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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세계/우리문학현장기행

노도에서 이룬 구운몽의 꿈

by 竹溪(죽계) 200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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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櫓島)에서 이룬 김만중의 꿈



서포(西浦) 김만중은 정치가로서보다는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은 소설가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남해의 외로운 섬인 노도에서 56세의 일기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생애는 정치와 연루된 유배와 복직의 연속이었다. 그는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으로서, 병자호란 때 삼전도 항복을 원통히 여겨 자살한 충렬공 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또한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만기의 아우이며 숙종대왕의 초비(初妃)였던 인경왕후의 숙부이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어머니 윤씨 또한 인조의 장인인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방(昉)의 증손녀이며, 이조참판 지(遲)의 따님이었다. 이처럼 친가와 외가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하던 사대부 집안의 권문세족이었기 때문에 서포의 삶은 태생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김만중은 현종6년(1665) 응시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지평, 수찬교리 등을 거쳐 동부승지까지 오르면서 정치적 삶을 시작하였으나 희빈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려는 숙종에 맞서 군주를 비판하다가 국토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남해의 노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굴곡 많았던 생을 마감하고 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운몽>, <사씨남정기>, <윤씨행장>은 모두 노도의 유배시절에 쓴 것으로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사씨남정기>는 양반사대부의 정부인이었던 사씨가 자식을 낳지 못한 관계로 교씨라는 첩을 맞아들인 것이 화근이 되어 온갖 고생을 다하다 나중에는 교씨의 악행이 탄로나 처형되고 남편과 다시 만나 백년해로(百年偕老)하였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인현왕후를 내치고 희빈 장씨를 중전의 자리에 앉힌 숙종의 처사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비판한 것으로 훗날 숙종의 마음을 돌리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씨남정기>와 더불어 항간에서 불려지던 노래에 “장다리는 한철이나 미나리를 사철이다”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인현왕후의 복위를 바라던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인현왕후의 복위에 큰 힘을 보태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구운몽>은 어머니 윤씨를 위로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소설의 새 시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소설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소설의 독자는 주로 서민층과 부녀자층이었으나 <구운몽>에 이르러 비로소 서민독자와 사대부독자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구운몽>이 우리 문학사에서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노도에서 김만중은 동네 사람들에 의해 `묵고 노자 할배'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졌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정기적으로 오가는 배가 없는 관계로 벽련마을의 어부에게 배를 빌려 들어가야 한다. 섬에 닿으면 남해문화원에서 세운 기념비가 보이는데 이곳을 돌아 산을 넘어가면 서포의 유배지였던 골짜기가 나오고 그가 먹었던 우물터를 만나게 된다. 그가 묻혔던 무덤은 육지로 이장을 해 가는 바람에 터만 남아있는데, 어디를 가더라도 시원한 바람과 넓고 푸른 바다를 품에 안을 수 있다. 정치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던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를 찾아 그가 지녔을 절망과 고뇌 그리고 어머님을 향한 그리움과 함께 주옥같은 작품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해 봄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