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원리를 사랑으로 표현한 영화 ‘무극’
표면적으로 보아 ‘무극’의 주제는 숭고한 사랑이다. 쿤룬과 칭청은 지극한 사랑을 통하여 무극에서 정해준 운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사랑을 이룬다는 것을 바로 ‘무극’에서 영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종합 예술이기 때문에 그 속에 수많은 장치를 숨길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표면만으로 평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무극’을 생각해보면 이 작품에서 감독이 말하려는 것은 숭고한 사랑이라는 표면적 주제를 통해 우주의 원리와 순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즉, 우주의 원리와 순리를 따르지 않을 때는 고통과 어려움이 따르지만 존재의 근원인 무극의 세계를 제대로 따를 때는 언제든지 그것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극’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그것의 원리와 순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되는가? 이것이 바로 ‘무극’이라는 영화에서 우리에게 말하려는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은 무극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먼저 무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무극은 태극이며 무한히 크기도 하고 무한히 작기도 한 존재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존재가 없는 존재이다. 여기서 존재가 없다는 말은 인간의 능력에서 느끼고 알아 볼 수 있는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극은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으로써 너무나 큰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존재하지만 또한 어느 것도 담고 있지 않는 너무나 작은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가장 크면서 가장 작은 존재가 바로 무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극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원리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속도로 나타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물질로 나타난다. 무극이 너무나 빨리 움직이면 陽이 되는데, 陽의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임이 없는 陰으로 된다. 여기에서 陽은 불이요, 陰은 물이다. 불은 움직임이라는 속도에 의해서만 나타나서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것을 태움으로써 그것을 변화시킴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물은 움직임이 없는 물질에 의해서만 나타나는데, 다른 것을 받아들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양과 음은 모두 자신을 ‘버림’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것이 바로 무극이 우주에 나타나는 방식이며 양과 음은 무극의 대변자에 지나지 않는다. 양과 음이 만약 이것을 무시하게 되면 수많은 고통과 시련이 따르고 이것을 따르면 평안과 사랑을 얻게 된다.
이 사진은 무극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제 영화를 살펴보자. 영화에서 양과 음으로 나타난 ‘무극’의 대변자는 쿤룬과 칭청이다. 이 둘은 무극의 진정한 대변자이기 때문에 무극이 원래 가지고 있는 순리를 따를 때만 자신을 존재하게 할 수 있고 사랑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그 순리는 희생을 바탕으로 하면서 스스로를 버리는 행위이다. 먼저 칭청의 경우를 보자. 칭청은 어릴 때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의 빵과 신발을 훔쳤다가 무환에게 혼이 나고 겨우 도망을 가지만 다시 빵을 물속에 빠뜨린다. 그러자 만신이 나타나 빵을 돌려주면서 무극의 세계를 보여준다. 왕비가 된 칭청은 왕에게서 도망치지 못하다가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면서 쿤룬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버림은 진정한 버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한다. 궁에서 도망친 칭청은 모든 것을 희생함으로써 쿠앙민의 사랑을 얻는다. 제2의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칭청은 사랑의 진실을 알게 되고 이것이 무극으로 통하는 진정한 버림이 된다. 쿤룬 역시 칭청과 같은 길을 걷는다. 모든 것을 버리고 노예의 신분이 되어 희생함으로써 살아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었다. 쿠앙민을 주인으로 섬기던 쿤룬은 왕을 죽인 암살자가 되면서 칭청을 구하지만 그것 역시 진정한 버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실에 다가서지 못한다. 또한 쿤룬은 칭정을 구했다가 무환에게 쫓겼을 때 절벽으로 뛰어드는 버림을 통해 자신을 살린다. 다시 쿠앙민의 노예가 된 쿤룬은 칭청을 구하기 위해 문을 열다가 잡힌다. 그러나 그 희생은 진정한 진실에 한발 더 다가서는 것이 된다. 자신이 왕의 암살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쿤룬의 행동은 목숨을 담보로 한 버림이었다. 그러나 이 버림을 통해 칭청의 진실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버린다는 것은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니 자신을 희생, 혹은 부정할 때만 가능하고, 그것을 통해서 양은 음이 되고 음은 양이 되어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 이것이 무극의 원리며, 순리이다. 쿤룬은 자신을 버려서 칭청을 지향하고, 칭청은 자신을 버려서 쿤룬을 지향할 때 이 둘은 무극의 원리를 제대로 지키는 것이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가 된다. 즉, 우리들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사진은 무극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쿠앙민과 무환은 누구인가? 쿤룬과 칭청이 무극의 일차적 대변자라면 쿠앙민과 무환은 이차적 대변자이다. 하나는 밝음이요 하나는 어둠이니 이 둘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늘의 해와 달이 함께 있기가 어려운 것과 같다. 해가 지면 달이 뜨고 해가 뜨면 달은 빛을 잃는다. 이것이 이들의 운명이다. 무극의 이차 생산물, 혹은 대변자인 쿠앙민과 무환은 쿤룬과 칭청으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간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 둘은 절대로 무극으로 회귀할 수 없다. 이 둘은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존재인 쿤룬과 칭청을 강제로 가지려 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끊임없이 대립하고 갈등한다. 그렇다고 이들의 대립과 갈등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들의 대립과 갈등이 없다면 무극의 일차적 대변자인 쿤룬과 칭청은 만날 수 없게 되고 하나로 통합될 수 없다. 해와 달이 하늘에 함께 나타날 때 쿤룬과 칭청이 다시 만날 것이라는 만신의 말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이 둘은 쿤룬과 칭청을 위한 보조자이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이 둘의 갈등은 죽음을 향해서 가지만 이 둘이 죽음을 향해서 가는 투쟁과정이 심화되면 될수록 반대로 쿤룬과 칭청은 무극의 세계에 가까워진다.
이 사진은 무극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쿠앙민과 무환이라는 두 존재의 갈등과 대립이라는 외연이 점차 작아지면서 죽음이라는 극점을 향해갈 때, 쿤룬과 칭청의 화해와 사랑이라는 내포는 점점 커가면서 무극의 세계에 가까워진다. 이것이 또한 무극의 원리이고 순리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쿤룬과 칭청은 하나가 되어 무극의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돌아가는 과정 역시 변증법적이다. 쿤룬은 무환이 가졌던 검은 털옷을 입음으로써 陽을 부정하여 陰을 지향하고, 칭청은 쿠앙민의 죽음을 지킴으로써 陰을 부정하고 陽을 지향하여 하나가 됨으로써 양과 음이라는 형태에게 주어졌던 운명을 극복하고 무극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들을 중심으로 핵심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양과 음의 통합체-무극(태극), 陽-쿤룬-쿠앙민-불-움직임(속도), 陰-칭청-무환-물-머무름(물질). 처음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한 존재, 그것이 無極이며 太極이고, 바로 空의 세계라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심오한 동양철학에다 사랑과 무협, 환상과 현실을 함께 담았으니 매우 잘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세계 > 문학으로영화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수는··」, 「올드보이」, 「친절한·금자씨] 박찬욱의 트리플 복수시리즈 (0) | 2006.03.02 |
---|---|
"게이샤의 추억" 다시보기 (0) | 2006.01.27 |
"영웅"에 대한 감상평 (0) | 2005.12.20 |
"페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대한 감상평 (0) | 2005.12.20 |
"무사"에 대한 감상평 (0) | 2005.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