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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세계/우리문학현장기행

최초의 가전체 작가 임춘의 문학

by 竹溪(죽계) 200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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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가전체 작가 임춘(林椿)의 문학


    임춘은 비록 중국사람이었으나 건국 공신의 후예로 평장사(平章事)까지 지낸 조부와 상서(尙書)를 지낸 부친을 거치면서 유학자로서의 소양을 갖춘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학문의 뜻을 한창 펼칠 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당하게 된다. 겨우 살아남은 그는 예천으로 내려가 7년여에 걸쳐 그곳에 살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핀다. 산에 굴을 뚫어 강물이 닿지 않는 곳까지 물이 들어가도록 하였으며, 들판을 흐르는 물이 다른 곳으로 세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보를 만들기도 했다. 그가 만든 굴과 보는 각각 굴모리굴, 임춘천이라 불렸으며 이런 행적으로 말미암아 예천 임씨의 시조가 된다.

 

임춘의 문학은 유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울분과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중심을 이룬다. 작품에 나타나는 비분과 현실비판이 현실지향의 투철한 자아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향이 잘 나타나 있는 그의 시 한편을 보도록 하자. "십년의 기구한 생애에 얼굴은 먼지뿐이오 긴 세월 동안 조물주의 시기만 받았도다. 나루터 물어도 길이 멀어 배 닿기 어렵고 신선이 되려하나 공이 더디어 약을 만들수가 없구나. 과거에도 한을 풀지 못했고 글 속에는 애달픈 슬픔만 담았다네. 맹호연은 지기가 없었을 뿐이니 명군이 재주 없다고 버린 적이 있었던가!(十載崎嶇面撲埃 長遭造物小兒猜 問津路遠 難到 燒藥功遲鼎不開 科第未消羅隱恨 離騷空寄屈平哀 襄襄陽自是無知己 明主何會棄不才) 시인 자신의 능력은 뛰어난데 조물주가 미워해서 세상에 쓰이지 못했으며, 과거에도 실패하고 왕의 눈에 뜨이지도 않아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고 하면서 불우하게 살았던 자신의 생애를 울분과 한탄으로 표현하고 있다.


    임춘은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가전체를 지은 작가였다. 그가 지은 작품은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이 있는데, 앞의 작품은 술을 의인화한 것이고, 뒤의 작품은 돈을 의인화한 것이다. 두 작품은 모두 임금과 나라를 섬기는 신하의 도리를 강조하였는데, 유학자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그 시대의 비리를 비유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공방은 겉이 둥글고 안은 네모났는데, 재산이 많은 사람들만 교류하고 재물을 너무 밝혀 세상을 타락하게 만든 장본인이라 하여 돈은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 폐해가 커서 없애야한다고 하였다. 국순은 보리의 후예인데, 온갖 연회와 손님접대 등에 반드시 쓰였고, 돈을 너무 밝혀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작가는 기술하고 있다. 이는 당대 사회의 타락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소인배들이 조정에 득실대고 매관매직으로 정치가 혼탁해진 것을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불우하게 생을 살았던 그는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면서 세상을 조롱거리로 삼았던 죽림고회(竹林高會)의 사람들과 친한 사이였고, 사후에는 예천의 옥천서원에 배향되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막역지우였던 이인로(李仁老)에 의하여 유고집으로 발간되었다. 무신정권기라는 난세에 태어나 처참한 삶을 살다간 그의 문학과 애민의 증거인 예천의 유적들, 그리고 옥천서원 등을 찾아서, 유자(儒者)로 살면서도 현실에 부응할 수 없었던 비극적 인물의 삶을 되새겨 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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