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가르침과 나의 어머니
나는 어머니 연세가 마흔여섯이던 해인 1954년 음력 7월 그믐날(29일) 초저녁에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워낙 老産인 데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데다가 백두대간의 깊숙한 곳에 있는 산골 마을인지라 아주 길게 이어지는 産痛에도 뾰족한 방도가 없는 상황이었다. 오랜 시간을 견딘 끝에 은풍면 송월리에서 남쪽으로 2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예천읍에 가서 쌀 한 가마니라는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빌려온 겸자(鉗子)와 함께 출산을 돕기 위해 온 산파의 힘을 빌려 겨우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산모는 겨우 진정되었으나 아기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아 살지 못할 것이라고들 했는데, 산파가 침착하게 두 발을 잡고 거꾸로 들어서 엉덩이를 여러 번 때리자 입에 물고 있던 양수를 뱉어내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린 뒤에 다시 늘어져 버렸다고 한다. 자신의 출생을 세상에 알리는 첫 신호라고 할 수 있는 온 방이 떠나갈 듯한 울음소리는 없었던 셈이다.
나의 출생과 성장 과정에서 겪은 고난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머리만 조금 내놓고 있는 상태에서 겸자로 당겨내게 되었는데, 너무나 미끄러워 자꾸 빠지는 바람에 어머니 몸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스물네 번 정도 겸자를 걸어서 당긴 후에 겨우 세상으로 나왔는데, 약하디약한 머리 피부는 모두 벗겨져서 피가 철철 나는 상태였다고 한다. 제대로 울 힘도 없는 갓난아기였지만 머리 부분을 만지기만 하면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고 한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모유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었는데, 어린아이를 먹일 변변한 음식이 아예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의 어려운 상황이어서 우유는 아예 구경조차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보리죽을 끓인 후에 나오는 미음 같은 것을 먹였는데, 설탕도 넣지 않아서 아무 맛도 없는 물 같은 미음을 아이가 잘 먹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온종일을 울었댔는데, 울다 지치면 잠이 들고, 배고프면 깨서 또 울고 하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누님들이 여럿 있었던 관계로 번갈아 가며 나를 업어서 달래준 덕분에 힘든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다섯 살 되던 때에는 나보다 7년 위인 형이 국어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깨너머로 보고 깨우친 한글 실력을 바탕으로 어머니가 동네 노인들께 읽어드리던 고전 소설 낭송 기술을 터득하여 여섯 살 때부터는 동네의 꼬마 傳奇叟가 되어 어른들에게 여러 종류의 소설책을 읽어드리곤 했다. 춘향전, 유충열전 등의 필사본 작품과 딱지본 소설, 한양오백년가, 노처녀가 등의 가사집을 비롯하여 삼국지까지 거의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어드렸다. 그 덕분에 나는 나중에 학교에서 몇 년 정도 배워야 알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을 이미 머리속에 저장한 셈이 되었다. 7살 때에 영주군 순흥면 지동리로 이사를 하면서 약간의 적응 기간이 필요했으나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말썽을 피우는 일만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예천에서 영주로 옮기면서부터 새롭게 추가된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동안 어머니 혼자서 감당하셨던 집안일을 분담하여 처리하는 것과 가축의 여물을 조달하는 일 등이 그것이었다.
10남매를 낳고 키우시느라 무척이나 힘들었던 어머니께서는 빨리 걷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불편하셨는데, 집에서 2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는 일, 집 청소, 돼지죽 끓이기 등은 모두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누나들은 모두 결혼해서 집을 떠났고, 형들은 외지로 나갔으며, 아버지께서는 바깥일로 바빠서 집에는 나와 어머니 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물을 길어 오는 것과 돼지가 먹을 풀을 베어 오는 것인데, 물동이 두 개에 가득 담아서 메고 집까지 오면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해서 삼 분의 일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한 들판으로 나가서 쑥이나 부드러운 풀을 베어야 하는데, 낫을 다룰 줄 몰라서 10분도 지나지 않아 왼쪽 검지에 상처를 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하나 해결되었고, 몇 달 뒤부터는 아무런 문제 없이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일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했으니 꽤 오랜 시간을 했던 셈이었다.
특히 초등학교 때는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잦았는데, 해야 할 일을 어느 정도 마치면 어머니 몰래 산 너머에 있는 동네에 놀러 가 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없으면 어머니 혼자서 하기 힘든 일이 많은 관계로 반드시 나를 찾아야 했는데, 어머니는 매우 기발한 방법을 개발하셨다. 우리 집은 야트막한 산자락 끝에 있는 과수원의 獨家村이었는데, 주변이 모두 논밭이어서 동네 사람들이 그곳에서 농사 일을 하고 있었다. 나를 찾다가 보이지 않으면 어머니는 내 이름을 크게 외치기 시작하는데, 매우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동네로 와서 내게 말하도록 만드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 나의 옆으로 지나가던 그 어른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빨리 집으로 가보라고 하면서 너의 어머니 숨넘어갈 것 같다고 엄포를 놓는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오백 미터가 넘는 산길을 달음박질쳐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하루가 멀다 않고 반복되었기 때문에 동네에서 나는 어머니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로 치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나 나나 그런 것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일상처럼 그러한 시간을 쭉 이어갔다.
참으로 말 안 듣는 말썽꾸러기이기는 했지만 내가 하는 효도라는 것도 하나 정도는 있었으니 우등상장을 해마다 어머니께 보여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우등상을 타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미술 용구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학교에 아이를 맡긴 이상 어떤 의견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냥 넘어가셨다. 이 일은 내게 굉장한 상처가 되었는데, 나중에 그 선생님께서 직접 내게 사과했지만 서운했던 응어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그해의 담임선생님을 만나기만 하면 멀리서도 쫓아가서 큰 소리로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면서 소심한 복수를 하곤 했었다. 이런 일은 중학교 다닐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 갔는데, 내가 학교 가는 길과 반대 방향이어서 출근하는 선생님과 등교하는 내가 거의 매일 마주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이후로는 그분을 뵙지 못했는데, 군대 갔다 와서 得音이라도 할까 하여 소백산 국망봉에 올라가 있을 때 술을 사러 내려왔다가 배점초등학교 교장으로 계시는 선생님께 인사드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도 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계셨으니 그분도 어지간히 신경을 쓰셨던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나의 끈질긴 소심한 복수가 그 분에게 굉장한 압박을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와 어머니가 서로 밀고 당기는 이런 일상은 10년 넘게 계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내 삶을 조금이라도 올바르고 성실하게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웠으니 생애 최고의 선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가 강조하신 삶의 지혜는, 첫째, 잘못된 것은 모두 자신의 탓으로 하라, 둘째, 말이든 행동이든 거짓으로 하지 말라, 셋째,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 넷째, 남을 먼저 배려하고, 늘 그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수도 없이 들었는데, 잔소리로만 들렸던 그것이 내 인생에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머니의 이 말씀이 없었다면 형편없이 작은(幺麽) 지금의 인격이라도 갖추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는 생각을 늘 한다.
사람은 삶의 과정에서 누구나 실수하기도 하고,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일을 망치거나 실패하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수나 실패를 극복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는 것인데, 그렇게 된 원인이나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내어 반성함으로써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본능적인 자기방어 기재가 있으므로 일이 잘못된 원인이나 이유를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많이 한다. 제대로 된 반성을 통해 자기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일의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어머니는 늘 강조하셨다. 간단할 것 같았지만 제대로 된 반성을 통해 자신에게서 원인과 이유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도 없이 반복되는 잘못과 실패를 겪으면서도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았던 적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노력은 하고 있지만 다른 것에서 잘못의 원인을 찾는 행동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데다가 언제쯤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으니 어머니께 늘 죄송한 마음뿐이다.
사실이나 진실이 아닌 것을 그런 것처럼 꾸며서 하는 말이나 행동을 거짓이라고 하는데, 상대를 속여서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므로 사기(詐欺)라고 할 수 있다. 거짓된 언행을 하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진실하지 못한 행위로 남을 속여서 성공하면 그것을 발판으로 또 다른 거짓을 행하면서 한층 큰 거짓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은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므로 종국에는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이 된다는 점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어려움을 헤치면서 우리 남매를 키워오신 어머니는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정직함을 늘 강조하셨고 나의 말과 행동에 조금이라도 거짓된 것이 보이면 크게 혼을 내곤 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이만큼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힘입은 바가 가장 컸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어머니께서 강조하셨던 말씀은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절로 얻어진 것은 자기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욕심을 내지 말 것이며, 무엇이나 자신이 가진 능력과 각고의 노력으로 성취하라는 것이 말씀의 핵심적인 요지였다. 초중등 학교에 다닐 때 공부는 하지 않고 소설이나 만화책만 보면서 노는 일에만 몰두하는 막내아들이 이 말뜻을 새겨듣고 노력하기를 바라셨지만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으니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다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마음을 잡아 공부에 매달렸으니 참으로 한심했다는 생각을 지금도 떨쳐낼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여러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배려하는 것이라고 어머니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배려는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함을 특히 강조하셨다. 작은 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큰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것인지 모르지만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어떤 경우에도 내 의견을 먼저 제시하기보다는 상대방 말을 듣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모두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가 주신 네 가지 가르침과 막내아들을 철저하게 믿고 끝까지 기다리며 지원해주신 아버지가 안계셨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지금은 내 곁에 계시지 않지만, 부모님이 주신 가르침은 앞으로의 내 삶에도 영원한 등불로 삼아 계속해서 정진하고자 한다. 그것만이 미약하게나마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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