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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세계/문학으로영화보기

"슬라이딩 도어즈"에 대한 평

by 竹溪(죽계) 2005.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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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이딩 도어즈에 나타난 선택의 의미

 

   수 없이 만나는 선택의 순간들 삶을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그 경우의 수는 슈퍼컴퓨터도 풀어내지 못하는 바둑에서 발생하는 경우의 수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슬라이딩 도어즈는 이 선택의 순간을 둘로 나누어서 우리의 인생을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은 여주인공이 회사에서 해고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술을 훔쳤다는 어처구니없는 의심을 받아서 홍보 회사에서 해고된 여주인공은 남자친구와 동거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지하철 개표구를 지나 홈으로 들어갈 때 전철이 홈으로 들어온다.

 

    여기에서 두 개의 과정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올라오는 꼬마와 부딪혀서 지하철을 놓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엄마가 꼬마를 안아서 치우는 바람에 지하철을 탔을 경우이다. 이 때부터 영화는 두 상황으로 나누어지면서 전개되고 두 상황이 교차되면서 관객에게 보여지게된다.

 

    이 두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지하철을 탔을 경우에는 해고-->회사엘리베이터(제임스와 조우)-->지하철-->제임스와 다시 만남-->귀가--->남자친구의 정사목격-->가출-->친구집-->제임스와 다시 만남-->홍보회사 창립-->제임스와 사랑-->오해-->풀림--->임신-->교통사고-->유산

 

     지하철을 타지 못했을 경우에는 해고-->회사엘리베이터(제임스와 조우)-->지하철 고장-->버스 정류장에서 강도 만남-->귀가-->동거남과 외출-->빵가게 취직-->동거남의 외도-->의심-->외도한 여성과 산부인과에서 만남-->층계 사고-->유산 두 상황이 합쳐지면서 동거남의 애원을 뒤로하고 퇴원하는 여주인공이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제임스를 만나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영화는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선택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동거남의 부정을 한 순간이라도 빨리 알아차리게 된 경우가 지하철을 탔을 경우인데, 그 경우 여주인공은 새로운 삶을 개척하게 된다.

 

    그러나 지하철을 타지 못했을 경우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시간이 늦어지게 된다. 동거남의 부정을 알아차리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손해인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후자의 경우를 상정하여 새로운 삶과 사랑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식 사고 방식으로 본다면 새로운 삶을 빨리 개척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으로 되어야하나 이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게 보여준다. 손해를 보면서 돌아갔지만 늦게나마 자신의 인생을 찾은 여주인공에게 사랑의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영화를 끝맺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이 의미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다음으로 이 영화가 가지는 구성적 특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순간적인 선택에 따라 서로 다르게 진행되는 두 상황들이 교차되면서 보여지기 때문에 관객은 우선 두 상황이 설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또 하나의 구조는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두 상황으로 나누어져 교차되고 있는 상황을 잘 보면 선과 악의 대립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지하철을 탔을 경우에 진행되는 과정은 선의 과정이고, 못 탔을 경우의 과정은 악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현대의 삶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순간이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서부극의 선악 대립처럼 선이 승리하는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주인공이 지하철을 탔을 경우에 벌어지는 과정은 제임스, 제임스의 어머니, 제임스의 전부인 등인데, 이들은 모두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제임스는 가식을 모르는 남성이고, 전 부인은 병으로 누워있는 전 시어머니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가식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지하철을 탐으로 인해서 새롭게 시작되는 여주인공의 인생은 선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하철을 타지 못했을 경우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악인이다. 길 가에서 만난 강도, 여주인공을 속이고 옛 애인과 성관계를 갖는 동거남, 동거남의 옛 애인 등은 모두 악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 두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의 성격은 변하지 않고 끝까지 지속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유형적 인물인 셈이다. 설정된 성격이 작품의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을 유형적 인물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고소설에 등장하는 충신과 간신이라는 인물들이 그렇고, 서부극에 등장하는 선인과 악인들이 그렇다.

 

     그런데,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영화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선과 악의 두 세계가 경우의 수로 등장하는데, 왜 하필이면 마지막에서는 선의 세계에 속해 있던 여주인공이 사라지고 악의 세계에 속해 있던 여주인공이 엘리베이터에서 사랑을 만나는 것으로 될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묘미가 숨어 있다.

 

  선의 세계에 속했던 여주인공이든 악의 세계에 속했던 여주인공이건 둘 다 유산을 함으로써 다 실패한 것처럼 짠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는 악한 세계에 속했던 여주인공이 사랑을 만나는 것으로 처리한 것은 과연 악의 승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이 점을 풀어내지 못하면 이 영화를 보는 묘미를 놓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주의 깊게 마지막 장면을 보도록 하자. 영화의 처음 장면에서는 해고된 여주인공이 회사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제임스와 조우하는 장면인데, 여주인공이 귀고리를 떨어뜨려서 제임스가 주워주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병원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는데, 역시 귀고리를 떨어뜨리고 제임스가 주워준다. 그런데, 그곳에서 여주인공이 하는 이야기는 처음과 다르다. 이미 앞으로의 진행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데, 이 부분을 놓치면 안된다.

 

    즉,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 교차 편집되어서 진행되었던 두 세계를 하나의 연결선상에 놓고 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교차 편집되어서 선택의 순간에 나타날 수 있는 두 개의 상황을 보여주었고, 악의 세계에서 늦게 도망쳐 나온 여주인공에게 사랑을 선사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렇게 보아서는 묘미가 절감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여주인공이 지하철을 타서 제임스를 다시 만나는 장면으로 다시 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영화는 완성된다.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를 재편집하자면 이렇다.

 

   회사에서 해고된 여주인공은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을 타지 못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가 강도를 만나고 고생한 끝에 집으로 돌아온다. 동거남의 부정을 모른 채 빵집에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 동거남의 부정을 알게 되고 그 충격으로 계단에서 넘어져서 아이를 잃는다.

 

    병원에서 애걸하는 동거남을 뿌리치고 나오던 여주인공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제임스를 만난다. 제임스를 만난 뒤 이번에는 지하철을 탄다.

 

     그 지하철 안에서 다시 제임스를 만난다. 그 뒤는 실에 영화의 진행과정에 맞추어 보면 된다. 진정한 사랑을 얻는 여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은 이제 관객의 몫이다. 모든 것은 이어짐과 끊어짐이라는 순환의 고리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이 영화는 두 개의 경우의 수를 교차 편집하여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로 이어지도록 만든 아주 흥미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놓고 보면 선과 악이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어서 옛날의 고소설이나 서부극의 흑백논리를 그대로 답습했다고는 볼 수 없게 된다.

 

   이 영화는 감상에 있어서 관객의 참여 부분을 최대한으로 넓혀 놓은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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