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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인도’를 보기위한 특수한 관점

by 竹溪(죽계) 2008.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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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인도’를 보기위한 특수한 관점

 

영화 ‘미인도’는 조선후기의 천재화가였던 김홍도와 신윤복을 둘러싼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갈등과 투쟁으로 얼룩진 스토리도 없고, 주인공들의 처절하거나 애절한 사랑도 없으며, 그렇다고 그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는 것도 없다. 그렇다고 외설에 가까울 정도로 노출이 심한 것도 아니다.

 

 

그저 조선 후기에 남장여자로 살다 간 천재화가의 슬픔을 단편적으로 나타낸 아주 단순한 작품으로 보인다. 필자가 영화를 보면서 예상했던 대로 끝나고 나오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대체로, 짜증난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 원작과 너무 차이가 난다. 완전히 낚였다. 등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그런지 시네21이라는 영화잡지에 소개된 글도 일반 관람객의 불만 섞인 목소리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영화는 신윤복과 김홍도의 작품에 숨겨진 사연을 상상하는 데 인색하다. <단오풍정> <이부탐춘> <서당도> <씨름도> 등 영화에 등장하는 그들의 그림은 오로지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을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비가 남장을 시켜서 궁에 들여보낼 정도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진 윤복의 재능을 드러내는 부분도 인색하긴 마찬가지. 팩션으로서의 흥미로움을 드러내는 대신 <미인도>는 한 여장남자를 둘러싼 남자들의 욕망이 부대끼는 갈등을 그려냈다. 하지만 폭력적인 섹스로 나타나는 김홍도의 윤복을 향한 집착이 그의 슬픈 사랑을 대변하는 것도 어색할뿐더러 그런 홍도에게 몸을 던지는 윤복의 행동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나타냈다.

 

구성도 탄탄하지 못한 것 같고, 화끈한 애로 장면도 별로 없으며, 원작과도 동떨어졌다는 느낌을 주는 이런 영화를 감독은 과연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일까? 그리고 그런 영화를 보는 우리는 과연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일반 관람객이나 영화를 소개하는 기자가 쓴 것처럼 이 영화는 어색하고 무리한 설정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보는 영화에 비해서 그렇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즐기는 스토리 중심이나 애로 중심 혹은 스피드나 액션 중심의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영화를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영화에서 그림의 남장 여인이라는 주인공의 설정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림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 영화를 다시 보면 지루하고 재미없었던 장면들이 아주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과 그림이 의미하는 바는 둘로 나누어진 세상을 하나로 통합하는 매개체가 그림이고, 그러한 이상(理想)을 실현하려는 사람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둘로 나누어져 대립하고 갈등한다. 남과 여로 나누어져 있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억압의 윤리와 발산의 본능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두 개로 나누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가 대립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옳으면 어느 한쪽은 반드시 옳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이제 영화를 보자. 우선 주인공을 둘러싼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 지배층과 피지배층, 신성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이 아주 확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버지가 그렇고, 왕이 그러하며, 스승인 김홍도가 그러하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누고 그것을 통해 어느 한편에 서서 다른 한편을 억압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윤리에 맞지 않으면 모든 것이 범죄가 되고, 도덕에 맞지 않으면 음란이 되는 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주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도 윤리도덕에 맞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궁중의 화원이 그렇고, 스승인 김홍도와 아버지가 그렇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욕망은 원래부터 윤리나 도덕을 기준으로 하여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주인공은 갈등을 겪는다.

 

 

주인공인 신윤복은 사실은 신윤복이 아닌 그의 누이동생이다. 여성의 몸으로 남성인 오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주인공이다. 주인공의 이런 설정에서 이미 커다란 복선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이면서 남장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 주인공이야말로 둘로 나누어진 세상을 원래의 상태인 하나로 합치려는 존재로 설정되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연 때문에 주인공은 자신들의 그림이 높은 수준의 것이라고 믿는 아버지를 따라 화원이 되어 둘로 나누어진 한쪽의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노른자와 흰자를 같은 껍질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의 우주를 품고 있는 달걀 같은 존재가 바로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둘로 나누어진 이러한 굴레를 견뎌낼 수 없다.

 

나누어지기 전의 원초적인 상태를 지향하는 주인공의 마음은 껍데기는 궁중의 화원이었지만 일반인들이 사는 세상의 것들을 그리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양반들과 화원들 사이에 철저하게 금기시 되어 있는 속화(俗畵)를 그리는 행위였다.

 

“사랑하기 때문에 유혹하고 흔들리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 아름다워서 그렸다"는 신윤복의 그림들은 결국 큰 문제를 일으키고 기득권 세력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그림이 추구하는 합일된 세계로의 지향을 이루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원초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강무를 만나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나가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금기일 수밖에 없었고 둘로 나누어진 세상의 윤리 속에서 살아가는 스승인 김홍도에 의해 주인공의 시도는 처절하게 파괴된다. 그가 그토록 꿈꾸고 갈망했던 하나로 된 완전한 세계는 현실 어디에서도 이루는 것이 불가능했다. 폭력과 음모가 판치는 둘로 나누어진 세상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주인공이 지향하는 바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림을 통해서만 하나로 합일된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스승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었던 세상에 보답하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나로 합일된 모습으로 돌아갔던 여자의 옷을 입고 즐거워했던 상태의 모습을 자신의 붓으로 직접 그린 ‘미인도’를 남기고 강물로 뛰어든다.

 

이 ‘미인도’는 신윤복의 자화상이기는 하지만 자화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신윤복이란 이름의 남자로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림 속의 미인은 둘로 나누어진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자신의 모습이면서 다른 한쪽인 신윤복이라는 남자 화가의 손에 의해 완성된 존재로 이중성을 하나로 합친 존재가 된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누이동생인 주인공이 오빠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면서 여성과 남성이 하나로 합쳐지는 설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원한과 폭력을 불러왔던 둘로 나누어진 세상이 그림을 통해 하나로 합쳐지면서 ‘미인도’라는 그림의 세계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개의 성이 하나로 합쳐 진 상태로 설정된 주인공의 캐릭터와 지배층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윤리도덕과 원초적 욕망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하나로 만들어서 합일시키려는 주인공의 시도가 ‘미인도’라는 한 장의 그림으로 승화한 것이 바로 영화 ‘미인도’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사용된 사진은 미인도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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