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 사상과 결합한 페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을 보면 대부분이 예수의 고난을 다룬 지금까지의 영화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 중심을 이룬다. 어떻게 다르냐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예수의 고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예수의 고난이 인간적인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부활의 의미가 강조되는 것도 아니고, 신성성이 강조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 예수가 겪는 고통과 죽음이라는 고난이 처절하게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예수를 다룬 종래의 영화와는 분명 많이 다르다. 그런데, 이 영화가 기존의 영화와 다른 점이 고작 이 정도라면 과연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이 영화는 무엇이 기존의 영화와 다른 것일까?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여러 가지 주장이 가능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하늘과 땅으로 구분되어 있던 聖과 俗을 땅으로 통합하여 보여주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전통적인 서양식 종교관과 그런 시각으로 해석한 예수를 다룬 영화에서는 한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서양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영화를 따라가 보면서 이 점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이 영화는 예수가 고난을 당하기 하루 전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한 순간까지를 다루고 있다. 예수의 말씀처럼 예수 사후에 기독교가 불같이 일어난 것도 다루지도 않았고, 예수가 행한 신기한
기적들에 포커스를 맞추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인간에 의해 고통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언어의 내용은 성경에 나오는 정도의 것만 간략하게 보여줄 뿐 화려한 수사를 간직한 문장 같은 것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의 영상을 통해 보여주는 장면 장면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말없는 장면들이 바로 언어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루 동안에 겪었던 예수의 고난이 그려지는 과정에서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과거의 장면들을 현재의 것들과 연결시켜 볼 필요가 있다. 즉, 예수께서 현재 받고 있는 고난과 예수께서 받았던 과거의 영광이 서로 교차되면서 영화는 진행되는데, 이 고난과 영광이 모두 한 주체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예수를 그렇게 반기면서 메시야로 환영하던 그들이 바로 예수께 죽임을 안겨주는 동일한 주체인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늘의 聖과 땅의 俗의 구분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즉, 聖과 俗은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공존 해 있으며, 그것도 하나의 주체 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 주체가 바로 인간이며 그 속에는 聖스러움과 俗됨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지금까지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높고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 속에 있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말이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바로 예수의 말씀을 자신들이 가진 제국주의적 세계관에 맞추어서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 바로 이 땅에 온 것이기 때문이다.
聖은 俗이 있을 때만 그 의미를 확고히 할 수 있으며, 俗은 聖이 있으므로 해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聖과 俗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어떤 사물 속에도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 세상이 온갖 잡다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 역시 그 속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들 속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 예수께서는 죽음이라는 고난을 당한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한다면 어찌 상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신 말씀은 가슴 깊이 파고드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쉬운데, 자신이 좋아하고 섬기는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일 역시 쉬운 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성스런 자리에서 상을 받으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원수처럼 생각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니 상을 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성과 속이라고 하는 것은 양쪽이 뾰족한 모양을 한 막대의 다른 끝과 같은 것이니 하나의 주체에 있는 서로 다른 이면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聖스러운 것만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俗된 것만으로도 존재할 수 없다. 이 둘은 하나의 몸 속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측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聖을 선한 것으로 보고, 俗을 악한 것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善과 惡은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인간의 몸 속에 늘 함께 있으니 한편으로는 예수를 환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안겨주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죽는 그 순간까지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른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말씀이야말로 한쪽만을 강조하면서 살아왔던 우리들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자신의 일부를 부인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꾸지는 것이기도 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로 자신의 몸 속에 있는 惡을 잘 다스려서 그것이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승화될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바깥에 있는 다른 사람의 惡조차 사랑하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은 하나가 될 것이고, 聖과 俗. 善과 惡의 갈등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세상이 실현될 것이다.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때까지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고 생각했던 기존의 종교적 이념을 파타하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한 말은 예수가 죽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 뿐 만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될 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세상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본다.
원래 하나의 주체 속에 양면성으로 존재했던 성과 속을 하늘과 땅으로 갈라놓았던 사람들이 제국주의이념을 늘 앞세우는 서양인들이었는데, 하늘과 사람을 하나로 보는 동양적 이념으로 재해석한 것이 바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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