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사육신관련/사육신기록

사육신 승정원일기고종10년 기록

by 竹溪(죽계) 2006. 9. 11.
728x90
SMALL
 

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 12)  2월 8일(정사) 맑음  좌목 

  

자경전에서 강관 이승보 등이 입시하여 《시전》을 진강하였다

○ 사시(巳時).

상이 자경전에 나아갔다. 진강하는 데에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강관 이승보, 참찬관 조병직, 시독관 박제성, 가주서 백규섭, 겸춘추 강병적, 별겸춘추 박용대가 각각 《시전》제6권을 가지고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상이 전에 배운 글을 한 번 외우고 나서 책을 폈다. 이승보가 ‘애재불능언(哀哉不能言)’부터 ‘우무정칠장(雨無正七章)’까지 읽고, 이어서 장구를 해석하였다. 이승보가 아뢰기를,

“일전에 성녕대군 양자의 일로 아뢴 것에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어 감히 이렇게 다시 진달합니다. 일전에 경연에서 물러난 후 《선원속보(璿源續譜)》를 자세히 살펴봤더니, 성녕대군이 14세에 요절한 후 태종(太宗)의 명으로 안평대군을 성녕대군의 후사로 세웠습니다. 안평대군이 육신의 옥사에서 화를 당한 뒤 다시 효령대군의 여섯째 아들 원천군을 성녕대군의 양자로 들였습니다. 성녕부인 성씨는 바로 성삼문의 종조부 성억(成抑)의 딸입니다. 성 부인은 비단 성씨이기 때문에 연좌된 것만은 아닙니다. 안평대군이 옥에 나아갔을 때 성 부인이 경계하기를,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면 의당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야 하느니라. 나는 염두에 두지 말라.’ 하였답니다. 이 때문에 경주부(慶州府)로 귀양가 4년을 지낸 뒤 용서받아 돌아왔습니다. 그 후의 생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혹자는 돌아오는 길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고도 합니다. 영종조에 와서야 신원이 되어 비로소 신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 부인의 묘소는 있느냐?”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 부인의 뜻과 의기가 매우 위대하다. 그의 혈손이 있어 제사를 받들게 된다면 좋겠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사체를 헤아려 볼 때, 안평대군이 이미 성 부인에게서 양육이 된데다가 그가 당한 일도 남다르니, 안평으로 그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신의 섭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대가 오래되어 각각 봉사손을 두었으니, 이제와서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평대군의 후사를 세운 것은 어느 때이며 딸은 낳았느냐?”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안평과 금성(錦城)은 당한 일이 같아서 안평의 사판을 금성의 사우에 함께 이봉하였는데, 근래 금성의 지파(支派)가 안평의 후사를 이어 비로소 각각 사우를 설치하여 봉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안평은 딸도 낳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평은 몇 살에 죄로 죽었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자, 박용대가 아뢰기를,

“21, 22세쯤의 일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신의 일은 병자년(1456, 세조2) 몇 월에 있었느냐?”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아마 4월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사가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안평 뒤에 또 금성의 일이 있어 그때 네 왕의 자손이 대부분 연좌가 되었는데, 영풍군(永豐君)도 그 당시에 있었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이때의 옥사에는 종실에서 연루된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신의 선조인 양녕대군(讓寧大君)도 체포되었는데, 양녕은 웃으면서, ‘내가 소싯적에도 덕 있는 사람에게 양보했었는데, 이제 백발의 나이에 무슨 다른 생각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 한 마디 말로 인해 마침내 옥에 갇힘을 면했다 하니, 이것이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녕은 진실로 우리나라의 태백(泰伯)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그때 당시 연세도 많았을 것이다.”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양녕이 갑술년(1394, 태조3) 생이니 병자년이면 63세가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녕이 개국 후에 태어났다면 어디서 출생했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양녕은 개국한 지 3년만에 태어났는데, 이때 이미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송도를 시어소(時御所)로 삼았기 때문에 양녕은 송도 수창궁(壽昌宮)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신의 자손 가운데 박씨만 후손이 있다면, 육신의 관향(貫鄕)은 다 어느 고을인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성삼문(成三問)은 창녕(昌寧), 박팽년(朴彭年)은 순천(順天), 하위지(河緯地)는 진주(晉州), 유성원(柳誠源)은 문화(文化), 유응부(兪應孚)는 기계(杞溪)이며, 이개(李塏)의 관향은 확실치 않습니다. 유응부는 무신이고 그 나머지 다섯 사람은 모두 집현전 학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박팽년의 자손 외에 그 나머지 다섯 사람은 모두 족성(族姓)이 있는가?”

하니, 이승보가 아뢰기를,

“그의 동성인은 다 있습니다.”

하였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