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사육신관련/사육신기록

사육신왕조실록기록(정조15년2월21일)어정배식순서

by 竹溪(죽계) 2006. 9. 8.
728x90
SMALL
 

정조 15년 2월 21일 (병인)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추향할 사람을 정하다


장릉(莊陵)5087) 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이보다 앞서 경기도 유생 황묵(黃默) 등이 상언하여, 화의군 이영(和義君李瓔)의 충효 대절(忠孝大節)은 육신(六臣)과 다를 것이 없다고 호소하고 창절사(彰節祠)에 추향(追享)할 것을 청했는데, 전교하기를,

 

“화의군을 그 위치와 그 사당에 추배(追配)하는 것은 귀신의 이치로 보나 사람의 마음으로 보나 다 합당하다고 할 만하나 추배할 사람이 어찌 화의군 한 사람 뿐이겠는가. 얼마 전에 노량(露梁)을 지나다가 육신의 사당과 무덤 곁에서 한참 동안 행차를 멈추고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고, 행전(行殿)에서 묵을 때 감회를 금치 못하여 60구의 제문을 촛불을 들여오게 하여 불러주어 쓰게 하였으니, 그처럼 깊은 감회로 그와 같은 정중한 예를 베풀었었다. 육신은 실로 혁혁하고 뛰어나 사람들의 이목에 젖어 있지만 금성 대군(錦城大君)과 화의군의 그와 같은 절의가 종실에서 나왔다는 것은 더욱 특이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이 두 사람 이외에도 사육신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이번에 추배할 때 함께 시행하는 것이 실로 절의를 권장하고 충성을 표창하는 조정의 정사에 부합할 것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공사간에 상고할 수 있는 문헌들을 널리 상고하여 하나로 귀결시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고 정승 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금성 대군 이유(錦城大君李瑜)의 시장(諡狀)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遜位)했을 때 공은 순흥부(順興府)에 안치되었는데, 그곳의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남쪽 지방의 인사들과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책을 꾸몄다. 하루는 보흠을 불러 격문을 초하게 하였는데, 관노(官奴)가 벽 사이에 숨어서 몰래 엿듣고 공의 시녀와 내통하여 격문의 초고를 훔쳐서 달아났다. 그런데 기천 현감(基川縣監)이란 자가 급히 추격하여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서울에 가서 고변하였다. 그리하여 공과 보흠은 잡혀 사형을 당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기진(李箕鎭)이 지은 한남군 이어(漢南君李)의 시장에는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이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공도 그 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함양(咸陽)에 안치되었다가 귀양지에서 죽었다. 화의군 이영(和義君李瓔), 영풍군 이전(永豊君李瑔)과 함께 가족은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하는 화를 입었다. 중종 갑오년에 비로소 선계(璿系)에 다시 포함시켰고, 명종때 또 관작을 회복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先朝) 갑인년에 종부시가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손위할 때 시습은 마침 삼각산(三角山) 속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곧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했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신흠(申欽)이 지은 산중독언(山中獨言)에는 ‘남효온(南孝溫)이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열경(悅卿)을 종유하였다. 열경이 말하기를 「공은 나와 다른데 어째서 세도(世道)를 위해 벼슬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가?」 하니, 효온이 말하기를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감사 최현(崔晛)이 지은 이맹전전(李孟專傳)에는 ‘경태(景泰) 갑술년 즈음에 시사가 크게 변하자, 소경과 귀머거리로 행세하면서 친한 벗들을 사절하고, 매월 초하루에는 항상 아침해를 향해 절을 하며 내 병이 낫기를 빈다고 말했는데, 집안 사람들도 그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재(李縡)가 지은 조여(趙旅)의 비명에는 ‘경태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하루는 여러 유생들과 작별하고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숙종 기묘년에 영남의 선비들이 공의 절의를 보고하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으며, 사당을 함양(咸陽) 백이산(伯夷山) 밑에 세우고 김시습·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배향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원호의 묘갈명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한 뒤에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을해년에 3년 상복을 입은 뒤 고향집으로 돌아가 문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해서 앉고 누울 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무인년에 복위한 뒤 의리와 절개로 인해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주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이 지은 잡저(雜著)에는 ‘성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아버지의 묘소 아래 숨어 살면서 일찍이 서울에 올라간 일이 없었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남효온이 지은 허후전(許詡傳)에는 ‘김종서(金宗瑞) 등이 죽임을 당했을 때 그를 불러들여 잔치에 참여시켰는데, 유독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끝내는 유배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권자신(權自愼)은 상왕(上王)의 외숙인데, 육신과 함께 복위를 도모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장릉지(莊陵誌)에는 ‘송석동(宋石仝)은 육신과 함께 잡혀서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는 ‘권절(權節)은 귀머거리 노릇을 하며 병들었다 핑계하고는 문밖에 나가지 않은 채 일생을 바쳤다.’ 하였습니다.

장릉지에는 ‘정보(鄭保)는 권세 있는 간신을 대놓고 꾸짖다가 거의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할뻔 했는데 세조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용서해 줬다.’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조상치(曺尙治)의 묘지(墓誌)에는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일생 동안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비석에 글을 써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포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 하고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노산조라고 쓴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것이고 벼슬 품계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죄를 드러낸 것이고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없애지 않기 위해서이며 포인이라 쓴 것은 망명하여 도피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무덤앞에 세우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당시 제현들이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살아 있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그 처한 상황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고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바친 의리에 있어서는 살았건 죽었건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금성 대군 이유는 왕실의 지친으로서 충성을 다해 의리에 죽었습니다. 후세에 논하는 자들이 종실의 친족으로는 금성 대군을 꼽고 조정의 경우는 육신을 꼽으니, 육신의 사당에 어찌 금성 대군의 제향을 빼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화의군·한남군·영풍군 세 사람도 각기 그 본분을 다했으니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금성 대군에 비하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김시습·남효온·이맹전·조여·원호·성담수 등 6인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인데 혹은 방랑생활로 그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은둔해 살면서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그 충성과 그 절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 사당에다 함께 제사지내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뛰어난 자로서 김시습은 세종의 특별한 신임에 감격하여 미친 사람처럼 종적을 숨기고 절간에 몸을 의탁하였으며, 남효온은 소릉(昭陵)의 복위를 요청하고 육신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 내용을 완곡하게 쓰고 자기 뜻을 고수하였으니, 그들의 고심과 아름다운 절의는 영원토록 사람들을 격려할 만합니다. 이 때문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에 ‘만약 매월당(梅月堂)과 남 추강(南秋江)을 여기에 제사지내고 또 사당 옆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공주(公州)의 동학사(東鶴寺)에서처럼 한다면 일이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약에 육신(六臣)을 한꺼번에 모두 제사지내는 것을 선뜻 논의하기 어렵다면 우선 선정이 이미 정한 논의에 따라 김시습과 남효온 두 사람을 추향(追享)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이보흠(李甫欽)과 권자신은 그 사적은 같지만 제단을 따로 설치하자는 선정의 논의로 볼 때 그 사이에 경중을 둔 것 같으며, 허후(許詡) 등 7인이 이룬 바는 비록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보흠과 권자신에 비교하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추배(追配)하는 문제는 신들이 감히 독단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공사간의 문헌을 가져다가 절의가 가장 현저하고 사실을 증명할 만한 것들을 가려낸 결과 육신과 금성 대군·화의군 이외에도 순절하거나 은둔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릉지에 보이는 자만도 거의 1백여 인이 넘지만 이름만 있고 행적은 없어 대부분 상고하기 어렵고 단지 뚜렷이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종조의 영의정 김종서, 좌의정 황보인(黃甫仁), 우의정 정분(鄭苯)은 모두 세종의 고명 대신(顧命大臣)으로 세조의 변란 때 함께 죽어 그 곧은 충성과 큰 절의가 역사책에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은 곧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일찍이 세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자년에 그의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습니다. 도총관 성승(成勝)은 곧 충문공(忠文公)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역시 충문공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상 두 집안의 부자가 이룩한 것이 이처럼 뛰어난데, 중림의 경우는 전하의 무신년에 특별히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성승은 아직도 시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안평 대군 이용(安平大君李瑢)은 변란 때 황보인·김종서 등과 결탁했다는 죄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영종 때에 이르러 관작을 회복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한남군 이어(漢南君李)와 영풍군 이전(永豊君李瑔)은 장릉지를 살펴보면, 정축년 금성 대군이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을 때 종친부에서는 어는 유(瑜)와 죄가 같으므로 혼자만 살려줄 수 없으니 안치·금고시키자고 아뢰었고, 종부시에서는 영(瓔)·어·전은 죄가 종사에 관계되므로 왕실 계보에서 삭제하자고 아뢰었습니다. 어·전의 시장(諡狀)을 살펴보면, 어·전은 모두 양빈(楊嬪)의 소생인데 양빈은 곧 단종을 젖먹여 기른 사람입니다.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의 복위를 도모한 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어가 그 일에 참여하였다 하여 드디어 함양(咸陽)에 안치되었고, 정축년 금성 대군의 일이 발각되자 양빈이 내응하였다 하여 병자년에 모두 화를 당했습니다. 중종 때 명으로 왕실 계보에 다시 속하게 하였고 명종 때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숙종 때 단종을 복위하면서 시호를 내려주고 예장(禮葬)하도록 하였습니다. 영종 갑인년에 종부시에서는,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름이 없다고 아뢰었고, 또 호남의 유생들이 상소로 청하기를 ‘저 세 신하가 모두 왕실의 지친으로서 목숨을 바치면서도 절개를 바꾸지 않은 것은 실로 육신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심지어는 엄흥도(嚴興道)와 같이 미천한 자도 오히려 육신과 함께 제향을 받는데, 이 세 신하만은 그 높고 빛나는 충렬이 해와 달을 꿰뚫고 우주를 지탱할 만한데도 표창하는 은전은 도리어 엄 호장(嚴戶長) 보다도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상의 문헌으로 상고해 보면 어와 전은 유와 영과 마찬가지인데, 금성 대군의 청안(淸安) 사당에 화의군만 배향하고 한남군과 영풍군을 배향하지 않은 것은 결국 결함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간공(淸簡公) 김시습은 5살에 신동이라 하여 세종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고 단종이 손위한 뒤에는 절간에 의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말하기를 ‘절의를 높이 세우고 윤리 강상을 부식한 것은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해도 근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18세에 글을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고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아껴 대현들의 이름을 인멸시키겠는가.’ 하였습니다.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는 집현전 직제학으로 단종 초년에 원주에 은퇴하여 살다가 단종이 승하하시자 영월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냈으며 세조가 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숙종 24년 무인년에 특별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는 교리 성희(成熺)의 아들입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의 잡저(雜著)에 ‘희가 성삼문의 사건에 연좌되어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파주(坡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그 당시 죄인의 자제들에게 으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를 시험하였을 때 모두 머리를 숙이고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유독 담수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갑진년에 증직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은 일찍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으로 뽑혔으나 경태(景泰) 갑술년에 귀먹고 눈멀었다고 핑계하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신축년에 시호를 추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절공(貞節公) 조여(趙旅)는 태학생(太學生)으로 단종이 손위하게 되자 여러 유생들과 하직하고 함안군(咸安郡)으로 돌아가 은둔하여 소요 자적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숙종 28년 임오년에 특별히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고, 전하의 신축년에 이조 판서로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숙공(忠肅公) 권절(權節)은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번 그의 집에 가서 거사하는 문제를 은밀히 말했으나 귀먹은 체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며, 은둔하여 한평생을 마쳤다.’ 하였습니다. 숙종 임오년에 강원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육신의 사당에 사액(賜額)할 것과 권절을 함께 배향할 것을 청하자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갑신년5100) 에 양주(楊州) 유생들이 또 상소하여 사당을 건립할 것을 청하니,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고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는 《갱장록(羹墻錄)》 화속편(化俗篇)을 상고해 보니 ‘세조가 일찍이 박팽년 등을 논평하여 당대의 역적이고 후세의 충신이라고 했다.’ 하였고, 그 아래에 ‘부제학 조상치가 상소하여 치사를 요청하니 백관에게 명하여 도성 문 밖에서 전별하도록 하였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묘표에 ‘공은 성삼문·박팽년 제공과 길은 달라도 가는 곳은 같았다.’ 하였고, 그 유사(遺事)에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은 뒤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스스로 돌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조상치지묘」라 하였고, 또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자기 뜻을 드러냈다.’ 하였습니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영천사당기(永川祠堂記)에 ‘육신은 죽었고 공은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그 자취가 드러나 쉽게 보이지만, 죽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이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종을 복위한 뒤에도 육신과 함께 노량진의 사당에서 제향을 받지 못한 것은 후세의 공론을 기다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 교리 성희(成熺)는 곧 성삼문(成三問)의 종숙부(從叔父)이자, 정숙공 성담수(成聃壽)의 아버지입니다. 선정신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희가 삼문과 함께 왕실을 보필하여 죽고 사는 일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삼문 등이 죽자 희도 역시 엄한 국문을 받고 귀양갔으며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했다. 그 뒤 3년 만에 용서를 받았으나 끝내 충성과 의분에 겨워 죽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정보(鄭保)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한명회(韓明澮)의 첩으로 있던 서매(庶妹)를 가서 보고 ‘공은 어디에 갔는가?’ 하고 물으니 ‘죄인을 국문하느라 궁궐에 가 있다.’ 하자, 보가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명회가 즉시 상에게 아뢰어 세조가 친국을 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려 하다가 충신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죽음을 감해 유배하였습니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은 곧 문종의 부마입니다. 단종 을해년에 광주(光州)로 귀양갔다가 정축년 금성 대군의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자, 종친부가 ‘정종·송현수(宋玹壽)·어()·전(瑔)의 죄는 나라의 법으로 보아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여 결국 사약을 받았습니다. 영조 무인년에 특명으로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육신이 화를 당하던 날 함께 죽었는데, 영조 때에 와서 함께 시호를 주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는 단종의 장인으로서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 금성 대군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창절사(彰節祠)에 추배(追配)하는 일은 그 예법이 매우 중대합니다. 세 대신의 뛰어난 절의나 박중림과 성승 부자가 보여준 특별한 절개는 마땅히 배향할 만하지만, 신주의 순위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안평 대군 및 한남군·영풍군은 금성 대군과 같은 형제이니, 다함께 죽계(竹溪)의 사당에 추배한다면 역시 풍속과 교화를 길이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생육신을 사육신과 함께 제사지낸다 한들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만 선정신 송시열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를 상고하건대, ‘만약 매월당과 추강을 이곳에 배향하고, 또 사당 곁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대략 공주의 동학사(東鶴寺)처럼 한다면 일이 더욱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미 선정의 정론이 있어 다시 논의할 여지가 없지만, 나머지 네 신하의 똑같은 깨끗한 절의에 대해서는 역시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공론이 있을 수 있으며 그밖의 사람들도 모두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칭송할 만한 뛰어난 절의가 있긴 하나 이것은 사당의 규례에 관한 일이라 신들이 감히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달 경술일에 사관이 실록을 상고하고 돌아와 아뢰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자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육신의 일은 감히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세조의 하교에 ‘후세의 충신이다.’ 하셨고, 영양위(寧陽尉)의 집의 일을 논하면서 ‘난신(亂臣)으로 논할 수 없다.’ 하셨다. 그 훌륭하신 훈계와 계책은 해와 별처럼 환히 빛나 임시 방편에 통달하고 원칙을 부식한 성인의 깊은 뜻을 삼가 엿볼 수 있다. 그것을 천명하고 드러내는 것이 어찌 우리 후인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지난번 행차할 때 민절사(愍節祠)를 지나다가 옛날의 감회가 일어나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고 이어서 금성 대군 등 여러 사람을 영월에 있는 사당에 추배하기 위해 사관에게 명산에 깊이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삼가 상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관이 복명하던 바로 그 날 강원 감사가 자규루(子規樓)의 옛터를 찾아낸 상황을 장계로 아뢰었다. 이 두 가지 일이 공교롭게도 한꺼번에 겹쳐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되었으니 이치란 속일 수 없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이상하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이나 오종영(五宗英)의 높고 큰 충절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추앙하는 형편이라 누구는 배향하고 누구는 배향하지 않는 것으로 쉽게 취사 선택해서는 안될 것이니, 별도로 예법에는 없지만 예법에 맞는 예를 찾아서 시행하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는가.

 

지난 숙종 무인년에 장릉(莊陵)을 복위했을 때 조정의 신하가 육신의 사당이 정자각(丁字閣)과 너무 가깝다는 말을 하자, 숙종께서 ‘무후의 사당이 길이 이웃에 가깝다[武侯祠屋長隣近]’는 두보(杜甫)의 싯귀를 인용하면서 헐어버리지 말라고 하셨으나, 의론이 서로 엇갈려 끝내는 옮겨 세우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억울함을 되새기는 제사는 동학사의 실례를 취하고 제단을 만드는 제도는 달천(㺚川)의 실례를 모방하되 당시에 절의를 다한 사람들을 합쳐 하나의 사판(祠版)으로 만들어, 본릉(本陵)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매년 한식(寒食)에 함께 제사를 지내며, 고을원으로 하여금 집을 하나 지어서 사판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똑같이 제사지낸다는 뜻을 보여야겠다.

 

아, 예법이란 인정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서 신이나 인간이나 차이가 없다. 저 열렬한 영령들의 가시지 않는 울분이 길이 의지할 곳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장릉의 혼령도 오르내리면서 제물의 김과 향기가 물씬 풍길 때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이 일을 누가 근거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본도와 예조로 하여금 이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게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배향하는 일에 대해 방금 전교를 내렸는데 내각(內閣)에 배식록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사판은 충신 사판이라 쓰고 제물은 밥은 큰 그릇에 한 그릇, 탕은 큰 주발에 한 주발, 나물과 과일은 각각 한 접시, 술은 한 잔으로 규례를 정하고 제관은 부근의 찰방으로 하며, 예관(禮官)이 내려가기 전에 제단을 만들고 사판을 만들도록 하는 등의 일을 해도에 분부하라. 의례적으로 쓸 제문은 마땅히 지어서 내려보낼 예정인데, 이후에 본릉의 한식제에 쓸 향을 받아갈 때 함께 주어서 보낼 것이라는 것도 해도와 예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제 장릉의 일로 인해 생각해보니, 충정공(忠正公)의 부친 박중림(朴仲林)은 시호가 있는데, 성승(成勝)은 충문공(忠文公)의 부친으로 중림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홀로 빠져 있다. 이 어찌 더욱 큰 결함이 아니겠는가. 본관(本館)에 신칙해서 즉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논해 올리도록 하라. 고 충신 박계우(朴季愚)는 바로 대제학 박연(朴堧)의 아들인데, 연이 악(樂)을 제작한 것은 허 문경공(許文敬公)이 예를 제작한 공과 백중을 이루는 것이다. 문경공의 아들 허후(許詡)는 계우와 동시에 순절했으나 후는 시호가 있고 계우만 유독 빠졌으니, 혹시 벼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독동(禿同)과 윤생(尹生)의 뛰어난 절의 또한 인멸시킬 수 없으니, 아울러 증직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단종조의 여러 신하가 절개를 지킨 것은 다 같지만 성과에 있어서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순위에도 귀천의 차이가 있다 하여, 장차 별단(別壇)을 설치하는 문제를 내각으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도록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대신들 가운데 원임 각신에게 물으니, 원임 제학 이복원(李福源)은 말하기를 ‘배향하는 문제는 지극히 엄중하니, 지금 이 명이 비록 묘정에 종향(從享)하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하나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서원(書院)에 배향하는 것에 비하면 의미와 상황이 자연 다릅니다. 그러니 조정에 벼슬한 적이 없거나 벼슬을 받지 않은 자는 비록 뚜렷이 기록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오직 엄흥도(嚴興道) 한 사람만은 육신의 반열에 나란히 세워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드문 은전은 간략한 것이 귀중하니, 간략하면 그 광명한 빛이 더욱 빛나고 확대하면 오히려 혹 근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드는 것은 표창하는 의리는 마찬가지이고 불쌍히 여기는 은혜로 인해 나온 조치이긴 하나 배식(配食)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인원수의 많고 적음에는 구애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원임 제학 채제공은 말하기를 ‘내리신 3책 가운데 있는 배향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성상께서 직접 뽑아내신 것은 마치 저울 눈금을 가늠한 것처럼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이들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 아래쪽에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 물으신 일은 불쌍히 여기고 표창하시려는 성상의 마음을 삼가 이해할 수 있긴 하나 숫자는 많고 사적은 너무 소략하니, 만약 위의 항목에 든 뚜렷한 사람들와 똑같이 함께 제사지낸다면 혹시 예법이 번잡해질 혐의가 있을 듯합니다. 신은 일찍이 영남 지방을 왕래한 적이 있으므로 선배들의 유적을 대략 알고 있습니다. 금성 대군은 순흥(順興)에서 화를 당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 부근 고을에서는 평생동안 세상을 등지고서 북쪽 문을 막고 동쪽만 향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자손들이 만약 조정에서 예전에 없었던 은전을 베푼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앞으로 행차하시는 길에 글을 올리는 자들이 더한층 많아져 이루 다 베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여기에 뽑아 기록한 자만으로 끊어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에 우리 성조(聖祖)의 하교에 육신의 사당을 본릉(本陵) 홍살문 안에 그대로 두라고 하셨으니, 매우 훌륭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배향하는 규례를 거행하자고 논의하는 것을 가지고 삼가 그 뜻을 계승하는 일단을 스스로 구현하고자 한다. 대체로 제단에 제사지내는 것과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사실 차이가 있지만 함께 제사지내는 뜻은 마찬가지이다.

 

두 대신이 올린 의견에 혹은 ‘간편한 것이 귀중한 것이다.’ 하였고, 혹은 ‘이루 다 베풀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일을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 취사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절의를 지켜 죽어서 그 자취가 나라의 역사와 능지(陵誌)에 올려져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육종영(六宗英 ·사의척(四懿戚) ·삼상신(三相臣) ·삼중신(三重臣) ·양운검(兩雲劒) 및 육신과 육신의 아비와 자식 중에 특별한 사람과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朴季愚) 등 문경공(文敬公) ·문헌공(文獻公)의 아들과 손자로서 더욱 뛰어난 사람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도진무(都鎭務) 정효전(鄭孝全)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상의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에는 축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과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자는 다시 신중히 참작해야 할 것이다.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는 대신들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으니, 충민단(忠愍壇) 등 여러 제단에 담장은 함께 하면서 제지(祭地)는 달리 한 전례가 바로 그것이다. 사적이 자세치 않은 조수량(趙遂良) 등 8인과 연좌되어 죽은 김승규(金承珪) 등 1백 90인은 별단에 제사지내야 할 것이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떨쳐서 장사를 지내는 일에 힘을 다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인데, 어찌 순절한 사람의 반열에 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혼자만 배향에서 누락시킬 수 있겠는가. 김 문정(金文正) ·송 문정(宋文正)이 묘정에 추배(追配)된 사례가 곧 본받을 만한 뚜렷한 근거이다.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 또 고 처사(處士) 김시습과 태학생 남효온은 속세를 떠나 은거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변함이 없었으니, 그 맑은 기풍과 굳은 지조는 백세를 격려할 만한데도 모두 이 사당의 제사에서 빠진 것은 미처 조처하지 못한 결함이다. 두 신하를 똑같이 창절사(彰節祠)에 추가로 제향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 배식하는 문제는 지금 수의한 것으로 인해 또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든다는 명을 내렸다. 32인의 제단에 지내는 제사에는 마땅히 축문이 있어야 하겠고, 제물은 처음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 사판(祠版)은 ‘충신지위(忠臣之位)’라고 쓰되 감사에게 쓰도록 하라. 별단(別壇)의 경우는 사판 3개를 만들어 계유년·병자년·정축년에 죽은 사람들을 각각 쓰도록 하라.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에다 성명을 죽 쓰되, 조사(朝士)를 한 판, 맹인·내시·군사·노비를 한 판, 여인(女人)을 한 판으로 해야 한다. 신위의 위치는 중신들의 왼쪽에 두되 조사의 경우는 약간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맹인·무당·내시·군사·노비의 자리는 약간 밑으로 내려야 한다. 제사지내는 의식에 축문을 쓰지 말고 제물은 각기 밥 한 그릇, 탕 한 그릇, 술 한 잔으로 하며, 헌관과 집사는 두 제단의 일을 겸하여 보게 해야 한다.”

하였다.



【원전】 46 집 204 면

 丙寅/建配食壇于莊陵。 先是, 京畿儒生黃默等, 上言訟和義君^瓔忠孝大節, 與六臣無異, 請追享於彰節祠, 上敎曰: “和義君之追配於是地是祠, 神理人情, 可謂俱當而可合, 追配者, 豈獨和義一人乎? 日前駕過露梁, 出六臣祠與墓之傍, 移時駐蹕, 眺望咨嗟者, 久之。 行殿宿次, 不禁起感, 六十句侑祭之文, 呼燭呼寫。 以若曠想之心, 有若鄭重之典。 六臣固赫赫卓卓, 塗人耳目, 如錦城、和義等, 似此節義之出於宗英, 尤豈不奇壯? 此兩人外, 亦多不下於死六臣者, 今於追配之時, 一體施行, 實合朝家奬節褒忠之政。 令內閣、弘文館, 博考公私可考文蹟, 指一稟旨。” 內閣奏言: “故相臣趙顯命所撰錦城大君^瑜諡狀曰: ‘端宗遜位于寧越, 公安置順興府, 與府使李甫欽, 潛結南中人士, 爲復上王計。 一日召甫欽, 使草檄, 官奴匿壁中聽之, 交通公侍女, 竊檄草走。 有基川縣監者, 急追之, 奪其檄, 先入京上變。 於是, 公與甫欽被收死。’ 故判書臣李箕鎭所撰漢南君^諡狀曰: ‘端廟遜位, 六臣謀復不成, 公與其事, 安置咸陽, 歿于謫, 與和義君^瓔、永豐君^瑔, 同被孥籍。 中廟甲午, 始命復屬璿系, 明廟又命復爵。 先朝甲寅, 宗簿寺啓: 「‘錦城、和義、漢南、永豐殉節, 無異六臣。’」 先正臣李珥所撰金時習傳曰: ‘魯山遜位, 時習方讀書于三角山中, 卽閉門不出者三日, 盡焚其書, 托跡緇門。’ 故相臣申欽所著《獨言》曰: ‘南孝溫請復昭陵位號, 不報, 棄科業, 從悅卿遊。 悅卿曰: 「公異於我, 何不爲世道計也?」 孝溫曰: 「復昭陵之後, 赴擧不晩。」’ 故監司臣崔晛所撰李孟專傳曰: ‘景泰甲戌間, 時事一變, 托跡盲聾, 謝絶親朋, 朔日每向朝日拜, 曰祈禱己疾, 雖家人莫測。’ 故判書臣李縡所撰趙旅碑銘曰: ‘景泰癸酉進士, 一日揖諸生歸, 身不復出。 肅廟己卯, 嶺儒以節行聞, 特贈吏參, 建祠咸陽^伯夷山下, 與金時習、元昊、李孟專、成聃壽、南孝溫, 享焉。’ 故相臣崔錫鼎所撰《元昊碣銘》曰: ‘端宗遜位於寧越, 築室於越之西, 晨夕瞻望涕泣。 乙亥, 服喪三年, 歸鄕廬, 不出戶庭, 坐必東向, 臥必東首以終焉。 戊寅復位後, 以義節旌閭。’ 先正臣成渾所撰《雜著》曰: ‘成聃壽有至誠高識, 屛居父墓下, 未嘗至京師, 除職不就。’ 南孝溫所撰許詡傳曰: ‘金宗瑞等被戮之時, 召入與宴, 獨流涕不食肉, 竟死於謫。’ 李廷馨《東閣雜記》曰: ‘權自愼, 以王舅, 與六臣謀復, 事覺而死。’ 《莊陵誌》曰: ‘宋石仝, 與六臣, 同時就拿, 依律論斷。’ 先正臣李珥所撰《栗亭亂稿》序曰: ‘權節佯聾托病, 鞱晦終身。’ 《莊陵誌》曰: ‘鄭保, 面責權奸, 幾爲所誣誅, 光廟聞其爲鄭夢周孫而原之。’ 故副提學臣林泳所撰曺尙治墓誌曰: ‘光廟受禪, 退居永川, 終身坐不西向, 題石面而刻之曰: 「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 自序曰: 「書魯山朝者, 明其非今日之臣也, 不書階資者, 不能濟君之罪也, 書副提學者, 以其不沒實也, 書逋人者, 言其亡命逋逃之人也。」 謂諸子曰: 「我死, 以此石立墓。’」 竊念當時諸賢之或死或生, 特以所處之地各異, 而盡忠所事, 自靖獻于先王之義, 則生死一也。 錦城大君^瑜, 以王室懿親, 盡忠死義。 後之論者, 在宗英則數錦城, 在外庭則數六臣, 六臣之祠, 其可闕錦城之享乎? 和義、漢南、永豐三人, 各盡其分, 非不奇偉, 而比之錦城, 恐有差等。 至若金時習、南孝溫、李孟專、趙旅、元昊、成聃壽六人者, 世所稱生六臣也。 或放浪以泯其迹, 或隱淪以潔其身, 之忠之節, 人無間然。 竝享一祠, 夫孰曰不可, 而就其中尤特絶較著者, 則金時習感英陵特達之知, 佯狂自晦, 托迹禪門。 南孝溫請昭陵之復立, 六臣之傳, 微婉其辭, 固守其志。 其苦心姱節, 有可以風勵百世。 故先正臣宋時烈六臣祠記有曰: ‘若以梅月堂、南秋江腏享於此, 而又爲一壇於祠傍, 滾薦權自愼、宋石仝等, 如公州^鶴寺之爲, 則事又完備。’ 如以六人之一時竝享, 爲難遽議, 則姑從先正已定之論, 以金、南兩人追享, 恐爲穩當。 李甫欽、權自愼, 其事則同, 而先正設壇之論, 似有權衡於其間, 則許詡等七人成就, 雖曰卓然, 視諸李甫欽、權自愼, 不無異同, 追配之典, 臣等不敢擅論。” 弘文館奏言: “臣等取考公私文蹟, 採其節義之最著, 事實之可徵者, 則六臣及錦城、和義之外, 多有殉節與自靖之人。 其見於《莊陵誌》者, 殆過百餘人, 而名存跡晦, 率多難稽, 只就其表顯者言之。 端廟朝領議政金宗瑞、左議政皇甫仁、右議政鄭苯, 俱以顧命大臣, 同死於靖難時, 貞忠大節, 昭著簡冊。 文愍公^朴仲林, 卽忠正公^彭年之父也。 成三問、河緯地等, 皆師事焉, 以集賢殿副提學, 夙被英廟之知遇, 逮至丙子, 與其子, 同時殉節。 都摠管成勝, 卽忠文公^三問之父也。 亦與忠文同死。 兩家父子之成就, 如是卓然, 而仲林則當宁戊申, 特蒙易名之恩, 勝則尙闕節惠之典。 安平大君^瑢, 靖難時, 坐交結皇甫仁、金宗瑞等, 竄江華, 尋賜死, 至英廟朝, 復官賜諡。 漢南君^、永豐君^瑔, 按《莊陵誌》, 丁丑錦城大君謀復上王, 事覺, 宗親府啓: ‘與瑜罪同, 不可獨生, 安置禁錮’, 宗簿寺啓: ‘瓔、、瑔, 罪關宗社, 削去屬籍。’ 按、瑔諡狀, 、瑔同爲楊嬪出, 楊嬪卽乳養端廟者也。 端廟旣遜位, 六臣謀復不成, 與其事, 遂安置于咸陽, 丁丑錦城事發, 以楊嬪爲內應, 丙子俱及于禍。 中廟命復屬璿系, 明宗朝復爵, 逮肅廟朝, 端廟復位, 命賜諡禮葬。 至英宗甲寅, 宗簿寺啓: ‘錦城、和義、漢南、永豐之殉節, 無異六臣。’ 又有湖儒疏請以爲: ‘彼三臣者, 俱以王室至親, 授命不貳, 實與六臣等。 六臣則建祠腏享, 至於嚴興道之微賤, 尙且配侑於六臣, 顧此三臣, 其忠烈之巍煥, 可以貫日月撑宇宙, 褒尙之典, 反居嚴戶長之後。’ 臣等以前後文蹟考之, 則、瑔之於瑜、瓔一耳, 錦城、淸安之祠, 只配和義, 不配漢南、永豐者, 終不免爲欠典。 淸簡公^金時習, 五歲以神童, 被英廟殊知, 及端廟遜位, 托迹緇髡, 終身不仕。 先正臣李珥云: ‘標節義, 扶倫常, 雖謂百世之師, 近矣。’ 文貞公^南孝溫, 十八上書, 請復昭陵, 遂廢科擧, 嘗作《六臣傳》曰: ‘吾豈惜死, 沒大賢名乎?’ 貞簡公^元昊, 以集賢殿直提學, 端宗初, 退居原州, 逮昇遐, 入寧越, 服三年喪, 光廟特授戶議, 屢召終不至, 肅宗戊寅, 特命旌閭。 靖肅公^成聃壽, 校理熺之子也。 先正臣成渾《雜著》曰: ‘熺坐成三問事, 廢錮終身, 其子聃壽, 有至誠高識, 屛居坡州。 其時罪人子弟例除參奉, 以觀去就, 無不俛首服役, 而獨聃壽竟不拜。’ 當宁甲辰, 命贈職賜諡。 靖簡公李孟專, 早擢高第, 選置翰林, 景泰甲戌, 托聾瞽, 終身不仕, 當宁辛丑, 命贈諡。 貞節公^趙旅, 以太學生, 當端廟遜位, 揖諸生, 歸隱咸安郡, 優遊以終。 肅廟壬午, 特贈吏參, 當宁辛丑, 加贈吏判, 賜諡。 忠肅公^權節, 先正臣李珥所撰《栗亭亂稿》序云: ‘光廟潛龍時, 屢臨其第, 密諭大事, 佯聾不答, 鞱晦以終其身。’ 肅廟壬午, 江原道儒生上疏, 請額六臣祠, 以權節追配, 命旌閭。 甲申, 楊州儒生又上疏, 請建祠, 有贈職賜諡之命。 故集賢殿副提學^曺尙治, 按《羹墻錄》^《化俗篇》, 有曰: ‘世祖嘗論朴彭年等曰: ‘當代之亂臣, 後世之忠臣。’ 其下書: ‘副提學曺尙治, 上疏乞致仕, 命百官餞於都門外。’ 故副提學林泳撰《墓表》, 有曰: ‘公與成、朴諸公, 殊道同歸, 其遺事有曰: ‘世祖受禪, 退居永川, 終身坐不西向。 自題石面刻之曰: 「魯山朝副提學曺尙治之墓」, 又製《子規詞》, 以見其志。 故相臣趙顯命永川祠堂記云: ‘六臣死之, 公不死。 死者, 其跡彰而易見, 不死者, 其心微而難知。 故端廟復位之後, 不得與六臣幷食露梁之祠者, 蓋俟百世之公議。’ 故校理成熺, 卽三問之從叔父, 而靖肅公^聃壽之父也。 先正臣權尙夏所撰墓表云: ‘熺與三問, 協輔王室, 以死生, 不易其心。 三問等死, 熺亦受嚴鞫, 安置籍孥, 越三年蒙宥, 竟以忠憤死。’ 鄭保, 文忠公^夢周孫也。 六臣獄起, 往見其庶妹爲韓明澮妾者, 問公安往, 曰鞫罪人在闕。 保揮手曰: “當爲萬古罪人。 明澮卽上啓, 光廟親鞫, 將轘之, 以忠臣之孫, 特減死流配。 寧陽尉^鄭悰, 卽文廟駙馬也。 端廟乙亥, 竄光州, 逮丁丑, 錦城謀復事覺, 宗親府啓: ‘鄭悰、宋玹壽、、瑔之罪, 王法所必誅。’ 竟受後命。 英宗戊寅, 特命賜諡。 忠莊公^權自愼、忠毅公^金文起, 同死於六臣被禍之日, 逮英廟朝, 竝蒙節惠之典, 而礪良府院君^宋玹壽, 以端廟國舅, 謀復事覺, 與錦城同死, 尙未蒙贈諡。 彰節祠追配之典, 體例甚重。 如三大臣之卓絶, 朴仲林、成勝之兩世奇節, 宜可以腏食, 而位次相妨, 有不敢輕議。 安平及漢南、永豐, 旣與錦城, 同是兄弟, 則一體追配於竹溪之祠, 亦足以永樹風敎。 生六臣, 則幷享於死六臣, 夫孰曰不宜, 而就考先正臣宋時烈所撰六臣祠記, 有曰: ‘若以梅月堂、秋江腏享於此, 而又爲一壇於祠傍, 滾薦權自愼、宋石仝等, 略如公州^鶴寺之爲, 則事又完備。’ 已經先正定論, 無容更議, 而若四臣之一體淸節, 亦宜有幷配之公議, 其餘諸人, 無非殉身與自靖之卓然可稱者, 而係是祠典, 有非臣等所敢臆斷。” 是月庚戌, 史臣考實錄還奏, 益得其詳, 編成《御定配食錄》。 至是, 敎曰: “六臣之事, 所不敢詳, 而光廟有敎, 若曰後世之忠臣, 又論寧陽家事, 若曰不可以亂臣論。 大哉訓謨, 昭揭日星, 有以仰達權扶經之聖人微旨, 其闡揚而發揮之者, 豈不在於予後人歟? 向於輦路, 過愍節祠, 起曠想, 遣官致侑之, 仍欲以錦城諸人, 追配越中之祠, 命史官, 奉考名山之秘藏。 史官反面之日, 東伯以子規樓尋基形止狀聞焉。 巧湊一時, 事若待今, 理有不誣, 吁亦奇且異矣! 更思之, 世所稱生六臣、五宗英危忠大節, 咸推伯仲, 有不可容易取捨於或配或否之際, 則別求無於禮而合於禮之禮, 而行之, 不亦可乎? 往在肅廟戊寅追復莊陵也, 廷臣以六臣祠, 太近於丁字閣爲言, 引杜甫詩武侯祠屋長隣近之句, 命勿毁, 因岐貳之議, 竟未免移構, 是豈非欠事也闕典乎? 記冤之祭, 取之鶴寺設壝之制, 倣于㺚川, 以當時盡節諸人, 合造一祠版, 就本陵紅箭門外, 除地爲場, 每年寒食, 從與享之, 使邑宰, 建一屋子, 藏棄祠版, 以寓一體祀之義。 噫! 禮緣於情, 神人無間。 不惟彼烈烈精英之壹鬱不沫者, 永有依歸, 恭惟莊陵陟降, 亦必怡豫於芬苾焄蒿之時, 是擧也, 夫孰曰無稽乎? 其令本道及禮曹, 照此擧行。” 又敎曰: “莊陵盡節人配食之擧, 纔有傳敎, 而內閣有《配食錄》, 令該曹, 照此擧行。 祠版書以忠臣祠版, 祭品則飯一大盆, 素湯一大盂, 蔬果各一盤, 酒一盞爲式, 祭官則以附近察訪爲之, 趁禮官下去前, 造壇造版事, 分付該道, 例用祭文, 當爲製下, 此後本陵寒食祭受香時, 同爲齎去事, 亦爲分付該道及該曹。” 又敎曰: “今因莊陵事思之, 忠正之父朴仲林有諡, 而成勝以忠文之先, 與仲林同死, 尙獨漏焉, 尤豈非欠事乎? 申飭本館, 卽令議諡於設祭之前。 故忠臣朴季愚, 卽大提學堧之子, 堧之作樂, 與許文敬制禮之功, 爲伯仲, 則文敬之子詡與季愚, 同時辦命, 而詡則有諡, 季愚獨闕焉, 豈以未仕而然乎? 與禿同、尹生卓然之節, 不可湮泯, 竝施贈職之典。” 上又以端廟諸臣, 盡節則同, 而成就有大小, 位序有貴賤, 將設別壇, 命內閣獻議。 內閣啓言: “問議于大臣中原任閣臣, 則原任提學李福源以爲: ‘配食之典, 至嚴至重, 則今玆之命, 雖與廟庭從享, 差有間焉, 而此之贈爵諡享書院, 意義事體, 本自不同, 未立朝未授命者, 雖有卓然可紀, 恐合更加商量。 惟此嚴興道一人, 齒諸六臣之列, 少無歉焉。 曠絶之典, 以簡爲貴, 簡之則愈見光明, 廣之則或欠謹嚴。 至於餘人之別設一壇, 義同表章, 恩出愍惻, 與配食有異, 多少不必爲拘’ 云。 原任提學蔡濟恭以爲: ‘所下三冊中可合配食之人, 聖上親自抄出, 有若分金秤上, 無物或差, 此外諸人, 別設下壇之詢, 有以仰愍惻褒尙之聖心, 而其數則多, 其蹟則略。 若一例竝食於上項卓絶之人, 恐或有禮煩之嫌矣。 臣嘗來往嶺南, 略知先輩遺跡。 蓋錦城被禍, 在於順興, 故當其時傍近郡邑, 終身自廢, 塞北面東者, 往往而有。 今其子孫, 若聞有朝廷曠古之典, 則竊恐日後輦路上言, 益增紛紜, 不可勝施。 臣意則以今此所抄錄者, 斷然爲界限宜矣’ 云矣。” 敎曰: “昔我聖祖之敎, 以六臣之祠, 仍置本陵紅箭門內, 猗乎那歟! 惟玆議擧配食之典, 竊自附仰述之一端。 大抵壇腏與庭食, 固有間焉, 而從與享之則等耳。 兩大臣獻議, 或曰以簡爲貴, 或曰不可勝施, 皆出於鄭重。 今於取捨之際, 當以死于節, 而其蹟之著在國乘與陵誌者爲歸。 如六宗英也, 四懿戚也, 三相臣也, 三重臣也, 兩雲劍也, 六臣與六臣父若子中卓爾也, 許詡及慥, 朴季愚, 文敬、文獻之子若孫而尤逈異也, 順興府使李甫欽, 都鎭務鄭孝全也。 右三十一人, 定以配食, 祭儀有祝。 餘人之事未詳者, 坐收司者, 更合有酌量。 別壇之設, 大臣言誠有意見, 忠愍諸壇同壝異墠之已事, 是也。 如事未詳者趙遂良等八人、坐收司者金承珪等一百九十人, 祭于別壇。 噫! 拚死奮義, 戮力於終事之地, 惟嚴戶長一人, 忍以不在死節之列, 獨漏於配食乎? 金文正、宋文正之追躋于廟庭, 卽援倣之的據。 贈參判嚴興道, 俾與三十一人位序之次。 又若故處士金時習、太學生南孝溫, 棄倫以自靖, 潔身而不渝, 淸標苦守, 風勵百世, 竝闕於是祠之侑, 大是未遑之曠典。 兩臣一體附享於彰節祠。” 又敎曰: “莊陵配食事, 今因收議, 又有別設一壇之命。 三十二人之壇食, 當有祝, 而祭品依初下敎擧行。 祠版則書以忠臣之神, 令道伯書之, 至於別壇, 則造三版, 書以癸酉、丙子、丁丑死事人。 祭時, 以紙榜, 列錄姓名, 而朝士爲一版, 盲人、宦者、軍、奴爲一版, 女人爲一版, 位次在忠臣之左, 朝士位稍前, 盲、巫、宦者、軍、奴位稍降, 祭儀無祝, 祭品各飯一盆、湯一盆、酒一器, 獻官執事, 兼用於兩壇。”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