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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감상평

by 竹溪(죽계) 200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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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평

 

    이 영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제목에서 보여주는 행방불명이란 말의 의미와 관련된 희생제의를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中陰界의 세계가 갖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영화는 동남동녀가 신에게 불림을 받아 반신반인의 상태에서 겪는 일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나 존재할 수 있는 희생제의 설화 중 동남동녀희생제의와 관련된 소재를 에니메이션으로 처리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행방불명이라고 번역했지만 그 말의 한자어를 자세히 보면 신에게 숨음, 혹은 신에게 불려감 등의 의미를 지니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행방불명이라는 말보다는 신에게 부름을 받아서 이승을 떠나 중음계의 세계로 갔으며, 그곳에서 半神半人의 존재가 되어 인간에게는 신앙의 대상이 되고, 신에게는 부림을 받는 상태로 된 것을 나타내는 말인 '신들림'이나 '신내림'으로 바꾸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센과 치히로는 같은 인물이지만 서로 다른 인물이기도 하다. 치히로는 인간세상의 존재요 센은 중음계의 존재이다.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을 뿐 경제적인 논리에 물들어 있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가 바로 치히로 이고, 그것에서 벗어나 어른들의 세계인 중음계로 가는 과정을 밟는 존재가 바로 센이다. 그리고 인간에 의해서 더렵혀진 신의 세계를 구하려다가 마법에 이끌려 그 제자가 된 하쿠 역시 인간과는 다른 신의 세계가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순수성을 간직한 존재이다. 하쿠 역시 중음계에 머무르다가 치히로를 만나면서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아나간다. 하쿠는 치히로의 사랑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쿠의 하강과 치히로의 상승이 만나서 사랑을 바탕으로 한 희생으로 결합하고 그것이 온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 주제이다. 일본말로 '가미 카쿠시(神隱)'라는 말이 갖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중음계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중음계는 신을 받들고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는 마법의 세계로 신과 인간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다. 우리가 쓰는 쉬운 말로 바꾸면 신성함을 간직한 제의의 공간이며, 상상의 세계가 숨쉬는 동화의 나라인 마법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두 가지 법칙이 존재한다. 하나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과 재생 법칙이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은 특히 인간에게 엄격하게 적용되지만, 신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법칙이다. 그리고 희생과 재생의 법칙은 신과 인간의 양 세계에 공통이며, 나아가서는 마법의 세계에도 통하는 법칙이다. 이 희생과 재생의 법칙은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 희생을 통해서 있을 수 있는 것만 존재하고 나머지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황금이 쓰레기로 변하는 상황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순수성을 잃지 않는 주인공은 언제나 이 세계에서 성공하며, 그 세계 자체를 변화시키게 된다. 다른 여러 인간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원인과 결과로 신과 인간이 함께 고통받는 상태에서 사랑을 바탕으로 한 희생을 과감히 행하는 주인공에 의해서 불신과 타락으로 일관되던 중음계의 세계는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 인하여 더렵혀진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모두를 정화시킬 수 있는 힘을 중음계가 가지고 있는데, 순수한 사랑을 가진 주인공이 중음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치히로가 살았던 곳인 인간세계는 현실세계에서 볼 때 일본 밖의 인간세상, 즉 일본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준 힘없는 여러 민족과 나라들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들이 잘 살기 위해서 착취를 일삼았던 다른 나라나 민족을 가리킨다. 일본민족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착취를 일삼으면서 남의 나라의 힘을 빌려서 잘 사는 이기적이고 사악한 존재인 것이다.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치히로의 부모이다. 무엇이나 먹어치우고 마는 거대 공룡 같은 존재가 바로 치히로의 부모가 살았던 일본의 모습이며 치히로의 부모로 상징된다.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데에 이골이 난 치히로의 부모가 바로 일본의 과거였고 지금의 일본이다. 거기에 얹혀서 치히로 역시 편안하게 살아온 존재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 희생정신이 남아있다.


    마법이 중심을 이루는 중음계는 현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중음계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일본을 기초로 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영화에서는 황폐화된 놀이공원으로 나온다. 신과 인간의 중간세계에 존재하는 이 중음계는 놀고 먹는 일본의 현세태를 비웃고 그것에 대해 응징을 가한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강한 거부반응이 여기에서 일어난다. 그곳에 있는 존재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되게 설정된다. 과거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서도 열심히 일을 해야 다른 동물로 변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탐욕과 질시 등이 가득 차 있다. 바로 인간세상의 잔재인 것이다. 신을 받들면서 인간의 세계를 동경하고 탐욕을 감추고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이들인 것이다. 한편, 인간에 의해 더렵혀진 신들도 자신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인간의 경제논리에 따르게 된다. 가오나시가 황금으로 중음계(목욕탕)를 혼탁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쪽에서 맺으면 반대쪽에서도 맺히고 한쪽에서 풀면 다른 한쪽에서도 풀리는 그런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육체가 타락하면 정신이 타락하고 정신이 정화되면 육체도 정화되는 그런 논리를 그대로 신과 인간의 세계에 대입시킨 것이 바로 마법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논리와 신의 논리가 혼재 하지만 그것을 꿰뚫고 있는 것은 역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순수 그 자체이다. 이것만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고 타락한 인간과 신의 세계를 동시에 깨끗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환경오염을 경고하고 자연을 사랑하자는 정도의 단순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 아니다. 일본의 희망, 나아가서는 인류의 희망이 바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순수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일본인들을 일깨워 주기 위한 영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치히로가 죽음을 무릅쓰고 하쿠를 구하려는 것을 보고 검댕이 할아버지가 한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이로구나' 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사랑으로만 행동하는 치히로의 순수성은 중음계의 모든 존재들을 변화시키며, 나아가서는 신의 세계까지 맑게 할 수 있다고 감독은 강조하고 있다. 탐욕, 환경오염, 마법, 술수 등 인간과 신을 한꺼번에 타락시키는 어떤 것들도 사랑을 바탕으로 한 순수를 잃지 않는다면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감독의 주장인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점차 많아진다면 일본의 미래, 나아서는 인류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다는 메시지를 이 영화는 담고 있다.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반성과 회한을 깔고서 만든 영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이런 시각으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핵심어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인간세계와 중음계, 중음계와 신의 세계, 인간세계와 신의 세계, 童男과 童女, 일본과 세계, 마법의 의식과 희생의 제의, 상승과 하강, 원인과 결과, 사랑과 희생 등이다. 이러한 어휘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영화를 본다면 어린이의 동심을 잘 살린 영화라느니 환경문제를 다룬 것이라느니 하는 정도에서 벗어나 한 차원 높게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영화평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