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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세계/우리문학현장기행

늙은 기녀의 설움이 서려있는 도근천 노래

by 竹溪(죽계) 2005.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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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기녀의 설움 서려 있는 '도근천 노래'



귀족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하던 고려사회는 후기에 이르면 무신란과 원나라의 지배 등으로 인하여 나라와 나라 구성원 전체가 피폐해지면서 점차 망국의 길을 달리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사회 구성원들의 타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려시대의 속요인 <쌍화점> 같은 노래에서는 외국인, 불교, 왕실층,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가 타락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노래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특히 원나라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외세의 약탈과 탐관오리의 부정으로 인해 일반 백성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은 국토의 맨 남쪽에 있는 제주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니 이를 드러내주는 `도근천노래'라고 하는 민요가 고려말의 이제현(李齊賢)이 지은 <소악부(小樂府)>에 한시로 번역돼 실리어 전하게 된다.

“도근천의 둑이 허물어져서 수정사 안에도 물이 출렁이는구나, 상방에는 이 밤에 아리따운 여성을 숨겨두고 주지승이 오히려 뱃사공이 되었네(都近川頹制水坊 水精寺裏亦滄浪 上方此夜藏仙子 寺主還爲黃帽郞).”

이 노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어 당시의 사회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근에 높은 벼슬을 하는 관리가 연회 자리에서 늙은 기생 하나를 희롱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승려들과는 어울리면서 사대부가 부르면 오는 것이 어찌 그리 늦느냐?'고 했다. 기녀가 대답하기를 `요즘 사대부들은 돈 많은 상인들의 딸을 취하여 두 집 살림을 차리거나 노비를 취하여 첩을 삼는데, 우리가 중과 속인을 구별하여 대한다면 어찌 입에 풀칠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부끄러워했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그 당시 사회는 부패한 관리와 원나라의 약탈로 인해 일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관료층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해가던 기녀들까지도 생활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웠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말기의 참담했던 현실을 짧은 노래 한 편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도근천은 한라산 북쪽에 위치한 제주시 외도동에 있는 하천으로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 포구가 형성되어 육지에서 오는 물자가 주로 드나들던 곳이었다. 도근천 포구의 서남쪽에 수정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수정사(水精寺)는 고려 충렬왕 30년(1304)에 원나라의 기황후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에 딸린 노비만 해도 130여 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수정사 앞을 흐르는 도근천은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아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달을 감상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를 지닌 월대(月臺)가 지금도 남아 있다. 중국인 원나라의 교통 중심지이며, 육지와의 통로이기도 했던 도근천은 원나라 지배 하에 있었던 고려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원나라의 기황후가 큰 사찰을 세워서 제주 착취의 근거지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정사터가 아직 남아 있고 월대 또한 남아 있으나, 수정사터는 제대로 발굴도 되지 않고 유적보존도 잘 되지 않는 상태여서 아쉬움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노래의 내용을 이해하고 난 후 이곳을 답사해본다면 무너진 절터에 초라한 모습으로 숨어 우리에게 들려주는 고려말기의 처참함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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