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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의세계/황진이

[스크랩]황진이와 서경덕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by 竹溪(죽계) 2006.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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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블로그 > 헌책에서 풍겨나오는 커피, 초컬릿, 담배 향이 좋다
원본 http://blog.naver.com/seoulpal/30189908
 
 

 

 

황진이의 초상화 

 

황진이의 남자 - 서경덕                *개그맨 서경석이 아니예요.

 

서경덕(1489~1546) 대학자. 진실한 사랑, 송도삼절, 스승과 제자.서화담은 당시 과거에 합격하고도 부패한 조정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마다하고 일생을 학문만 벗삼던 학자였다


서경덕이 죽고 난 후 황진이는 서경덕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고 한다.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묘향산을 막론하고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나이도 서른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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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에 진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여자치고는 뜻이 크고 기개가 높아 사내 대장부에 못지 않았다.

진이는 일찍이 화담처사 서경덕이 고답적인 인사로서 벼슬에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학문의 깊이와 정통함이 뛰어났다는 말을 듣고 한 번 시험해 볼 생각이 일어났다.


그래서 선비처럼 끈으로 허리를 졸라매고 《대학(大學)》을 옆에 끼고 서경덕을 찾아갔다.

『첩이 듣자오니,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남자는 가죽띠를 두르고 여자는 실끈으로 띠를 한다고 합니다. 첩도 배우에 뜻이 있어 실로 띠를 두르고 찾아왔습니다.』선생은 웃고 받아들여 가르쳤다.


진이는 밤만 되면 몸을 가까이 기대는 등 교태를 부리면서, 마치 옛날 마등가의 음탕한 여인이 아란을 유혹하듯 며칠을 두고 수작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서화담은 끝내 동요하지 않았다


조선 중종 때의 유명한 도학자이다.

1489년에 태어난 그는 18세 때에 <대학>을 배우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명확히 함, 혹은 자기 마음을 바로잡고 선천적인 좋은 지식을 갈고 닦음)'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원리에 의지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과거 시험에는 뜻이 없었다. 그

러나 어머니의 명령으로 사마시(司馬試 생원과 진사를 뽑는 작은 규모의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했을 뿐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로지 도학에만 전념하였다.

집은 극히 가난하여 며칠 동안 굶주려도 태연자약하였으며, 제자들의 학문이 진취된 것을 볼 때에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평생을 산림 속에 은거하여 산 것을 볼 때에는 세상에 대한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정치의 잘못을 들을 때에는 개탄함을 금하지 못해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했다고 한다.


이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다.

자연히 그의 인물됨이 인근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은 모양이었다. 벽계수와 지족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황진이는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한 모양이었다.

지족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서경덕에게 옮겼다.

하얀 속치마 저고리, 그 위에 흘러내린 비. 비에 젖은 하얀 비단 속옷이 알몸에 밀착되어 가뜩이나 요염한 기녀의 몸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차림으로 계속 비를 맞으며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던 초당으로 들어갔다. 물론 서경덕 혼자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서경덕은 지족과 달랐던 모양이었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오히려 황진이를 반갑게 맞이했고,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아예 황진이의 옷을 홀딱 벗긴 모양이었다.

옷을 벗기고는 직접 물기를 닦아주는 서경덕의 자세에 오히려 황진이가 부끄러울 판이었다.

그래도 황진이는

"저도 사내인 것을……"

하며 은근히 오기를 가졌던 모양이었다.


황진이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서경덕은 마른 이부자리를 펴 황진이를 눕히고는 몸을 말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꼿꼿한 자세로 글읽기를 계속했다.

날은 어두워졌고 이윽고 밤이 깊었다.

황진이가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삼경쯤 되자 이윽고 서경덕이 황진이 옆에 누웠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이내 가볍게 코까지 골며 편안하게 꿈나라로 가버리는 서경덕.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떴을 때 서경덕은 이미 일어나 밥까지 차린 모양이었다.


대충 말린 옷을 입고는 부끄러워서라도 황진이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며칠 후. 황진이는 성거산을 다시 찾았다.

물론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음식을 장만하여 서경덕을 찾아갔다.

역시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이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고, 방 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는 뜻을 밝혔다.

빙그레 웃는 서경덕. 이 후의 일은 상상을 할 수 있다.


어느 야사에도 서경덕이 황진이와 놀아났다는 기록은 없다.

둘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흠모 혹은 존경이라는 단어뿐이다.

황진이가 문득 서경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서경덕이 황진이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이십니다.>

서경덕이 미소를 지으며 셋째를 물었다.

<바로 저올시다.>


송도에 있는 것 중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세 가지 혹은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송도삼절(松都三絶)은 그렇게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다.

서경덕도 동감이나 하는 듯이 소리 없는 미소만 지었다고 한다


서경덕이 아무리 도학자이고 뛰어난 사상가라고는 하나 당시의 신분으로 보면 양반이요, 그도 역시 사내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을 했고 첩까지 두었다.

그리고 여자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와의 관계는 왜 그렇게 아름답고 순수했을까. 이는 황진이도 마찬가지였다.

서경덕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스승을 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지 사내로서의 서경덕이 아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이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그가 남긴 시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마음이 어린 후(後)ㅣ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내 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 일마다 모두 어리석다,

만겹으로 구름이 둘러싸인 성거산에 어느 누가 나를 찾아오겠는가,

그런데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혹시 그녀가 왔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본다.


대충 그런 뜻이다


조선조의 벼슬아치나 유학자들이 임금을 생각하며 일반적으로 부르는 님이 아니다.

서경덕의 시조에서는 분명 여인을 그리는 남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현상이다.

서경덕이 이 시조를 부를 때에 누군가가(마당을 쓸던 하인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다) 들었던 모양이다. 그대로 황진이에게 전해졌다.


황진이는 어땠는가.

그녀 역시 비록 스승으로 서경덕을 모시고는 있지만 끔찍이도 그를 사모했던 모양이다.

서경덕이 부른 시조에 곧바로 화답한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닢 소래야 낸들 어이 하리오


내가 언제 신의도 없이 님을 속였겠는가,

절대 그런 일이 없다,

그런데 달 밝은 깊은 밤에 무기력하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없다,

즉 허전하다, 가을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내가 어쩌겠는가.

이런 뜻이다.


분명 서경덕의 시조 종장에 대한 답이다.

나도 당신이 그리운 것을, 당신이 나를 그리며 나뭇잎 소리를 내 발걸음 소리로 착각하는 것까지 내가 어쩔 수 있겠는가,

뭐 그런 뜻이다.

그만큼 나도 당신이 보고 싶다는 말이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못니저 우러 예어 가는고


-서화담은 당시 과거에 합격하고도 부패한 조정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마다하고 일생을 학문만 벗삼던 학자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황진이가 높이 사모했지만 어떤 마음도 주지 않아 황진이의 애간장을 태웠던 것입니다. 끝내는 스승과 제자관계로 지내게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지고한 정신적 사랑만 나누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서화담이 황진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부녀지간과도 같은 많은 나이 차 때문이었다고 전합니다. ( 31살 정도 많아요 )

다시 말해 요즘의 원조교제 같은 것을 명예를 생명으로 아는 대쪽같은 선비로서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황진이가 찾아와도 시(詩) 놀이 이상 분위기가 되면 홀연히 자리를 뜨고 해서 명월이 애간장을 타게 했는데- 결국 황진이는 그러한 화담선생의 야속한 마음과 그리움을 시조로 읊게 된 것입니다.


-황진이는 평생 화담 서경덕을 흠모했다고 한다.

물론 처음에는 서경덕을 유혹하려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화담의 인물됨을 알아본 황진이는 책을 끼고 그를 찾아가 배우기까지 했으며, 그녀 스스로가 서화담과 박연폭포, 그리고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경덕의 문집에는 황진이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전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는 양반 사대부의 문집에 기생과의 교유를 기록한 예가 없어 그럴 수 있는 문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식소록󰡕의 저자인 허균의 아버지가 허엽(許曄)이며, 그가 화담에게 사사한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나는 황진이와 관련된 화담에 관한 내용은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황진이는 화담에게서 인간의 참모습, 우주의 진리 등을 배우고 깨달았다.

화담을 모시고 도학을 배운 후 그녀는 저항의 방향을 달리했다.

황진이도 도학자가 된 것이다.

화담의 도학은 '기일원론'으로 모든 사물이 기작용에 의해 생성. 발전한다는 것이다.

황진이가 이를 터득할 무렵 화담이 세상을 떠났다.

(진이 27세 때 57년을 살다 1546년에 감)


처음이자 마지막인 정인을 잃은 것이다.

화담 선생은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그녀는 화담의 발이 닿았던 곳, 곧 금강산. 속리산. 지리산을 찾아다녔다.

화담이 내디딘 발자취를 따라 운수행각을 한 것이다.


황진이는 세상의 모든 명리를 끊고 세상의 이목도 피해가면서 지팡이와 짚신을 벗 삼아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이것은 단순한 유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결국 화담의 곁으로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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