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黃眞伊) 16세기
송도에 이름난 창기가 있었는데 진이(眞伊)라고 하였다. 꽃 같은 용모에 달 같은 자태로 거문고를 잘 뜯고 노래를 잘 하였는데 고고하게 산수 사이를 노닐었다.
화담 서경덕(1489-1546)이 고상하게 행실을 지킨다는 소문을 듣고는 시험하고 싶어 하루는 실띠를 매고 대학을 옆에 끼고 찾아가 배알하였다.
말하기를, “저는 들으니 예기에 ‘남자는 가죽 띠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맨다’ 하였기에, 제가 비록 여자이나 배움에 뜻이 있어 실띠를 매고 왔습니다.
원컨대, 가르침을 받들고 싶습니다.”하니, 화담이 웃으며 가르쳐 주었다. 진이가 밤을 타서 유혹하기를 마등이 아난존자를 유혹하듯 하였으나, 며칠이 되도록 화담은 끝내 동요하지 않았다.
진이가 물러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늙은 지족 스님의 삼십 년 면벽수도도 나에게 무너졌는데, 오직 화담선생만은 유혹하기를 몇 달을 하였는데도 끝내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聖人)이다.”라고 하였다.
(夢遊野談) 32-1쪽
화담 서경덕이 지은 시조에,
마음이 어린 후(後)ㅣ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내 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마음이 어리석은 뒤이니 하는 일이 모두 어리석다
첩첩이 구름 쌓인 산에 어느 님에 오랴만은
지나가는 잎과 부는 바람 소리에 행여 님인가 하노라)
라는 작품이 있다.
이 시조는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서화담이 황진이를 그리워하면서 지은 작품이라고 한다.
그 시조에 대해 황진이가 화답하기를,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닢 소래야 낸들 어이 하리오
(내가 언제 신의가 없어서 님을 언제 속였길래
달이 지는 한밤중에 온 자취가 전혀 없구나
가을 바람에 지나가는 잎 소리를 나인들 어찌 하리오)
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크다.
서경덕(徐敬德)
1489(성종 20)∼1546(명종 1). 조선 중기의 학자.
〔생 애〕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 또는 화담(花潭). 부위(副尉) 호번(好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어머니가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그를 낳았다 한다. 나이 7∼8세에 이르자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른의 말을 공경히 받들었다.
1502년(14세)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日)·월(月) 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18세 때 ≪대학≫의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조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 날마다 궁구(窮究)하기를 힘썼다. 19세에 태안 이씨(泰安李氏) 선교랑(宣敎郎) 계종(繼從)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31세 때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더욱 힘썼다. 1531년(중종 26)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더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1544년 김안국(金安國) 등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러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중종과 인종이 죽자 “임금의 상(喪)에 어찌 복(服)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자최삼월(齊衰三月)의 복을 입었다.
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朴淵瀑布)·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송대의 주돈이(周敦蓬)·소옹(邵雍) 및 장재(張載)의 철학사상을 조화시켜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학설을 제창하였다.
〔학 설〕〈태허설 太虛說〉에서 우주공간에 충만하여 있는 원기(原氣)를 형이상학적인 대상으로 삼고, 그 기(氣)의 본질을 태허라 하였다. 기의 본질인 태허는 맑고 형체가 없는 것으로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는 한정이 없고 그에 앞서서 아무런 시초도 없으며, 그 유래는 추궁할 수도 없다. 맑게 비어 있고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이 기의 근원이다.
널리 가득 차 한계의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꽉 차 있어 비거나 빠진 데가 없으니 한 털끝만큼의 용납될 틈이 없다. 그렇지만 오히려 실재(實在)하니, 이것을 ‘무(無)’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변화하는 기의 율동(律動)이다.
바람처럼 파도처럼 또 소나기처럼 밀리고 맥박 치는 생(生)과 구름처럼 물방울처럼 사라지는 멸(滅)의 본체가 무엇이냐? 부침하고 율동(律動)하는 태허기(太虛氣)의 고탕(鼓晏)이다.
따라서 서경덕의 기는 우주를 포함하고도 남는 무한량(無限量)한 것이며, 가득 차 있어 빈틈이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이며,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만물을 생성할 수 있으므로, 그것 이외에 어떤 원인(原因)이나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기(氣)는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은 하지만 기 그 자체를 소멸하지 않는다. 기가 한데로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물건이 소멸한다. 이를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다시 물로 환원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서경덕은 “일편향촉(一片香燭)의 기라도 그것이 눈앞에 흩어지는 것을 보지만, 그 남은 기운은 마침내 흩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물리학에서 밝히고 있는 에너지 항존율(恒存律)과 같은 서경덕의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인 것이다.
이기설의 입장을 밝힘에 있어서 그는 “기 밖에 이가 없다. 이란 기의 주재(主宰)이다. 주재란 것은 밖에서 기를 주재하는 것이 아니요, 기의 움직임이 그러한 까닭에 정당성을 가리켜 이것을 주재라 한다. 이는 기보다 선행할 수 없다. 기는 본래 무시(無始)한 것이니, 이도 본래 무시한 것이다.
만일, 이가 기보다 선행한다고 하면 이것은 기가 유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서경덕이 이를 기 속에 포함시켜 둘로 보지 않는 견해로서 기일원론인 것이다.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함으로써 “만물은 모두가 잠시 기탁한 것 같으니, 떴다 가라앉았다 함도 일기(一氣) 가운데요, 구름 생길 때 그 자취를 보거니, 얼음 풀린 뒤 그 자취 찾아도 없더라. 낮과 밤은 밝았다 어두웠다 하지만, 원(元)과 정(貞)도 시작했다 또 끝났다 한다.
진실로 이러한 이를 밝게 안다면 장구치면서 우리 님을 보내오리다.”라고 주장하여 불교의 인간생명이 적멸(寂滅)한다는 주장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서경덕의 학문과 사상은 이황(李滉)과 이이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독창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한국 기철학(氣哲學)의 학맥(學脈)을 형성하게 되었다.
15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 1585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으며, 그의 사상적인 면모를 밝혀 주는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의 대표적인 글을 수록하고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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