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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세계/문학으로영화보기

'디아더스'에 나타난 영국

by 竹溪(죽계) 200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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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과 공동체를 거부하는 나라 영국을 그린 영화 '디아더스'

 

 

'디아더스'라는 제목으로 들어온 이 작품은 공포영화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공포영화가 아니다. 굳이 공포영화라고 한다면 아주 난해한 심리공포를 다룬 유령영화 정도로 규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단순한 공포영화로 보면 이 작품은 아주 재미없고, 아주 졸리는 영화가 될 것이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지루함과 졸음을 참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다면 '디아더스'는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영화일까? 이제부터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필자 나름대로 분석해보도록 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아주 간단하다. 이미 죽은 가족이 자신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집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인 침입자와 싸워서 자신들의 집을 지켜낸다는 것이다. 어려울 것도 없고, 복잡할 것도 없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에다 심리적인 공포를 느끼도록 하는 구성과 분위기,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등이 이 영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분석 능력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본다면 아주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설정의 특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영화를 통하여 감독이 보여주려고 하는 바는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하여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모든 예술은 자신의 능력에 맞도록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작가가 작품을 만들 때 의도한 것이나 완성되고 난 후 새롭게 형성된 작품의 세계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감상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디아더스'의 구성과 설정 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디아더스'는 화합과 공동체 등을 거부하고 자신의 몰락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영국을 그리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무대가 영국이라는 것만 설정하고 있을 뿐 그것이 어떻게 해서 영국을 나타내고 있는지 모두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 등을 자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작품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섬과 저택, 어머니, 딸과 아들, 하인 세 명, 남편, 침입자, 이방인, 그리고 빛 등이다.

 

섬은 이 영화의 중심인 영국이 있는 땅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그리고 세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큰 저택은 바로 원주민을 내쫓고 엄청난 땅을 차지하고 세계의 제국주의를 주도했던 영국을 지칭한다. 그들이야말로 '디아더스', 곧 이방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이라고 결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것을 인정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저택의 주인인 어머니는 자식을 죽이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려고 하지 않는 영국의 황실, 나아가서는 영국이라는 國家를 지칭한다. 여왕을 내세워 부드러움을 강조하면서 세계를 제국주의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영국의 잔인 무도한 행위를, 저택에서 행해지는 어머니의 행동을 통해 공포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딸과 아들은 영국의 중심이 되는 구성원이다. 딸은 현실을 인정하는 눈을 가지고 있지만 아들은 그런 눈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들은 어머니의 말만 믿고 그것만 따른다. 그러나 딸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한다. 따라서 딸과 어머니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그러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은 영국의 국가 권위 혹은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인 세 사람은 오랜 옛날부터 그 땅을 지키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을 지칭한다. 원주민이었던 이들은 바이킹족에 의해서 변방으로 밀려나거나 그들의 하인이 되어서 이 땅을 지키거나 지키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한 사람들이다. 이방인처럼 생각되기 쉬운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인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방인인 바이킹족들에 의해 이방인 취급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나라를 바이킹족을 위해 만들고 다듬어 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함께 사는 방법을 영국인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남편은 민족의 뿌리를 지칭한다. 유럽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남편은 영국의 뿌리가 유럽에 있으며,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그 뿌리가 어디인지도 분명치 않은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남편으로 나오는 남성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설정된다. 오랜 동안 영국의 왕이 유럽에서 선출되었음을 상기시키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침입자로 설정된 '디아더스' 즉, 이방인은 현재의 영국을 화합의 장으로 이끌어내려는 현실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진짜 이방인에 의해서 거부당한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떠난다. 집을 판다는 광고를 남겨둔 채로.....

빛은 모든 것은 밝게 비추어서 우리가 올바르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빛은 영국의 지도자인 어머니에 의해서 거부된다. 그리고 어둠은 이들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영국이 더 이상 식민지와 제국주의로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 죽은 나라라는 것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설정을 염두에 두면서 이 영화를 보면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이 보이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이 논의는 성공했다고 보아 틀림없다. 이제 위의 설정을 바탕으로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유령의 집이 되어버린 저택은 유령의 집처럼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만 그것이 유령의 집이 아니라고 할 뿐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집이 유령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대영제국은 이미 몰락하고 없는데, 자신들만 아직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虛名만 붙들고 유령의 집이 된 영국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어머니가 아들과 딸을 안고 기도하는 내용을 들어 보라. 이 집은 우리들의 집이라고 외우는 처철한 외침 속에 영국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과 죽음을 거부하는 나라, 바로 그것이 영국인 것이다.

저택의 주인인 어머니는 여성을 황실의 주인으로 세워 세계를 지배했던 그 옛날의 찬란했던 영국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럴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저택은 어머니의 저택이다. 그 누구의 저택도 아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지시를 어기고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다른 것이 공포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공포다. 가장 두렵고 무서운 공포가 바로 저택 안에 있는 안주인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 동안 세계에서 영국이 자행했던 殘忍無道한 행위와 대량살상을 불러왔던 전쟁을 상기해보면 이것이 이해될 것이다.

 

세 사람의 하인은 영국이라는 나라를 지탱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없으면 저택은 하루도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정원의 일에서부터 집안의 일까지 모두 이들이 맡아서 하기 때문에 이들은 이 집의 구조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집안의 어떤 것도 자신들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바로 이런 관계이다. 겉으로는 주인이 노예를 지배하지만 노예는 사물순치능력을 가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주인이 노예에게 지배당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나오는 세 사람이 저택을 잘 아는 이유는 그것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바이킹족들에 의해 빼앗기기 전까지는 그 땅은 바로 자신들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힘을 합쳐 저택의 다음 주인인 아들과 딸들에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기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방법을 서로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빛은 세상과의 가장 중요한 소통수단이다. 빛은 창문을 통해서 들어와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저택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는데, 어머니는 이것은 거부한다. 진실을 왜곡시키려는 행위를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커튼으로 모든 창문을 가리지만 밖은 대명천지이다. 자신들만 모를 뿐 세상은 이미 제국주의시대가 아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유령의 집으로 만드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세상과 격리되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영화에서는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들과 딸은 불쌍한 존재이면서 미래를 담보한 존재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찾아 나서보지만 저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딸은 작품 속에서 침입자로 나오는 이방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현실을 보는 눈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이 딸의 행위는 어머니에 의해서 철저하게 봉쇄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다만 희망이 있다면 이제는 빛을 보아도 죽지 않으며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희망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직은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현실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면서도 세계의 구성원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이 영화는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의 하인을 끝까지 집안으로 들여놓지 않는 행위, 자녀를 안고 이 집은 우리 집이라고 기도하는 행위, 죽지 않았다고 절규하면서 종이를 찢어버리는 행위, 누구도 이 집에서 우리는 쫓아내지 못한다고 하는 말 등을 통해 아직도 영국은 과거의 영광만을 붙들고 있는 폐쇄된 나라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행위가 계속되는 한 유령의 집으로 남은 영국이라는 저택은 언제까지라도 'for sale'이라는 광고를 내걸어야 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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