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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육신관련/사육신기록

견한잡록 사육신 기록

by 竹溪(죽계) 2006.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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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경, 견한잡록, 육신전 기록


세조(世祖)는 선위(禪位)를 노산(魯山 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上王)이라고 하니,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礩)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復位)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相國)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上疏)에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 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하였다.


원문

世祖受禪於魯山。尊魯山爲上王。朴彭年成三問柳誠源李塏河緯地兪應孚及金礩三問父勝。上王之舅權自愼等潛謀復上王。約議擧事之日。失其事機。金礩知事不濟馳告其妻父鄭相國昌孫。詣闕上變。金礩錄功。餘皆被誅。約事失機。金礩告變。皆天也豈人爲哉。當初世祖誅安平大君及大臣金宗瑞等。爲靖難功臣之時。彭年三問以集賢殿官宿衛。循例參勳。三問礩之功臣等論設宴會。三問獨不設。及其受禪。三問以禮房丞旨。持國寶失聲痛哭。世祖若疑其獨不設宴失聲痛哭之情。而詰問之。則豈不殆哉。三問之處事。可謂迂矣。彭年爲忠淸監司。凡於上達啓目。不書臣字。只稱朴某。非止一再。世祖若察悟而詰問其不書臣字之情。則豈不殆哉。彭年處事亦迂矣。欲擧大事。而處事之迂若此。安可保其不敗露乎。南秋江孝溫所撰六臣傳。罕傳於世。人之見者亦不多矣。彭年文章沖澹。筆法高妙。三問以世宗朝重試壯元。榮寵比至名望亦重。誠源塏緯地皆世宗寵愛之人。應孚武人宰相也。世祖爲領議政時。設宴於政府。彭年賦詩曰。廟堂深處動哀絲。萬事如今摠不知。柳綠東風吹細細。花明春日正遲遲。先王舊業抽金櫃。聖主新恩倒玉巵。不樂何爲長不樂。賡歌醉賦太平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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