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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세계/우리문학현장기행

화석정

by 竹溪(죽계) 2021.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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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石亭(가을에 보는 한시)

아주 오랜 옛날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나루라는 뜻을 가진 더덜나루, 더덜나루물이라고 불렀으나 울퉁불퉁한 표주박처럼 구불구불하게 흐른다고 하여 瓠瀘河로 불리기도 했다. 더덜나루물을 한자어로 옮긴 것이 지금 쓰이고 있는 臨津江이다. 추가령 협곡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한탄강을 지류로 하는 임진강은 경기도 파주를 지나 하류에서 한강과 합쳐져서 바다로 들어간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100-1에 있는 화석정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유적이다. 고려 말에는 야은 길재가 거처했던 유허지였으나 조선전기에 문신 이명신이 이곳으로 거처를 정하여 살았는데, 별장의 북쪽 깎아지른 언덕이면서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신기한 꽃과 기이한 돌을 많이 심어두고 정자를 지어 즐겼는데, 후에 무너져서 폐허가 되었다. 그의 손자 이의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와 다시 정자를 지었다. 화석이란 이름은 이숙함(李淑瑊)이 1478년에 지은 것으로, 당나라 사람인 이덕유(李德裕)가 지은 평천장(平泉莊)에서 취하여 화석정이라고 했다. 당나라의 명신이었던 이덕유는 평천에 별장을 지었는데, 그곳의 수석(樹石)이 아름다워 평천수석기(平泉樹石記)를 짓기도 했다. 이것이 연유가 되어 별장을 평천화석(平泉花石)이라고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명신의 증손인 율곡 이이(李珥)가 중수하여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서 80년 동안 폐허가 되었으나 율곡의 후손들이 1673년에 다시 지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다시 없어졌는데, 1966년에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율곡이 8세에 지었다는 화석정 시를 보자.

숲속 정자에 가을이 늦었는데(林亭秋已晚)

시인의 뜻에는 다함이 없구나(騷客意無窮)

멀리 물줄기 하늘에 닿아있고(遠水連天碧)

서리 단풍은 해를 향해 붉어라(霜楓向日紅)

산은 외로운 둥근달을 토하는데(山吐孤輪月)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네(江含萬里風)

변방 기러기 어디로 날아가는고(塞鴻何處去)

그 소리 노을 사이로 사라지네(聲斷暮雲中)

이 작품에서 사람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감정도 없다. 다만, 자연과 하나 된 시인의 정서로 세상과 자연을 바라볼 뿐이다. 頷聯과 頸聯의 對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상쾌한 기분을 만들어 줌과 동시에 자연의 섭리가 얼마나 오묘한가를 느끼게끔 해준다. 특히, 起聯과 結聯에서 늦가을로 시작하여 저녁노을로 끝맺음을 하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라고 할 만하다. 화석정에 앉아 계절의 흐름을 바라보는 소객의 마음과 스스로 순환하면서 다양한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자연과 시간의 조화를 연결시킴으로써 시인의 생각에 끝이 없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으니 이 또한 자연의 섭리를 따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渾成을 보여주고 있다.

율곡은 평소 정자에 제자들과 함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먹여 두었다고 하는데, 훗날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년)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월 29일 밤) 억수같이 내리는 폭우 속에서 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배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율곡은 국사의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화석정에서 임진강 상류 쪽으로 약 12킬로 되는 곳에는 신라의 침입을 감시하면서 막기 위해 고구려에서 쌓았던 호로고루(瓠瀘古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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