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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넘어 사랑과 구원으로 거듭난 영화 “박쥐” 리뷰

by 竹溪(죽계) 2009.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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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한국)
장르
로맨스/멜로
감독
영화 줄거리
신부, 뱀파이어가 되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부 ‘상현’은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괴로워 하다가 해외에서 비밀리에 진행되는 백신개발 실험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실험 도중 바이러스 감염으로 죽음에 이르고, 정체불명의 피를 수혈 받아 기적적으로 소생한다. 하지만 그...
영화 감상평
나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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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를 넘어 사랑과 구원으로 거듭난 영화 “박쥐”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복수극 시리즈 세편(‘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세편의 시리즈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미움으로 인해 생기는 원한을 복수를 통해 해결한다는 것이 주제를 이루었다.


그런데, “박쥐‘에서는 사랑과 미움, 선과 악 같은 양분법을 쓰지 않고 이것이 하나로 된 상태에서 모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인간의 서투른 판단에 의해 양분된 모든 것들은 서로 대립하기는 하지만 하나로 통합된 상태에서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며 혼란스런 상태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혼란스럽다 못해 복잡하고 괴기스럽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없는 완전한 혼돈의 상태를 그리고 있으므로 이 영화에서는 성자도 없고, 속인도 없으며, 선인도 없고, 악인도 없다.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둘로 나누어진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떠나 모든 것들을 하나로 합친 통합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허리우드 영화나 무협지 등에 언제나 등장하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아군과 적군, 선과 악, 성과 속 등의 구별을 모두 없앤 상태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전제와 함께 등장 캐릭터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비롯하여 사랑과 구원의 문제 등에 대한 생각을 우선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이제 아래에서 몇 가지 전제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첫 번째 전제 : 선과 악의 구분은 없다.

선과 악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추구하려는 목적이나 쟁취하려는 이익 등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나누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어느 한쪽으로 완전한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태주의 입장에서는 라여사가 나쁜 사람 같지만, 라여사의 입장에서는 고아에게 은혜를 베푼 성자 같은 존재다. 또한 상현을 거두어 기른 눈먼 신부는 성자 같지만 상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욕망에 눈이 먼 사람으로 죽어도 싼 나쁜 인간이다.


선의 입장에서 보면 악이 감옥이고, 악의 입장에서 보면 선이 감옥이 되는 논리가 바로 이 영화에서 감독이 펼치고자 하는 것이 되고, 그러한 혼돈의 상태가 개념적으로 나타난 명칭이 바로 “박쥐”라는 제목이 된다.   


두 번째 전제 : 성(聖)과 속(俗)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물현상 속에 함께 존재한다.

성스러운 세상인 신의 세계와 속된 세상인 인간의 세계는 하늘과 땅이라는 서로 다른 공간에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존재, 하나의 사물현상 속에 성과 속은 함께 존재한다. 성스러운 것이 커지면 속된 것이 줄어들고, 속된 것이 커지면 성스러운 것이 줄어든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 상현이나 태주가 감옥이나 지옥으로 보고 있는 공간은 라여사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공간으로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상현과 눈먼 신부와 수녀 간호부가 있는 곳 역시 그렇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마지막을 맞는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안식을 주어 하나님께 돌려보내는 성스러운 곳이지만 상현과 눈먼 신부와 간호부에게 있어서는 괴로움의 공간이고 탈출하고 싶은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 속은 늘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구분해서 생각할 수조차 없다.


세 번째 전제 : 물과 불은 상극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 볼 때 물과 물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상극인 존재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물과 물은 상극이 아니다. 물은 생명체의 먹이로, 불은 생명체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으로 되면서 상호보완적이다.

 

그러한 물과 불은 피를 통해 하나로 합쳐진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서 다른 것으로 거듭나게 만든다. 불에 의해 거듭난 존재는 푸른색의 물을 흡수하여 불과 같은 색깔을 가진 피를 만들고 그것을 먹으면서 생존한다. 그리고 피를 잃은 존재는 다시 태워져서 물로 돌아간다. 영화에서 강우의 물, 상현의 불, 태주의 피는 모두 불과 물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네 번째 전제 : 피는 세상을 구하는 보혈이기 전에 자원으로서의 먹잇감이다.

피는 물과 불이 합쳐진 존재다. 물은 자원으로서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불은 모든 것을 태워서 거듭나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불은 우주의 모든 존재에게 형태를 바꾸게 하여 새로운 것으로 거듭나게 만든다. 물은 그러한 존재의 속에 들어가 그것의 먹이가 되어 피로 거듭나면서 살아있음을 가능하게 한다. 


 불에 의해 만들어진 모양과 물에 의해 만들어진 살아있음이 합쳐지는 그곳에 바로 피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피는 물과 같은 먹잇감이기는 하지만 형태를 바꾸려는 욕망을 가진 불이 가진 붉은 색을 띤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물과 불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다른 생명체의 피를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피가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장 중요한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많은 동물의 피를 필요로 하여 그것을 먹으면서도 자신의 피는 다른 존재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피 역시 불과 물이 하나로 합쳐진 먹잇감일 뿐이다.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이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박쥐다. 다음으로는 사제이면서 인간을 사랑하는 상현, 탈출의 목적으로 사제를 사랑하는 태주가 있다. 태주를 길러준 라여사와 병으로 시달리는 그녀의 아들인 강우, 상현을 길러준 눈먼 신부 등이 그 뒤를 잇는 캐릭터다.


1. 박쥐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박쥐는 양면성을 가진 존재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동물이면서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의 대명사다. 얼핏 보아서는 영화에서 지칭하는 박쥐는 상현과 태주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박쥐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현과 태주는 세상을 파괴하면서 인간의 피를 빨아 먹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박쥐인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다른 인물은 왜 박쥐인가?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들 모두 스스로의 관점과 이익에 의해 상대의 피를 빨아먹는 짓을 서슴지 않고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눈먼 신부는 눈을 떠서 세상을 보려는 욕심에 상현에게 피를 좀 나누어달라고 한다. 이것은 결코 성직자의 마음 자세가 아니다. 라여사는 버려진 태주를 키우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지만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캐릭터다.


라여사의 아들 강우는 친구를 아끼고 사람을 잘 믿는 것처럼 나오지만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존재다. 나머지 인물들도 모두 이러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대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박쥐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각각의 자리에서 우주의 자원이 되며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존재인 상대의 것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사람의 피를 빨아 먹으면서 살아가는 상현이나 태주와 다를 바가 없는 박쥐같은 존재다.


그렇다면 감독은 모든 캐릭터를 박쥐처럼 만들어서 무엇을 얻으려고 했으며,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박쥐같은 이중성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그들 속에 바로 사랑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 피

여기에 등장하는 피 역시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지독한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지이며 동시에 끝없는 갈증을 유발하는 최고의 먹잇감이라는 사실이다.


오염되지 않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피는 흡혈귀의 갈증을 풀어주고, 바이러스를 물리치는 존재이면서 세상을 구하는 보혈로서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 피는 단기적으로는 흡혈귀에게 먹히는 먹잇감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모여 그들에게 구원을 안겨주는 보혈의 피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피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물을 만나야 하는데, 강우가 물에 빠져 죽음으로서 상현과 태주의 사랑을 이루게 하고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불에 의해 태워진 그들을 핏빛의 바닷물로 만듦으로서 완성한다. 피에 대한 해석은 상현, 태주, 라여사, 강우의 성격에 대한 설명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3. 라여사

이 영화에서 라여사는 타락한 성모마리아로 그려진다. 라여사는 한편으로는 세상의 중심에 인간의 모습으로 있으면서 세상을 구할 아들을 낳은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세상은 그녀가 제시한 행복한 공간을 통해 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그녀가 낳은 바보 같은 아들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인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그녀의 행동은 별 문제없이 살아왔던 가정이라는 공간을 파괴하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지만 그것으로 인해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인 욕심과 이기심, 헛된 욕망 등이 모두 세상을 구원할 필요악의 존재가 된다. 그녀가 지니고 있는 이런 점들이 바로 세상의 사람들을 일정한 관계 속에 얽어매도록 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아들과 함께 흘린 사람들의 피를 통해 세상을 구원한다.


4. 상현

표면은 성스런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이면은 인간의 욕망을 지닌 상현은 흡혈귀가 되면서 속된 본질이 성스런 본질을 밀어내면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제로서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다.


그는 될 수 있으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 피를 빨아먹는 방법을 개발하여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해나간다. 또한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피를 빨아 먹히는 상대의 심정을 대변하는 그런 발언을 자주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동은 친구(강우)의 아내인 태주를 만나면서 철저하게 무너진다. 자신이 살고 있는 가정을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태주를 사랑하게 된 상현은 처음에는 그녀를 그곳에서 구해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점차 그녀의 유혹이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러나 상현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버려도 좋다는 각오를 한다. 세상을 바이러스로부터 구할 백신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자신의 안에 사랑이라는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상현이라는 캐릭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박쥐며, 그가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갈증이어서 자원 고갈로부터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백신이 된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상현은 태주와 함께 다른 형태로의 변신을 결심하게 된다. 


5. 태주

스스로가 처한 상태를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어설픈 박쥐다. 그녀는 어설픈 박쥐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이데올로기도 없는 상태에서 아껴서 먹어야할 자원을 순식간에 고갈시켜 버리는 존재가 바로 그녀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있어서 진정한 사랑은 개에게나 던져줘도 좋은 일회용 먹이에 불과하다. 그녀가 가진 갈증은 세상과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욕망에 불과하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갈증이라는 본능에만 충실하기 때문에 상대를 죽이지 않고 아껴가면서 오래 오래 피를 빨아먹을 궁리 같은 것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피에 대한 갈증이 오면 두 날을 가지고 있는 쪽칼로 상대를 찔러 피를 먹는다.


두 개의 날을 가진 쪽칼로 하나의 구멍을 내서 피를 먹는 그녀의 행위는 어설프게 둘로 나누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로 합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생산과 소비가 적절하게 돌아가야 하는 우주의 원리 같은 것은 그녀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오직 먹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그녀 앞에는 살인과 흡혈 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당연히 상현과 갈등을 빚게 되고 세상을 구원을 위해 상현의 결심을 앞당기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강우의 처이기도 한 태주는 강우라는 물의 존재와 상현이라는 불의 존재를 아우르는 역할을 하는 캐릭터로 강우와 상현에 의해 세상이 구원받도록 하는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보조 역할을 하는 인물이 된다.


6. 강우

그는 타고난 약골로 고치기 어려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이 물과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다. 자신의 집에 모이는 사람들의 도박판은 수요일에 열리고, 뜨거운 물이 들어 있는 찜질팩을 언제나 끼고 있으며, 물침대에서 잠을 잔다. 모든 것이 물과 관련을 지니고 있는 그는 태주와 상현에 의해 물에 빠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뒤에도 물을 통해서 상현과 태주를 위협하는 그런 존재다.


물은 먹잇감이 되어 자신을 죽임으로서 형태를 지닌 사물현상에게 생명을 주는데, 자신을 죽임으로서 자신의 피로 세상을 구하는 그리스도 같은 존재가 바로 강우이기 때문에 이렇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물이 없으면 생명도 없고, 강우가 없으면 구원도 없다는 메시지가 바로 이 캐릭터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의 성격을 지닌 강우가 아무리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불을 만나지 못하면 안되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인 존재로 상현이 등장하고 두 사람은 원래 친구사이였던 것이 밝혀진다.


자신을 버림으로서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구원자로서의 강우는 현재는 물의 세계에 갇혀 있으나 잠재적으로는 불을 지니고 있는 태주라는 캐릭터를 통해 친구를 유혹하게 되고, 그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은 태주를 더욱 자극하여 파괴를 일삼도록 하지만 그것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그녀를 구원으로 인도하게 된다.    


7. 경찰관 승대와 도박꾼인 영두, 눈먼 신부, 버림받은 환자들

경찰관과 도박꾼 남자는 모두 강우와 라여사의 주변에 맴돌면서 자신들의 욕심과 즐거움을 채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강우가 죽은 후에 태주에 의해 살해되어 피를 빨리는 존재들이다.


얼핏 보아서는 주변 인물처럼 보이지만 강우의 양 옆에서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로 죄가 많은 존재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사형 당함으로서 죄 사함을 받는 두 강도와 비슷한 존재가 그들이다. 그들이 흘리고 태주에게 빨린 피가 합쳐져서 세상을 구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됨으로서 결국에는 세상을 구하는 것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상현을 키워준 눈먼 신부와 상현에게 강간을 당하는 버림받은 집단의 여자는 모두 상현에게 깨달음을 주는 존재로 그들의 죽음과 강간당하는 행위는 모두 상현으로 하여금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결단을 앞당기도록 하는 촉매제가 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을 살펴보자.


감독이 밝힌 바에 의하면 이 영화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의 소재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의 줄거리나 전개방식, 인물캐릭터의 성격 등이 소설과 거의 비슷하지만 작품을 통해 말하려고 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졸라의 소설은 치정과 파멸을 그리고 있지만 ‘박쥐’는 사랑과 구원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구원을 말하기 위해 감독은 졸라의 소설에는 없는 종교와 신부를 작품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 지금부터 영화를 따라가 보자.


성스러운 공간에서 힘들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하던 사제인 상현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바이러스 백신의 실험대상이 된다. ‘이브’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뻔 했지만 피를 수혈 받은 후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붕대감은 성자’로 추앙받으면서 사람들을 인도하는 성자가 되지만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다시 병이 생기는 이상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한편으로는 성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흡혈귀인 상태로 지내던 그는 과거에 친구였던 강우의 집에 초대되었다가 태주를 만나면서 피에 대한 굶주림 이상으로 강력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상현이 사제로 있을 때도 사랑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으나 신분적 한계로 인해 몽둥이로 자신을 때려가면서 눌러놓았던 것이 터진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은 태주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고아로 길러져 강우의 부인이 되면서 타오르는 욕망을 견디지 못해 허벅지를 칼로 찌르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하나 있으니 상현과 강우와 태주가 갖는 관계와 작품 안에서 이들이 갖는 캐릭터적 성격이다. 우선 상현과 강우는 친구 사이이고 헤어져 살던 이들을 이어주는 존재가 바로 태주다.


태주는 강우와 부부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상현과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부부로 연결된 태주는 물처럼 차갑고 창백한 캐릭터다. 그리고 사랑으로 상현과 연결된 태주는 불처럼 뜨겁고 건강한 캐릭터다.


그런 점에서 강우는 물이고, 상현은 불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물과 불은 상극인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을 바꾸고 구원하는 주체가 되는 존재들이다. 상현과 강우가 바로 그런 캐릭터인 것이다.


조용한 성격에다가 힘이 없으며, 거의 움직임이 없는 강우는 물을 상징하고, 공중을 날아다니고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피를 먹어야 하는 상현은 불을 상징하며, 그들이 힘을 합칠 때 비로소 세상에 대한 구원을 성공시킬 수 있다.


 물은 다른 존재에게 먹혀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고, 불은 다른 존재를 태워야 생명을 가질 수 있는 형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강우는 태주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고, 상현은 태주를 태워야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강우는 보혈의 피를 흘려 세상을 구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이고, 상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도와주기 위해 그를 죽여주는 본디오 빌라도 같은 존재다. 이 둘은 반드시 만나야 하는데, 이들을 만나게 하는 매개자가 바로 어머니인 라여사와 강우의 부인인 태주다.


라여사는 강우의 어머니이니 성모마리아가 된다. 그러나 라여사는 종교에서 말하는 거룩한 성모 마리아가 아니다. 감독에게 있어서 성스러움과 속된 것, 선과 악 등은 모두 존재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별 자체가 무의미하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라여사는 타락한 성모마리아가 되지만 현실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고아를 거두어 길러냈으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악바리 어머니에 불과하다. 태주 역시 자신을 길러준 라여사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 보다는 자신이 속한 가정을 지옥으로 규정하는 못된 여자에 불과하다. 다시 영화로 돌아 가보자.


태주를 죽도록 사랑하게 된 상현은 지금까지 성자로 추앙받으면서 살아온 자신의 삶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서서히 깨달아 간다. 반면 태주는 상현을 통해 배운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의 세계에서 느끼는 쾌감 때문에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사람을 죽여 피를 빨아먹는다.


언젠가는 모든 사람들이 죽어 자신이 빨아먹을 피 조차 없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인을 하고 흡혈을 하는 태주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마구 훼손하면서 자원을 고갈시키는 인간의 개발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되자 태주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자원 고갈을 걱정한 상현은 그녀와 갈등을 빚게 되고 둘 사이는 점점 이상한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태주에 대한 사랑은 이제 멈출 수 없는 상태에 와 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세상을 구할 결심을 점점 앞당기게 된다.


이때부터 상현은 자신은 신부가 아니며, 아주 못된 인간임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자신을 키워준 눈먼 신부를 송곳으로 찔러서 피를 빨아먹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을 강제로 추행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상현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면서 사랑을 통해 세상을 구하려는 구원의 행위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은 상현의 이러한 행동에 굉장히 신경을 써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너무 신경을 써서 묘사하다보니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자신의 의도를 혹시나 관객이 알아보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 앞서게 되었고, 그 결과 너무 앞질러간 묘사가 등장하게 되었으니 상현의 성기 노출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천막 안에서 여자를 강간하는 상현의 벗은 엉덩이만 보여줘도 관객은 감독의 의도를 충분히 알고도 남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의 욕망에 충실하며 자신의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라여사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행복으로 가득한 오아시스처럼 꾸미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아들을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볼 수 있을까 욕심으로 모셔온 ‘붕대감은 성자’인 상현에 의해 아들과 자신의 친구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타락한 성모마리아인 라여사는 아들이 살해당했고, 이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상현과 태주의 음모를 밝히려고 애쓰는데, 그녀의 이런 행동이 죽은 아들을 살림과 동시에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란 점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친구들인 승대와 영두도 태주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데, 이들의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두 명의 강도와 비슷한 의미로 나타난다. 세상에 대한 별다른 생각이나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 않은 그들이었지만 강우와 라여사와 함께 있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구원하는 강우와 상현의 행동에 일정한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려고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악할 수 있다. 하나는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이다. 구원은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사물현상들이 각자가 지니고 있는 독립적인 세계를 서로 인정하는 것이고, 사랑은 그것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는 사실이다.


죽어서 다른 존재에게 먹힘으로 해서 세상을 구하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스스로를 태워서 다른 형태로 거듭나게 함으로서 세상을 구하는 존재가 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 동안 복수 시리즈로 일관해왔던 제작 패턴을 한 단계 승화시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박쥐’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욕망 중 파괴적인 측면보다는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통해 구원이라는 해결방식을 부각시키면서 예술성 있는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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