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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육신관련/사육신기록

사육신 승정원일기고종13년 기록

by 竹溪(죽계) 200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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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3년 병자(1876, 광서 2) 7월 13일(신미) 맑음 

 

 좌목

  

강녕전에서 시원임 대신 등을 인견할 때 우부승지 박용대 등이 입시하여 북관 육진의 백성들의 국경을 넘어가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 미시(未時).

상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갔다. 시원임 대신, 정부 당상의 인견에 입시할 때, 우부승지 박용대, 기사관 정원하(鄭元夏), 사변가주서 차기형(車驥衡), 기주관 백시흡(白時洽), 별겸춘추 조창하(趙昌夏), 영중추부사 김병학, 판중추부사 홍순목ㆍ박규수ㆍ이최응, 우의정 김병국, 정부 당상 신헌(申櫶)ㆍ김보현(金輔鉉)ㆍ이원명(李源命)ㆍ김익진(金翊鎭)ㆍ김유연(金有淵)ㆍ남정순(南廷順)ㆍ서당보(徐堂輔)ㆍ김병시(金炳始)ㆍ조영하(趙寧夏)ㆍ윤자승(尹滋承)ㆍ서승보(徐承輔)ㆍ조석여(曺錫輿)ㆍ김기석(金箕錫)ㆍ조희복(趙羲復), 교리 이석홍(李錫弘)이 차례로 나아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고, 이어 대신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이유원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서늘한 기운이 조금 생겼지만 날씨는 아직도 찌고 있는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한결같다고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침수와 수라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한결같다고 하였다. 이어 각전(各殿)에 문후(問候)를 하였다. 문후를 마치고 나자, 이유원이 아뢰기를,

“세자궁의 기후는 계속 태평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침으로 고생하고 있은 지 거의 한 달에 가깝지만 아직도 상태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

하고,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는 여름철에 흔히 있는 증상입니다. 가을 기운이 점차 생겨나면 저절로 며칠 안 되어 회복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관 육진(六鎭)의 백성들이 국경을 몰래 넘어가는 폐단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이번에 일본(日本) 이사관(理事官) 궁본소일(宮本小一)의 말까지 있었다. 이것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것인가? 필시 도신과 수령이 잘 안무하지 못해서 이렇게 된 것이리라. 익히 상의하여 조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경들을 부른 것이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10년 전 함경 감사에서 체직되어 와 입시했을 때, 북관에서 국경을 몰래 넘어가는 폐단 때문에 북병사를 구임시키고 육진의 수령을 잘 골라서 차임해야 한다고 연석(筵席)에서 아뢴 바가 있었는데, 이러한 폐단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조정이 북관에 대하여 항상 가엾게 여겨 돌보아 진념(軫念)하고 있는데, 근래 고을의 폐해와 민간에 끼치는 폐해가 갈수록 심해져서 신음하며 이산하는 백성이 거의 대열을 이룰 정도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러 크게 변통하고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는데, 무엇보다도 우선은 그들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고, 홍순목이 아뢰기를,

“육진은 함흥(咸興)과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관찰사가 두루 선양하는 교화가 미치지 못하여 거주민의 깊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은 정황이 보고되지 못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변통해야 한다는 논의가 많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육진은 본래 여진(女眞)의 땅이었는데 세종조(世宗朝) 때 개척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곳이 궁벽진 변방으로서 토지가 거칠고 춥기 때문에 내지(內地)의 백성을 많이 이주시켜 채우면서 불쌍히 여겨 돌봐주고 안정시켰는데 최고의 대책을 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진념하는 것이 다른 지역보다 특별하였는데, 근래에는 안심하고 생활할 수 없어 국경을 넘어가 유리하는 폐단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된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인데, 상께서 그 폐단이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그리고 민정이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이 되었는가를 깊이 연구해보신다면 어찌 조처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고, 이최응이 아뢰기를,


“북관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왕의 덕화(德化)가 미치지 못하고, 조정에서 관찰사와 수령을 잘 가려 차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티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왕의 명을 백성들에게 펼쳐 왕의 은혜로운 덕화를 널리 펴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폐단이 있게 된 것입니다. 국경을 넘어가는 자에 대해서 말한다면 반드시 참을 수 없이 억울하고 고통스런 일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국법을 어기고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즐겨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더욱 진념하시어 덕택을 널리 베푸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먼 지방의 백성들은 고을의 수령을 잘 만나지 못하면 비록 견디기 어려운 폐단과 지극히 괴로운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북도의 병사에게 하소연하고자 하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자기들의 임무가 아니라고 핑계 대며, 함흥(咸興)에 하소연하고자 하면 길이 너무나도 멉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 고통스러운 것만 생각하여 점점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것입니다. 현재의 급선무는 오직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여 보호해서 안정시키는 방책에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나라 안에 어찌 왕의 덕화가 미치지 않는 땅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은 만 리 밖의 땅이라 하더라도 모두 왕의 덕화를 입고 있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가는 것이 어찌 즐거워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친척이 있는 고향을 떠나고 부모의 나라를 떠나면서까지 법을 어기고 몰래 달아나는 것은 상정(常情)으로 헤아려 보면 그럴 리 없을 것 같으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억울함과 고통을 어디에도 호소할 곳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은 자그마한 이익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법을 범하게 되어 차츰차츰 몰래 국경을 넘는 것인데, 한 고을에 있어서는 그가 떠나는 것을 그 친척들이 보고 뒤를 따라 또 떠나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진에는 환곡의 폐단이 있는데, 이것도 또한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 병들게 하는 한 가지 사안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 환곡을 혁파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고향 땅을 버리고 이역 땅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는 것이 어찌 상정에서 그리한 것이겠습니까. 필시 억울함이 있어도 풀 수 없고 괴로움이 있어도 하소연할 수 없어 견디고 살 수가 없기 때문에 흩어져 사방으로 가는 것입니다. 덕음을 선포하여 위로하고 안정시키며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하여 마음 편히 생활해 나가게 한다면 응당 몰래 국경을 넘어가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고, 홍순목이 아뢰기를,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하여 위로하고 안정시키되 적절한 방법을 힘껏 다한다면 비록 상을 주면서 국경을 넘으라고 해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부모의 나라를 떠나고자 하는 것이 어찌 기꺼이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필시 그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북관의 여러 고을들은 대체로 궁벽지고 멀리 떨어져 있는데, 육진에 있어서는 감영과의 거리가 모두 천 리가 넘으며 어떤 곳은 근 수천 리나 됩니다. 그러므로 감영의 안찰(按察)이 두루 미칠 수 없고 백성들의 사정이 위로 전달될 수가 없어서, 위에서 덕의를 선포하는 것과 아래에서 질고를 호소하는 것이 막혀서 행해지지 않고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각 고을의 수령에 모두 무인을 등용하니 백성들을 사랑하며 길러주는 방도에 있어서 혹 적절하지 못합니다. 예전에는 조정에서 이러한 폐단을 특별히 유념하여 북평사(北評事)를 파견하여 탐방하고 규찰하는 방도로 삼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평사는 반드시 육진을 모두 순행하고 임기가 차면 대면하여 교대를 하였는데, 근래에는 편리만을 추구하여 청시(淸市)를 한 번 지나기만 하면 문득 길을 되돌리니, 이 자리와 이 임무도 폐지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감사가 순행하는 것이 비록 주전(廚傳)과 공억(供億)의 폐가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북관의 순행을 종종 행하였습니다. 감사의 깃발이 이르는 데서 궁벽한 고을 백성들의 고통, 고을 수령들과 진(鎭)의 장수들의 선악, 아전들과 장교들의 간사하고 교활함을 저절로 보고 듣게 되는 것이어서 백성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고 도와주며 간인(奸人)들을 탄압하는 데 있어서 그 효과가 매우 컸습니다. 근래에는 각도에서 순행을 정지하여 드디어 전례가 되어버렸습니다만, 북관에 이르러서는 현재의 형편이 다른 곳과는 완전히 다르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 순행하는 길을 조금 열어 놓아 북방의 백성으로 하여금 조정의 명령이 이른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아마도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종전에는 과연 북평사가 각 고을을 순행하고서 임기가 찬 뒤에 올라오는 제도가 있었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감사가 순행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자세히 살펴서 그 폐단의 근원을 바로잡았고, 감사가 만약 순행하지 못하면 병마절도사(兵馬節都使)를 대신 보냈습니다. 근래에는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를 염려하여 순행을 정지한 지가 거의 30년이 됩니다.”

하고, 이유원이 아뢰기를,


“감사가 한 번 순행하는 것도 또한 민간에 끼치는 커다란 폐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순행하면서도 폐해를 끼치지 않고 잘하는 감사를 명관(名官)이라고 칭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감당해 낼 만한 사람을 뽑아 보내지 않을 수 없겠다. 그곳 민간의 이해(利害)를 상세히 알아보아 그 폐단의 근원을 바로잡게 하는 것이 매우 좋을 듯하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가령 감당해 낼 만한 어사를 뽑아 보내 민간의 질고(疾苦)를 탐지하고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조건을 별단으로 입계한다 하더라도, 한갓 실상과 어긋나는 형식적인 문건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혹 감사가 막부의 비장을 대신 보내서 폐단의 근원을 상세히 알아 본다 하더라도 또한 그 깊은 사정을 자세히 조사해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역시 하나의 허명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옛날부터 안무사(安撫使)를 보냈던 전례가 있으니, 지금도 또한 이런 전례에 의거하여 뽑아 보내소서. 그리하여 조정의 배려하는 뜻을 널리 선포하고 오늘 탑전에서의 엄한 분부를 전유토록 하여 각 고을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정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김병국이 아뢰기를,


“선묘조(宣廟朝) 때 정언신(鄭彥信)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북도에 머물면서 진무했는데, 먼 지방 백성들의 질고가 하나하나 위로 전달되었고 조정의 배려하는 뜻이 아래로 선포될 수 있었으며, 지방 고을과 여러 진(鎭)들이 조심하면서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먼 지방 백성들이 거의 모두 기뻐하면서 감복하였습니다. 지금도 만약 질고가 전달되고 배려하는 뜻이 선포된다면 변방 백성들도 또한 기뻐하면서 감복하여 예전과 같이 편히 머물러 살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 뒤라면 또한 이미 국경을 넘어갔던 자들이 다시 와서 살지 않을 것을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지금 사람을 보내라는 하교를 받들었기 때문에 감히 법과 전례로써 우러러 진달 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의 수령들은 임기가 차기를 학수고대하다가 즉시 교대하고 오기 때문에 왕화(王化)를 선포하는 데에는 뜻이 없다.”

하니, 김병학이 아뢰기를,


“육진의 수령들이 어찌 모두 탐욕스러워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거리는 아득히 멀고 집과 조정은 까마득히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임기가 차기만 하면 도모하여 교대하고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과 관련된 사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서 점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고, 홍순목이 아뢰기를,


“저 이산하고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즐거이 종사하도록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수령을 적임자로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에게 유익한 것을 그 수령된 자들이 전적으로 생각해주지를 않고 있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또한 그런 폐단이 있습니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감사만 가려 차임할 것이 아니라 병마절도사도 가려 차임해야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리고 몰래 국경을 넘어간 백성들이 자신들의 친척을 유혹하여 점점 몰래 도망하게 되는 것이니, 우리 조정에서 배려하는 뜻을 선포하여 위로하고 안정시킨다면 반드시 이런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넘어갔던 자들이 다시 돌아오면 권도(權道)를 쓰지 않을 수 없겠다. 위로하고 안정시키며 잘 도모해서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여 보호해주는 것이 또한 좋겠다.”

하였다. 박규수가 아뢰기를,


“이처럼 염려하시고 자문을 구하시는 마당이니, 연석(筵席)에 오른 재신(宰臣)들로 하여금 또한 그 폐해를 고칠 수 있는 방도를 상세히 주달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유원이 아뢰기를,


“연석에 오른 신하 가운데 일찍이 북도의 감사나 병마절도사를 거쳤던 사람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 상세히 주달토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김유연이 아뢰기를,


“신이 체직된 지 1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근래의 사정을 비록 상세히 알지 못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국경을 넘는 조짐은 그때도 또한 있었습니다.”

하고, 서당보가 아뢰기를,


“신이 올봄 체직되어 와서 입시했을 때에 이미 주달 드린 적이 있습니다. 대체로 국경을 넘어가는 근심스런 일은 애초부터 저들이 침노하여 어지럽혀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백성들이 잇달아 흉년을 겪은 나머지 사방으로 흩어져 근근이 밥이나 먹고 살기를 도모한 방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데, 점차 서로 유혹해 내어 낙원으로 가는 것처럼 떠나갑니다. 그리하여 친척과 이웃들을 이끌고서 떠나가기 때문에 거의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는 것이니, 민정을 생각하면 극도로 근심스럽고 걱정이 됩니다. 현재의 급선무는 어루만져 보호해 주고 안정시키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으니, 조정이 더욱 진념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였다. 김기석이 아뢰기를,


“기경(己庚) 양년에 흉년을 잇달아 당하자 저들 강변에 쌀시장이 많기 때문에 밤을 틈타 몰래 넘어가 교역해왔는데, 이 습관이 점점 자라나 러시아[俄羅斯]의 국경을 넘어서 들어가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니, 진실로 삶을 도모하려는 방책에 연유한 것입니다. 그 당초의 민정을 규명해 보면 또한 슬픕니다.”

하고, 이유원이 아뢰기를,


“신이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도 이런 폐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석에서 물러난 뒤 익히 상의하여 초기(草記)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연전에 삭천(削薦)당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는 또한 억울함을 들어서 말하는 자도 없지 않을 것이다. 천망(薦望)을 회복시켜 줄 만한 자를 다시 탐지하여 도로 옛 천망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삭록(削錄)당한 자도 있는데, 또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이니 이 뒤에 마땅히 탐문해서 그 녹(錄)을 도로 회복시켜 주도록 하라.”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이는 성덕(盛德)을 베푸는 일입니다. 삭천되거나 삭록된 사람 가운데는 피천되거나 피선되었다가 뒤미쳐 다시 삭제당해 억울함을 들어서 말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며, 그 가운데는 또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의 이 하교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모두 근심이 없게 할 수 있습니다. 천망을 회복시키는 것은 해청으로 하여금 순차적으로 하도록 하고, 녹을 회복시키는 것은 지금 하도록 하라고 다시 하교를 받들 수 있다면 상서와 화기를 맞이하여 들이는 방도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삭록당한 사람 가운데 죽은 사람이 많은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지금의 이 하교를 진실로 대단히 흠앙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순차적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봄, 여름 이래로 한결같이 가뭄이 들었는데, 자못 근래에 없던 일입니다. 모를 내지 못한 곳이 많고 모를 낸 것도 말랐으니,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로 삼가 백성들을 위하여 대단히 근심하고 번민하고 있습니다. 그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여 보호해 주는 의리에 있어서 빨리 이들을 구제할 방도를 도모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굶어 죽고 이산하는 고통을 겪는 데 이르지 않게하는 것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도신과 고을 수령에게 있습니다만, 모든 은덕을 베풀어 구휼하는 정사에 있어서 조정도 또한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경기와 삼남(三南)을 가지고 논해 보건대, 양서(兩西)와 동북(東北)에 비해 농사 형편이 비록 흉년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모든 고을이 다 모를 내지 못하고 도처가 모두 마른 것은 아닙니다. 산간과 평원은 조습(燥濕)이 같지 않고 파종의 시기가 자못 다르며, 또 늦게나마 비와 햇볕이 고르면 몇 분의 일이나마 추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전(旱田)에 파종하여 김을 매서 가꾼 것은 거의 추수의 가능성이 농후하게 있음을 전해 들은 소문을 참고하면 거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근래에는 헛소문이 서로 뒤섞여 조금 여문 곳도 제쳐둔 채 걸핏하면 완전히 포기했다고 하면서 큰 흉년이라고 하니, 이런 것은 일일이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해에는 가려 진휼(賑恤)하는 과정에서 진실로 엄밀하고 빈틈없이 살피지 않으면 간사하고 거짓 꾸민 짓을 막을 수가 없고 혜택이 중간에서 막혀버리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어 나라의 경제와 백성의 형편 양쪽에 도움되는 바가 없게 되니, 울타리를 맡아 땅을 지키는 신하는 왕의 명을 백성들에게 펼쳐야 하는 임무를 마음에 두지 않은 죄를 모면할 길이 없을 것인바 어찌 더욱더 삼가고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각각 힘껏 상세하고 분명하게 하며 철저히 정밀하고 깊이가 있고 성실하게 하여 기필코 분별없고 부실하게 하여 진위가 서로 뒤섞이는 폐단이 없게 하도록 우선 해당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황(救荒)의 정사(政事)에 있어서 무엇인들 아끼겠는가마는 재보(災報)와 기초(飢抄)가 지극히 정확하고 부실하지 않은 뒤에야 실질적인 혜택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니, 각별히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거조(擧條)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 이회정(李會正)의 장계를 보건대, ‘도내의 부령(富寧)과 육진 여러 고을은 진황(陳荒) 전결(田結)이 가득 차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부세를 면제한 기한이 이미 다 찼는데 유민(流民)들은 아직도 돌아와 모이지 않고 있어서 징수를 독촉할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정축년부터 시작하여 5년 동안 특별히 부세를 면제해 주시고 진여전(賑餘錢)에서 취한 이자는 이전대로 급대(給代)할 일로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분부토록 하소서.’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본도를 보살펴 주는 것이 다른 도와 비교할 때 현격히 다른 만큼 공공의 세금이 비록 소중한 것이라 하더라도 빈궁한 백성들을 먼저 위로하고 돌봐야 합니다. 다시 3년을 연장해 주어 특별히 배려하는 은혜를 베푸시고, 진여전에서 취한 이자를 급대하는 조항은 장계에서 청한 바는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북도를 염려하여 생각하는 것이 과연 어떠한가. 모두를 아뢴 대로 시행하여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여 보호해 주는 방도를 힘써 다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관찰사가 봄, 가을로 부락을 순행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에 관계되지만 경기와 삼남은 가뭄에 대한 걱정이 매우 심하고 기타 도는 백성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을철의 순행은 모두 정지하도록 하고, 기내(畿內)의 능원(陵園)과 동북도의 각 능침(陵寢)을 봉심하는 일은 근례에 의거하여 직질(職秩)이 높은 수령으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지난번 각 고을 토호(土豪)들의 일에 관하여 우러러 진달드려 지엄한 분부를 받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 이런 풍조는 지방 고을뿐만이 아니고 경기에서도 조정 관원, 양반 가문들이 왕왕 해괴망측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햇수가 오래된 아무런 증거도 없는 부채를 전연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서 억지로 징수하고, 위조한 가짜 표(標)를 가지고 좌계(左契)인 것처럼 하여 까닭 없이 무법(無法)하게 빼앗으면서 화두(貨竇)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제 마음대로 가두어 놓고서 멋대로 묶어 놓고 마구 매질을 하여 저 무고한 백성들로 하여금 이러한 침학을 받게 합니다. 그리하여 파산이 연이어 지탱해 나갈 수가 없으니, 지극히 실망하여 원망하고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래서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인데도 법을 관장하는 신하들은 한결같이 귀를 막은 듯이 못 들은 체하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 놓고 신문하지 않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이란 말입니까. 신이 아뢴 것으로 감결(甘結)을 보내 엄히 신칙해서, 낱낱이 규찰하여 법으로 바로잡고 조정 관원은 곧장 본부에 보고토록 하여 엄하게 죄를 심리하여 처단할 뜻으로 거조를 내서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후로 금지하고 신칙하는 것을 자상하고 분명히 했을 뿐만이 아닌데 해괴망측한 풍조가 이처럼 극도에까지 이르다니, 그 과연 나라의 법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러한 것인가. 묘당에서 법사(法司)에 엄히 신칙하여 하나하나 규찰토록 하고, 만약 덮어두고서 신문하지 않는 폐단이 있으면 엄하게 논죄하여 처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신이 전최(殿最)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할 일로 연석에서 아뢰어 칙문(飭文)을 반포하였습니다. 제도(諸道)가 봉해 아뢴 장계를 가져다 보건대 유독 관서(關西) 한 도는 상고(上考)만을 순전히 매기고 한 명도 중(中)이나 하(下)가 없었습니다. 휘하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과연 모두 어질게 정치를 하여 최(最)만 있고 전(殿)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만약 엄하게 하지 않았다면 현명한 자를 높이고 무능한 자를 내쫓는다는 전최의 뜻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사체(事體)로 헤아려 보건대 경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안도 전 감사 조성하(趙成夏)에게 엄하게 추고하는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일본 사신이 귀국에 임박하여 말하기를, 영국과 청 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은 사유를 갖추어 자문(咨文)을 쏜살같이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문을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지어내게 하여 밤을 새워 들여 보내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음로(蔭路)의 초사(初仕) 자리가 매번 곤란한 것이 근심이므로 응당 변통하는 정사가 있어야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종부(宗府)와 훈부(勳府)의 수봉관(守奉官)은 안릉 참봉(安陵參奉)의 예에 따라 벼슬한 달 수가 45삭이 찬 뒤 6품으로 승진시킨다는 뜻으로 정식을 만들어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이와 같이 우러러 진달드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연전에 병비가 허사과(虛司果)를 변통할 때 원사과(元司果)와 권부사과(權付司果)를 사이사이에 자리를 끼워 처리한 것은 비록 적체를 해소시켜 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그 가운데 선전관, 양부(兩府)의 낭청, 내승(內乘)은 바로 무신 중에서 정선(精選)된 가장 우수한 등급의 사람들인데 잡사과(雜司果)와 더불어 뒤섞여 동등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여론이 억울하게 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방(官方)을 중시하는 의리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선전관, 양부의 낭청, 내승은 자리를 사이사이에 끼워 시행하지 말도록 하고 예전의 규례를 회복하여 우선적으로 처리할 일로 전조(銓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단묘(端廟) 때의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의 늠름한 절개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더욱 확고하여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었는데, 열성조(列聖朝) 때 기려 표창하는 은전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이번에 옛날의 그 해와 간지(干支)가 같은 해를 다시 만났으므로 더욱 느껴지는 감정이 있으니, 창절사(彰節祠)에 지방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함께 배향된 사람들에게도 일체 제사를 지내도록 하며, 황폐해진 그분들의 분묘도 해당 지방관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여 속히 수리토록 한 뒤 보고케 할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이우(李㘾), 지돈녕부사 조성하(趙成夏)를 아울러 정부 당상으로 다시 차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거조를 냄 - 이최응이 아뢰기를,


“금위대장 양헌수(梁憲洙)는 신병이 있다고 하고 조방(朝房)에 나왔으면서도 연석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병이 있어 비록 억지로 연석에 오르기 어렵다 하더라도 사체상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 탑교(榻敎)를 냄 - 박용대가 말하기를,

“여러 재신들은 사안을 아뢰시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아뢸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박용대가 말하기를,

“옥당은 소회를 아뢰시오.”

하니, 이석홍이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신은 학식이 얕고 고루하여 감히 식견으로써 자부하지 못합니다만, 어리석은 신의 정성은 진실로 ‘성학(聖學)’ 한 가지 사안에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제왕들이 정치하는 요령은 학문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학문의 요점은 존심(存心)보다 귀중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한 몸의 주인이자 온갖 변화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서전(書傳)》에서 말하기를, ‘생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학문에 둔다.[念終始典于學]’ 하였고, 《시경(詩經)》에서 말하기를, ‘아, 선왕의 사업을 이어 밝혀 그 마음을 다하셨다.[於緝熙亶厥心]’ 하였습니다. 정치하는 방법과 정치상의 대계(大計)는 서적에 흩어져 있으니, 자고로 성왕(聖王)들이 모두 다 이 마음을 전수하고 이 학문을 강구하여 기필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아 성대한 일입니다. 근자에 강대(講對)를 정지하고 있는데 비록 경연(經筵) 탈품(頉稟)의 예에 의거한 것이긴 합니다만, 요즈음 무더위가 이미 지나가 서늘한 기운이 미동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신료들을 자주 접견하시어 경전과 역사서를 토론하시고, 진강(進講)과 소대(召對)도 중단하지 않도록 하시며, 정사를 처리하는 여가에 더욱 익히고 연역해 보소서. 그리하신다면 몸소 솔선하는 효과는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른 법이니, 반드시 집집마다 책을 읽어 사방이 감화되는 효과를 기약할 수 있어서 우리 동방의 무궁한 아름다움이 진실로 여기에 기초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바는 마음에 새겨두겠다.”

하였다. - 거조를 냄 - 상이 대신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고, 또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이어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승지, 사관,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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