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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비사육신관련/금성대군

연려실기술 금성대군기록(정난에죽은 여러 신하)

by 竹溪(죽계) 2006.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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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금성대군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데, 을해에 삭녕(朔寧)으로 귀양갔다가 병자에 순흥(順興)에 안치되었고, 정축에 화를 입었다. 뒤에 신원하였고,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다.

○ 을해년(1455)에 대신들이 말하기를, “공이 난을 음모하여 한남군(漢南君) 어()ㆍ영풍군(永豊君) 선(瑔)ㆍ영양위(寧陽尉)정종(鄭悰)과 더불어 서로 공모하였으니, 급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삭녕으로 귀양보냈다. 병자에 성삼문 등이 죽으매, 공을 순흥에 안치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 정축년(1457)에 순흥 부사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안동(安東) 옥에 갇히었다. 하루는 알몸으로 도망하였는데, 부중(府中)을 크게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한참만에 밖에서 들어오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무리는 많으나, 하잘 것 없구나. 내가 어찌 진실로 도망할 사람이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시다.”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죽음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릉지》


이보흠(李甫欽)


이보흠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대전(大田)이요,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세종 기유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박사를 지냈다. 정축에 순흥 부사(順興府使)가 되어 금성대군과 더불어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다.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다.

○ 공은 문장에 능하고 사무 처리에 재주가 있었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옷이 때묻고 떨어져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해동잡록》

○ 단종이 왕위를 내놓은 뒤에 공은 벼슬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글을 지어서 길주서(吉注書)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주무왕이 의거를 하매, 백이ㆍ숙제가 고사리를 수양산에서 캤고, 한 광무가 중흥하니, 엄자릉(嚴子陵)이 낚시를 부춘(富春)에 드리웠다.” 하였다. 《병자록》

○ 정축에 순흥 부사가 되었다. 금성대군 유가 순흥으로 귀양와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영남 인사들과 연결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다가 일이 발각되니 곤장을 때리고, 박천(博川)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뒤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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