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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혼설화의 상징인 남이(南怡)장군 전설 |
서울 종로구 동숭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정문 앞의 건널목을 건너면 바로 왼쪽에 돌로 된 표지판 하나가 도로변에 서 있는데, 남이장군의 집터라 새겨진 비석이 그것이다. 태종의 외손자며, 권람의 사위였던 남이는 17세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병조판서까지 지냈으나 한명회, 신숙주 등에 의해 밀려났다가 28세인 예종 때에 유자광의 무고를 입어 역모의 주모자로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한명회가 다시 영의정에 복귀함으로써 훈구세력들의 기반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남이를 무고했던 유자광은 그가 여진족 토벌 때에 지었던 시를 고쳐서 증거로 삼았으니 필화(筆禍)사건이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애네, 남아 20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고 하여 자신의 기개를 읊었는데, `未平國'을 `未得國'으로 고쳐서 역모라고 무고하였다.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남이는 이를 불쌍히 여긴 당시 백성들에 의해 구전설화로 다시 살아나는데, 남이장군설화군을 형성할 정도로 방대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는 영양, 포천, 철원, 제주 등의 도적들을 무찔렀으며, 그 때마다 신통한 능력으로 도적패를 소탕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여진족을 토벌하여 요동까지 진격했으며, 북관에서 이시애 등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토벌군으로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공신으로 책봉되었던 그가 무고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자 그에 대한 민중의 안타까움이 이야기가 돼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인물전설은 <연려실기술>, <청야만집>, <대동기문> 등에 수록되었고, 구전으로도 수많은 이야기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연려실기술>의 국조기사에 수록된 남이의 혼인설화를 통해 남이가 지닌 신통력과 범상하지 않음을 살펴볼 수 있다. “남이가 어릴 때 큰길에 나가 놀고 있었는데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지고 가는데 그 위에 귀신 하나가 올라앉아 있었다. 따라가 보니 하인은 권람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곧 집안에 곡성이 나서 물어 보니 권대감의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었다. 남이는 자신이 죽은 딸을 살리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재상 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남이가 들어가 보니 처녀의 가슴 위에 아까 본 귀신이 앉아있는데, 남이를 보자 곧 도망을 가고 죽었던 처녀가 살아났다. 그러나 남이가 방을 나오자 처녀는 또 숨을 거두고 그가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곤 했다. 남이가 귀신의 이야기를 권재상에게 하고 나쁜 사귀를 완전히 쫓아버린 후 죽었던 처녀를 살려냈다. 딸을 살려준 은혜를 고맙게 여긴 권람은 남이를 사위로 삼았는데, 권부인은 그가 화를 당하기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그와 관련된 것은 설화뿐 아니라 유적들도 상당히 많은데, 경기도 화성의 비봉리와 남이섬에 있는 묘소를 비롯하여, 서울의 용산에 있는 사당, 남이가 무공을 닦았다는 축령산의 남이바위 등이 있다. 전국에 분포한 남이의 이야기와 유적들은 억울하게 죽은 주검이 어떤 경로를 통해 민중 속에 살아남게 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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