리 곡명]는 향기롭네
내일 아침 서로 떠나 이별을 고한 뒤에는
그리운 정 샘솟아 푸른 물결처럼 끝없겠네.

월하오동진 (月下梧桐盡)
상중야국황 (霜中野菊黃)
누고천일척 (樓高天一尺)
인취주삼상 (人醉酒三觴)
유수화금냉 (流水和琴冷)
매화입적향 (梅花入笛香)
명조상별후 (明朝相別後)
정여벽파장 (情與碧波長)

황진이 시의 또 다른 特長은 사물과의 또는 사물끼리의 천연스런 대화와 相互 置換의 구사에 있다. 이것도 본질적으로는 거침없는 상상력의 소산이다. "녹수도 청산을 못 니져 우러 예어 가 고"에서 녹수와 청산은 임과 나요, 情과 뜻이기도 하다. 한편, "청산리 벽계수야∼" 작품에서는 天上의 달이 푸른 계곡 물에게 말을 건넨다. 물론 明月은 황진이고 벽계수는 종실 벽계수로 중의적임은 다 아는 바인데, 여기에서는 다시 산수 자연의 유구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봉별소판서」시에서는 소리의 차고 향기로움, 情과 푸른 파도의 동질적 유장성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있다.

3) 劇的 獨白과 含蓄的 思考

어져 내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 냐
이시라 ?더면 가랴마  제 구 여
보내고 그리  情은 나도 몰라 ?노라.


내 언제 無信?여 님을 언제 소겻관 
月沈三更에 온  이 전혀 업 
秋風에 지  닙소릐야 낸들 어이 ?리요

위의 작품들에서 종장 끝구의 "나도 몰라 ?노라" " 들 어이 ?리오"는 '보 고 그리는 정'처럼 인간의 삶이 단선적일 수 없고 항상 자기 모순과 역설성을 안고 있기에 사고 역시 복선적 사고 내지 未定向的 放任의 독백에 처할 수밖에 없는 극적 정황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가랴마  졔 구 야"는 도치표현이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며 "졔"가 '나'이기도 하고 '임'이기도 하여 또한 이중적 효과를 복합적으로 자아낸다.

4) 自我意識과 鄕土自然에 대한 사랑

박연폭포[朴淵]
아득한 하늘 바윗골에 한줄기 뿜어내니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네
거꾸로 쏟는 폭포 은하수 방불하고
노한 폭포 가로 드리워 흰 무지개 완연하고
어지럽게 쏟는 물벼락 골짜기에 가득하네
구슬 절구에 부서진 옥 창공에 맑았으니
이곳에 노니는 유자 여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라
천마가 해동에선 으뜸 가는 곳.

일파장천분학농 (一派長天噴壑 )
용추백인수총총 (龍湫百 水 )
비천도사의은한 (飛泉倒瀉疑銀漢)
노폭횡수완백홍 (怒瀑橫垂宛白虹)
포란정치미동부 (苞亂霆馳彌洞府)
주용옥쇄철청공 (珠 玉碎澈晴空)
유인막도여산승 (遊人莫道廬山勝)
수식천마관해동 (須識天磨冠海東)


송도를 노래함[松都]
눈 가운데 그 옛날 고려의 빛 떠돌고
차디찬 종소리는 옛나라의 소리같네
남루에 수심겨워 외로이 섰노라니
남은 성터 저녁안개 피어나듯 떠오르네.

설중전조색 (雪中前朝色)
한종고국성 (寒鐘故國聲)
남루수독립 (南樓愁獨立)
잔곽모연향 (殘廓暮煙香)

만월대를 생각하며[滿月臺懷古]
옛절은 말이 없이 어구옆에 쓸쓸하고
저녁해 고목에 비치어 더욱 서럽구나
태평세월 스러지고 스님 꿈만 남았는데
영화롭던 그 시절이 탑 머리에 부서졌네
누런 봉황새는 어디 가고 참새들만 오락가락
진달래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먹네
송악산 영화롭던 옛 모습 생각하니
봄이 온들 소슬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고사소연방어구 (古寺蕭然傍御溝)
석양교목사인수 (夕陽喬木使人愁)
연하냉락잔승몽 (煙霞冷落殘僧夢)
세월쟁영파탑두 (歲月觴嶸破塔頭)
황봉우귀비조작 (黃鳳羽歸飛鳥雀)
두견화발목양우 (杜鵑花發牧羊牛)
신송억득번화일 (神松憶得繁華日)
기의여금춘사추 (豈意如今春似秋)

황진이는 李生과 더불어 금강산을 유람하였고, 내 나라 사람으로 천하명산인 내 江山의 진면목을 보지 못할까 보냐 하며 여러 명산을 돌아보기도 하였다.(자료①,③)
또한 스스로 松都三絶을 꼽으면서 그 속에 박연폭포를 포함시키고 있다. 송도의 명승지 박연폭포의 壯觀을 장쾌하게 그리면서 흔히 일컫는 중국의 천하명승 여산폭포보다 못하지 않음을 자부하고 있다. 이는 천마산 박연폭포에서 海東 으뜸의 기개를 발견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바로 그가 추구하는 정신지향과 합치되는 것이었다.
[만월대회고] 시에서는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그리면서 인간이 경영하는 역사의 허무감을 토로하고 있다. [송도] 시에서는 망한 전왕조 고려의 빛과 소리를 떠올리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여기에서는 王朝와 自我의 회고에서 오는 인식의 결과로 자연 愁心이 중심 情調가 되고 있다.


4. 맺음말

일찍이 이인로는 '문장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세상사 중에 貧富나 貴賤으로 그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없는 것은 오직 文章뿐이다. 대개 완성된 문장은 해와 달이 하늘에 빛나고 구름과 안개가 허공에서 集散하는 것 같아서, 눈이 있는 사람이면 보지 않을 수 없고 가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葛布를 입은 비천한 선비(벼슬하지 않은 선비)로도 넉넉히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을 드리울 수 있으며, 조맹[趙孟:중국 춘추시대 晉나라의 귀족]의 귀함이야 그 세도가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집안을 넉넉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있으랴만 문장에 있어서는 칭찬할 수가 없다. 이렇기 때문에 문장은 일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富로써도 그 가치를 감소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인로, 문장의 가치, 『파한집』권하)

그런데 위에 말한 문장은 바로 文學이요 藝術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문학예술의 독자적 의의와 가치를 강조한 주장이다. 기실 문학은 고유한 가치가 있어 빈부나 귀천으로 그 높고 낮음이 정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예술이 부귀나 명예에 능히 맞설 수 있는 크고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闡明한 것으로, 예술가의 자긍과 자부의 근거가 된다.
황진이는 삶 속에서 당대의 속박과 굴종의 규범, 타성과 差待의 제도를 주체적으로 벗어나 온갖 죽어있는 외피들을 벗어 던지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그녀가 보여준 개성적 사랑과 삶의 방식, 그리고 그같은 삶의 진솔한 形象化로서의 詩는 바로 이러한 본성적 眞我의 충실하고도 구체적인 실현이었고, 자율적이고 생명적인 삶의 궤적이 聖俗의 일체화를 추구한 초월적 合一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유의 정신과 초월적 합일이 곧 예술의 정신이요 운명이라 할 때, 그녀의 당당한 예술혼은 마땅히 시대를 넘어 의의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에나 자유를 위협하고 靈肉의 합일을 파기하는 세력은 그 모양은 달리하면서도 우리를 둘러싸고 위협하는 세계 속에 또는 연약하고 비굴한 자아 속에 상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황진이의 位相은 실존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나간 설화적 전승을 보아서나, 시조·한시의 드높은 예술적 성취를 통해서나 생명적 예술혼을 꽃피우고 간 살아있는 예술가로 자리매김되어야 마땅하겠다.


5. 황진이 관련 문헌자료

자료
유몽인(柳夢寅:1559.명종14-1623.인조1) : 어우야담(於于野談)

가정 초(初)[(嘉靖:명나라 세종의 연호) 조선조 중종 때] 송도 명기에 진이라는 이가 있으니 걸걸하고 호협(豪俠)한 사람이었다. 화담처사 서경덕이 상경하여 벼슬을 않고 학문에 정진한다는 말을 듣고 시험을 하고자하여 조대(穡帶)를 묶어 문자(文字)를 끼고 찾아가 절하고 묻되 "남반혁 여반사(男 革, 女 絲)라 하기에 저도 학문에 뜻을 두고 실끈을 띠고 왔나이다" 하였다. 선생은 경계를 하고 가르치었다.

진이가 금강산이 천하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찾아가 놀려 하였으나 더불어 갈 만한 이가 없더니 마침 이생(李生)이라는 어떤 재상의 아들이 있었다. 그가 호방하여 방외(方外)에 놀만하였다. 진이가 이생을 만나보고 조용히 이르되, "내 들으니 중국인은 원생고려국일견금강산(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이라 하였는데, 하물며 내 나라 사람으로 본국에 생장하여 선산(仙山)을 지척에 두고 그 진면목을 보지 못할까 보냐. 이제 우연히 선랑(仙郞)을 만났으니 함께 산유(山遊)를 함이 정히 좋다. 산의야복(山衣野服)으로 마음대로 유승(幽勝)을 찾고 돌아옴이 또한 즐겁지 않을까"하고 이생에게 동복( 僕)도 따르지 못하게 하고 포의초립(布衣草笠)으로 친히 양곡을 짊어지게 하고 진이는 스스로 송라원정(松蘿圓頂)을 쓰고 갈삼(葛衫)을 입고 포군(布裙)을 띠고 짚신을 신고 죽장(竹杖)을 끌고 이생을 따라 금강산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다니며 여러 절에서 걸식도 하고 중에게 양식도 얻었다. 그러나 산림 속으로 깊이 들어 가서는 혹은 기갈(飢渴)에 빠지고 곤췌(困 )한 때도 있어 그전 얼굴이 아니기도 하였다. 한 곳에 이르니 선비 십여 인이 모여 시내 위 송림 속에서 주식(酒食)을 먹고 놀고 있었다. 진이가 찾아가니 한 선비가 나서며 너의 사장(舍長)도 술을 마실 줄 아느냐 하고 술을 권한다. 진이는 사양도 않고 잔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그 소리가 청월(淸越)하여 수풀과 골짜기가 다 떨렸다. 여러 선비는 퍽 의이(疑異)하고 반효(盤肴)를 주었다. 진이는 내 또한 하인이 있어 배가 주렸으니 남은 술을 주라 청하고 이생을 불러 주육(酒肉)을 주었다. 그럴 때 그 두 집에서는 그들이 어디를 간 지 모르고 찾을 길도 없더니 해포만에 옷이 해지고 얼굴이 검어 돌아왔다. 동리 사람들이 보고 크게 놀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전관(宣傳官) 이사종(李士宗)은 노래를 잘하였다. 일찍 더불어 놀고자 하더니 천수원(天壽院) 천변(天邊)에 안장(鞍裝)을 내려놓고 갓을 벗어 배에 얹고 누워 수삼곡(數三曲)을 높이 불렀다. 진이가 지내다 이상하여 말을 원(院)에 매어두고 귀를 기울여 듣고 '이 가조(歌調)는 심히 다르니 반드시 심상한 촌가이곡(村歌俚曲)이 아니다. 내 들으니 서울에 이사종이라는 당대 절창이 있다 하니 반드시 이 사람이리라'하고 사람을 시켜 가 물으니 과연 사종이라 자리를 옮겨 접대하고 자기 집으로 끌고 와 수일을 묵게 하고 서로 언약하되 육년 간을 함께 살자하고 그 이튿날 삼년 지낼 가산(家産)을 사종의 집으로 옮겨 함께 삼년을 지내매 사종도 진이의 일가(一家)를 먹이기를 진이가 사종을 먹임과 같이하여 삼년을 마치자 진이는 '언약을 다 하였다' 하고 물러왔다.

진이가 병들어 죽을 때 가인(家人)더러 이르되 " 내 생시에 성품이 분화(芬華)함을 좋아하였으니 죽은 뒤 나를 산에 묻지 말고 큰길 가에 꼭 묻어 달라"하였다. 이제 송도 대로변에 진이총(眞伊塚)이 있는 바 임자순(林悌, 字子順, 號白湖)이 평안도사(平安都事)를 하여 가다가 글을 지어 진이 무덤에 제(祭)를 지내고 그 때문에 조평(朝評)을 받았다고 한다.


자료
이덕형(李德泂:1566.명종21-1645.인조23) : 송도기이(松都記異)
- 대동야승(大東野乘) 제71권

진이(眞伊)는 송도(松都)의 이름난 창기이다. 그 어머니 현금(玄琴)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다. 나이 18세에 병부교(兵部橋)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을 눈여겨 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또한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 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로 와서 기둥을 의지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물을 청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으면서 돌려준 다음 말하기를,
"그대도 시험삼아 마셔 보아라."
했는데, 마셔 보니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겼다. 이로 인하여 그와 인연이 되어 정을 통하였고, 드디어 진이(眞伊)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한때에 뛰어나고 노래도 또한 절창(絶唱)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선녀(仙女)라고 불렀다.
유수(留守) 송공(宋公)[혹은 송 염(宋 )이라고도 하고 혹은 송 순(宋純)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이 처음 부임했을 적에 마침 명절(名節)을 맞이했다. 낭료(郎僚)들이 부아(府衙)에서 조그만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진랑(眞娘)이 와서 뵈었다. 그는 용모가 지극히 아름답고 행동이 단아하였다.
송공(宋公)은 풍류객(風流客)으로서 풍류장에서 늙은 사람이다. 한 번 그를 보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고 좌우를 돌아다보면서 말하기를,
"이름이 결코 헛되이 얻어진 것이 아니로구나!"
하고, 기꺼이 관대(款待)하였다.
송공의 첩도 역시 관서(關西)의 명기(名妓)였다. 문틈으로 그를 엿보다가 말하기를,
"과연 절색(絶色)이로군! 나의 일이 낭패로다."
하고, 드디어 문을 박차고 크게 외치면서 머리를 풀고 발을 벗은 채 뛰쳐나온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여러 종들이 붙들고 말렸으나 만류할 수가 없었으므로 송공은 놀라 일어나고 자리에 있던 손들도 모두 물러갔다.
그후 송공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노래 잘하고, 춤 잘추는 기생을 모두 불러 모았으며 이웃 고을의 수령과 고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으며, 붉게 분칠한 여인이 자리에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떨기를 이루었다.
이때 진랑(眞娘)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오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光彩)가 사람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되는 잔치 자리에서 모든 손들이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송공은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대개 발(簾) 안에서 엿보고 전일과 같은 변이 있을까 염려했던 때문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되자 비로서 시비(侍婢)로 하여금 파라( 羅 :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진랑(眞娘)에게 마시기를 권하고, 가까이 다가와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 진랑이 용모를 다듬고 노래를 부르는데 맑고 고운 노래 소리가 여운이 남아 끊어지지 않고,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며, 고저청탁이 절도에 맞아 일반 창기(娼妓)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송공이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천재(天才)로구나!"
했다.

악공(樂工) 엄 수(嚴守)는 나이가 70세인데 가야금이 온 나라에서 명수(名手)요, 또 음률(音律)에 정통하였다. 처음 진랑을 보더니 감탄하기를,
"선녀(仙女)로다!"
했다. 노래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것은 동부(洞府 : 신선이 사는 곳)의 여운(餘韻)이로다. 세상에 어찌 이런 소리가 있단 말인가!"
했다.

이때 중국 사신이 본부(本府)에 들어오자, 원근에 있는 사녀(士女)들과 구경하는 자가 모두 모여들어 길 옆에 숲처럼 서 있었다. 사신 일행 중 한 사람이 진랑을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을 급히 하여 달려와서 한동안 주시하다가 갔는데, 그는 객관(客館)에 이르러 우리나라 통사(通事)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나라에 천하 절색(絶色)이 있구나."
했다.

진랑이 비록 창류(娼流)로 있기는 했지만 성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관부(官府)의 술자리라도 다만 머리를 빗어서 정제하고 나갈 뿐, 옷도 고쳐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市井)의 천한 무리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다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겼다. 자못 문자(文字)를 알았고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화담 선생(花潭先生)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門下)에 나가 뵈니, 선생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談笑)했으니 어찌 절대(絶代)의 명기가 아니랴?

내가 갑진년에 본부(本府)의 어사(御史)로 갔을 적에는 병화(兵火)를 막 겪은 뒤라서 관청집이 텅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사관을 남문(南門) 안에 사는 서리(書吏) 진 복(陳福)의 집에 정했는데, 진 복의 아비도 또한 늙은 아전이었다. 진랑과는 가까운 일가가 되고 그때 나이가 80여 세였는데, 정신이 강건하여 매양 진랑의 일을 어제 일처럼 역력히 말했다. 나는 묻기를,
"진랑이 이술(異術)을 가져서 그러했던가?"
하니, 늙은이는 말하기를,
"신이한 술법이란 모르는 일이지만 방 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이 되어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했다.
나는 공사(公事)가 끝나지 않아서 여러 날 여기에서 머물렀으므로 늙은이에게 익히 그 전말(顚末)을 들었다. 때문에 이같이 기록하여 기이한 이야기를 더 널리 알리는 바이다.

임 사문 제(林斯文悌)는 호걸스런 선비이다. 일찌기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송도(松都)를 지나다가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가지고 글을 지어 진이(眞伊)의 묘에 제사 지냈다. 그 글이 방탕(放蕩)하여 지금까지 전송(傳誦)되어 온다. 제(悌)는 일찌기 문재(文才)가 있고 협기(俠氣)가 있으며 남을 깔보는 성질이 있으므로, 마침내 예법을 아는 선비들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이 겨우 정랑(正郞)에 이르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찍 죽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랴? 애석한 일이다.

자료
허균(許筠:1569.선조2-1618.광해군10) :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 성소부부고 제24권 설부3

공헌왕[(恭憲王 : 명종(明宗)의 시호)] 때에 사인(士人) 이 언방(李彦邦)이란 자가 노래를 잘했다. 가락이 맑고 높으니 감히 그와 재주를 겨루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최득비여자가(崔得 女子歌)를 불렀는데, 온 좌석이 모두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서경(西京)에 유람했는데 교방(敎坊) 기생이 거의 이백 명이 되었다. 방백(方伯)이 열지어서 앉힌 다음, 노래에 능하거나 못하거나를 가리지 않고 행수기생(行首妓生)에서 동기(童妓)까지 한 사람이 창(唱)하면 언방이 문득 화창(和唱)하도록 했는데, 목소리가 모두 흡사했으며 막힘이 없었다.
송도(松都) 기생 진랑(眞娘)이 그가 창을 잘한다는 것을 듣고서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언방은 자신이 언방의 아우인 양 속이면서,
"형님은 안계시오. 그러나 나도 제법 노래를 하오."
하고 드디어 한 곡조 불렀다. 진랑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나를 속이지 마시오. 세상에 이런 소리가 어찌 또 있겠소. 당신이 바로 진짜 그 사람이오. 모르기는 하지마는 면구(綿駒)와 진청(秦靑)[ 註 : 「맹자」에 의하면 면구는 춘추 시대 제(齊) 나라 사람으로서 노래를 잘하였다 함. 「열자」에 의하면 진청 또한 노래에 능한 이로서 설 담(薛譚)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함. 《孟子 告子下, 列子 湯問篇》 ] 인들 이보다 더 잘하겠소?"
하였다.

진랑(眞郎)은 개성 맹녀(盲女)의 딸이다. 성품이 기개있고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했다.
일찍이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풍악(楓岳 : 금강산의 별칭)에서 태백산(太白山)과 지리산(智異山)을 지나 금성(羅州)에 오니, 고을 원이 절도사(節度使)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는데, 풍악과 기생이 좌석에 가득하였다. 진랑은 해어진 옷에다 때묻은 얼굴로 바로 그 좌석에 나와서 태연스레 이( )를 잡고 난 후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기생들이 모두 기가 질렸다.

평생에 화담[花潭 : 서 경덕(徐敬德)의 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墅]에 가서 한껏 즐긴 다음에 돌아오곤 하였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선사(知足禪師)가 30년을 면벽(面壁)하여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오직 화담선생만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어지럽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하였다. 죽을 무렵에 집안사람에게 부탁하기를,
"출상(出喪) 할 때에 삼가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
하였다. 지금 노래하는 자도 그가 지은 노래를 능히 부르니 또한 이인(異人)이 아니겠는가.

진랑이 일찍이 화담에게 가서 아뢰기를,
"송도(松都)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
하니 선생이,
"무엇인가?"
하자,
"박연폭포와 선생과 소첩(小妾)입니다."
하매, 선생께서 웃으셨다. 이것이 비록 농담이기는 하나 또한 그럴 듯한 말이었다.
대저 송도는 산수가 웅장하고 아름다워 많은 인재가 나왔다. 화담의 이학(理學)은 국조(國朝)에서 제일이고, 석봉의 필법(筆法)은 해내외에 이름을 떨쳤으며, 근자에는 차씨(車氏) 부자(父子)와 형제[ 註 : 차 식(車軾)과 그의 아들인 천로(天輅)·운로(雲輅) 형제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모두 시문에 능하였음]가 또한 문명(文名)이 높다. 진랑도 또한 여자 중에 빼어났으니, 이것으로써 그의 말이 망령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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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방(任 :1640-1724) : 수촌만록(水村 錄) 52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은 젊었을 때에 마음이 꿋꿋하다고 자랑하며 항상 말하기를
"여자에게 미혹당하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다."
라고 했다. 송도 기생 황진은 재주며 얼굴이 세상에 가장 뛰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친구들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이 기생과 30일 동안을 같이 있다가 곧장 떠나와 끊고는 다시 털끝만치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만약 이 기한을 어기고 단 하루라도 더 머무르면 자네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하라."
하고, 송도에 가서 황진을 보니 과연 멋진 기생이었다. 당장 한 데 어울려 한 달을 머물어 지내고, 그 이튿날 떠나려고 개성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이별잔치를 벌였는데 진이는 이별하기를 섭섭히 생각하는 기색이 전연 없고 다만 요청하는 말이
"지금 대감과 작별하는데 어찌 한마디 말이 없이 헤어질 수 있습니까? 변변치 않은 시이나 한 수 올리려 합니다."
소공이
"그리하여라."
하니 즉시 율시 1수를 써 올렸다.

오동잎은 가을밤에 달 아래 떨어지고
들국화는 제철 만나 서리 속에 누렇구나
누대는 높이 솟아 하늘과 한 자 사이
사람은 취했으니 천잔 술을 마셨구나
유수 곡조는 거문고 소리와 어울려 차가운데
피리소리 구성진 속에 매화[낙매화(落梅花):피리 곡명]는 향기롭네
내일 아침 서로 떠나 이별을 고한 뒤에는
그리운 정 샘솟아 푸른 물결처럼 끝없겠네.

월하오동진 (月下梧桐盡)
상중야국황 (霜中野菊黃)
누고천일척 (樓高天一尺)
인취주천상 (人醉酒千觴)
유수화금냉 (流水和琴冷)
매화입적향 (梅花入笛香)
명조상별후 (明朝相別後)
정여벽파장 (情與碧波長)

소공은 한참 읊조려보고 탄식하기를
"옛다. 나는 사람이 아니로다."
하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

자료
이덕무(李德懋:1741-1793) : 청비록(淸脾錄)
- 청장관전서 제33권

-시기(詩妓)-

본조(本朝)의 송도(松都) 기생 황 진[(黃眞, 황진이(黃眞伊)]은 매우 절색(絶色)에다 시도 잘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화담선생[花潭先生, 화담은 서경덕(徐敬德)의 호]과 박연폭포(朴淵瀑布)가 나와 함께 송도의 삼절(三絶)이다."
하였다. 그녀가 어느 날 땅거미가 질 때 비를 피하려 어느 선비의 집을 찾아 들었더니, 그 선비가 환히 밝은 등불 밑에서 그녀의 너무도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는 마음 속으로 도깨비나 여우의 넋이 아닌가 하고 단정히 앉아 「옥추경(玉樞經)」을 끊일 새 없이 외어 대었다. 황 진은 그를 힐끗 돌아보고 속으로 웃었다. 닭이 울고 비가 개자 황 진이 그 선비를 조롱하여,
"그대 또한 귀가 있으니 이 세상에 천하 명기 황 진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거요. 바로 내가 황 진이라오."
하고는 뿌리치고 일어나니, 그 선비는 그제야 뉘우치고 한탄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황 진이 송도에서 지은 시에,

눈 가운데 그 옛날 고려의 빛 떠돌고
차디찬 종소리는 옛나라의 소리같네.
남루에 수심겨워 외로이 섰노라니
남은 성터 저녁 안개 피어나듯 떠오르네

설중전조색 (雪中前朝色)
한종고국성 (寒鐘故國聲)
남루수독립 (南樓愁獨立)
잔곽모연향 (殘廓暮煙香)

하였는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는 초루(草樓) 권 겹(權 )의 시이다."
하였다.


자료
서유영(徐有英:1801-1873) : 금계필담(錦溪筆談)

황진은 송경(松京) 명기다. 색예(色藝)가 함께 절등하여 이름을 온 나라에 퍼뜨렸다. 종실에 벽계수라는 이가 있어 한번 보고자 원하였으나 진이 스스로 도도하여 풍류명사가 아니고 보면 친할 수가 없었다. 벽계수가 이를 이 달(李達)에게 상의하매 이 달은 가로되 "그대가 진이를 한번 보려 하면 능히 내 말을 좇을가"한즉 벽계수는 꼭 그대의 말대로 하겠다 하였다. 이 달은 "그대가 소동(小童)에게 거문고를 들리고 그 뒤를 따라 조고만한 나귀를 타고 진의 집을 찾아 누(樓)에 올라 술을 사다 마시고 거문고 한 곡조를 타고 보면 진이가 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라. 그대는 본 척 말고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면 진이가 또 그 뒤를 따라 올 것이라, 취적교(吹笛橋)를 지내어 돌아보지 않으면 일을 이루겠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루지 못하리라." 하였다. 벽계수는 과연 그 말을 듣고 조그만한 나귀를 타고 소동을 시켜 거문고를 들리고 진이의 집을 찾아 누에 올라 술을 사다 마시고 거문고 한 곡조를 타고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갔었다. 진이는 과연 뒤를 쫓아오다가 취적교(吹笛橋)를 당하여 소동에게 물어 그가 벽계수인 줄을 알고 늘어진 노래를 지어 늘어지게 부르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하였다. 벽계수는 이 노래를 듣고 가질 못하고 돌아보다가 정신을 잃어 드디어 말에서 떨어졌다. 진이는 웃으며 이는 명사(名士)가 아니고 풍류랑(風流郞)이라 하고 바로 돌아섰다. 벽계수는 부끄럽고 한하기를 마지 않았다고 한다.

자료
김택영(金澤榮:1850-1927) : 황진전(黃眞傳)

황진은 중종 때 사람으로 황진사의 서녀(庶女)다. 그 어머니 진현금(陣玄琴)이 병부교(兵部橋) 아래 물을 마시고 느끼어 진을 배어, 낳을 때에는 방안에 이상한 향기가 사흘이나 있었다. 진이 자라서 절색이 있고 서사(書史)를 통하였다. 나이 15, 6이 되던 때 그 이웃에 한 서생이 있어 엿보고 그리워하여 짝사랑만 하다가 드디어 병이 들어 죽었다. 묻으러 갈 때 그 관이 진의 문 앞에 이르러는 움직이지를 않았다. 서생이 그로 하여 병이 들어 죽은 줄은 그 집에서도 들어 아는지라, 사람을 시켜 진에게 간청하여 그 저고리를 얻어 관을 덮은 뒤에야 관이 떠나갔다. 진이 이걸 보고 크게 감동하여 드디어 기생이 되었고 멀리 놀기를 좋아하고, 그 시한(詩翰)은 청일(淸逸)하여 때로 누대산수(樓臺山水)를 당하여 성쇠를 비관하며 붓을 들어 적는 것이 그 정을 곡진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일찍 만월대에 올라 회고를 하되,

옛절은 말이 없이 어구옆에 쓸쓸하고
저녁해 고목에 비치어 더욱 서럽구나
태평세월 쓰러지고 스님 꿈만 남았는데
영화롭던 그 시절이 탑 머리에 부서졌네
누런 봉황새는 어디 가고 참새들만 오락가락
진달래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먹네
송악산 영화롭던 옛모습 생각하니
봄이온들 소슬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고사소연방어구 (古寺蕭然傍御溝)
석양교목사인수 (夕陽喬木使人愁)
연하냉락잔승몽 (煙霞冷落殘僧夢)
세월쟁영파탑두 (歲月觴嶸破塔頭)
황봉우귀비조작 (黃鳳羽歸飛鳥雀)
두견화발목양우 (杜鵑花發牧羊牛)
신송억득번화일 (神松憶得繁華日)
기의여금춘사추 (豈意如今春似秋)

라 하였고, 또 일찍 초월(初月)을 읆었으되

곤륜산 맑은 구슬 뉘라서 끊어내어
직녀의 멋진 빗을 솜씨 좋게 만들었나
견우가 한번 떠나 다시 오지 못했으니
푸른 하늘 허공중에 수심겨워 던졌구나.

수단곤산옥 (誰斷崑山玉)
재성직녀소 (裁成織女梳)
견우일거후 (牽牛一去後)
수척벽공허 (愁擲碧空虛)

라 하였다. 이걸 세상에서 다투어 전송하며 이계란(李季蘭, 당나라 女中詩豪)과 설도(薛濤, 당나라 여류시인)등에 비하고 이래서 국중(國中)의 명기를 말하면 반드시 진을 먼저 쳤다. 진이 임종할 때 그 가인(家人)더러 부탁하되 "내가 천하남자를 위하여 능히 자애(自愛)케 못하고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으면 관(棺)도 말고 시체를 고동문(古東門) 밖 사수(沙水) 어름에 내버려 누의( 蟻) 호리(狐狸)로 내 고기를 먹게 하여 천하 여자가 진(眞)으로써 경계를 삼게 하라"하였다. 가인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어떤 남자가 거두어 묻었다. 이제 장단 구정현(口井峴, 입우물고개) 남(南)에 진이 묘가 있다. 진의 시가 세상에 전하기는 4수인데 이에 2수만 적었다고 한다.






출처 : 서정백의 말사랑글사랑
글쓴이 : 서정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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