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의세계/문학으로영화보기

[영화평] 민족의 공포와 울음에 대한 예술적 해석 -‘곡성(哭聲)’-

by 竹溪(죽계) 2016. 5. 30.
728x90
SMALL

민족의 공포와 울음에 대한 예술적 해석

-영화 곡성(哭聲)-

 

영화 곡성(哭聲)’에는 다음의 다섯 가지가 없다. 첫째, 주제, 둘째, 공포의 근원, 혹은 원인 셋째, 범인, 넷째, 해결자, 다섯째, 결론이 그것이다. 주제가 없기 때문에 난해하며, 공포의 근원이나 원인이 없기 때문에 더욱 무서우며, 범인과 해결자가 없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다. 마지막까지 가도 결론이 도출되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끝까지 보고나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것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알기 어렵거나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데 자신도 모르게 공감이 가는 영화가 바로 곡성(哭聲)’이다.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끌리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 영화를 잘 이해하면서 감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등에 대해 아래에서 짚어보고자 한다.

 

영화의 제목인 곡성(哭聲)’과 지명이면서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곡성(谷城)이 작품 속에서 가지는 의미를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곡성(哭聲)’에서 ()’은 큰 소리를 내면서 우는 것을 가리키고, ‘()’은 소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 말은 사람의 마음속에 슬픔이나 공포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큰 소리를 내서 우는 울음소리라는 뜻을 가진다. 영화에서는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과 공포가 밖으로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란 의미가 된다. 우리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면서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곡성(谷城)은 우리 민족이 삶의 터전으로 하고 있는 한반도를 나타낸다. 그렇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현재의 우리 민족이 겪으면서 안고 있는 그런 것들의 축소판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독은 한반도를 상징하는 지역으로 왜 하필이면 곡성을 택했을까? 그 이유는 이렇다. 한반도를 배()로 보았을 때 전라도의 남원, 곡성 지역은 무게 중심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중요하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한반도의 축소판으로 설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살펴야 할 것은 다섯 명의 주인공과 주변의 인물 캐릭터와 다양한 장치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것이다. 먼저 다섯 명의 주인공 캐릭터를 살펴보자. 시골 마을의 경찰이면서 딸 하나를 둔 한 가정의 아버지인 종구는 우리 민족의 현재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마을 전체를 지키면서 평화롭게 하고, 안전하게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종구는 경찰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거나 아예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다. 사건을 해결할 능력도 없으며, 범인을 잡을 힘도 없는데다가 누군가를 이용할 정도로 영악하지도 못한 경찰이자 가장인 그는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야만 겨우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그런 존재다. 이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는 우리 민족의 지도자 혹은 민족 전체가 처한 21세기의 현실을 반영한다. 현재의 우리는 자신들의 의지와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해결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들의 협조를 얻어야만 아주 작은 일이라도 성사시킬 수 있다. 경찰인 종구가 바로 우리의 현실적인 자화상이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며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 할지, 그리고 어떤 판단을 내려야할지에 대한 뚜렷한 생각이 없는 상태다.

 

두 번째로 살펴야 할 캐릭터는 종구의 딸 효진이다. 아직 어리지만 아버지보다 날카로운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 효진은 우리 민족의 미래 모습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판단력이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해나갈 수 있는 존재는 되지 못한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휘둘리면서 고통 받는 그런 존재가 바로 효진이다. 효진에게서 나오는 날카로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는 바로 우리 민족의 미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진은 종구 가족의 미래이며, 우리 민족의 미래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또한 현실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들어온 여행객으로 산에서 생활하는 남성 외지인은 군국주의와 외세를 상징하는 캐릭터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오염시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그런 존재다. 그의 최종 목표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의미하는 효진을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 마을에서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를 일으킨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세가 내세우고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서구세력의 상징이기 때문에 이것은 일본의 뒤에 더 큰 서구 세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예수가 부활하여 자신이 정말로 부활했음을 믿으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의 한 구절을 등장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표현은 일본인이 천주교의 상징인 양이삼과 대립하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무당의 신분으로 효진을 치료하기 위해 외부에서 들어온 일광(日光)은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부세력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친일분자, 혹은 외세 추종세력을 의미하는 캐릭터다. 일광이 일본에서 온 외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무당 옷으로 갈아입을 때 보이는 훈도시(일본인들의 전통 속옷)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광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전통과 혼을 부정하고 없애는 것으로 연결된다. 일광의 겉모습은 민족의 전통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훌륭한 사회의 지도자지만 실체는 외세의 앞잡이에 불과한 비겁한 인물이면서 사회의 독버섯과 같은 존재다. 그럼에고 불구하고 그 세력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인인지 아닌지가 분명하지 않은 존재로 등장하는 무명은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우리 민족을 지키고 보호해온 민족혼을 나타내는 캐릭터다. 여성으로 나타나는 민족혼은 과거의 존재이면서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효진의 머리핀이 영화의 요소요소에 등장하는 장면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명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있으면서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장승과 같은 것을 통해 현현하므로 구체적인 행동을 하거나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현재 모습인 종구가 인정하고 따를 때만 겨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자신을 믿어달라고 부탁하지만 종구가 무명을 믿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감으로써 비극을 맞이하고,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되고 만다. 그렇지만 외세의 앞잡이에 대해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존재이다. 일광의 접근을 매우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바로 그런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분석해야 할 캐릭터는 박춘배를 중심으로 하는 외세의 앞잡이 좀비세력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종구를 따르는 평범한 구성원들, 그리고 한의사, 신부, 피부과의사 등이다. 좀비세력은 앞잡이의 앞잡이로 아무런 생각과 판단력이 없는 존재이면서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행동파다. 일회용 소모세력에 불과하지만 실제에서는 이들의 행동이 가장 무섭다. 종구를 따르는 마을의 구성원들 역시 지도자를 따라 행동하는 민족의 구성원들로 행동을 하는 주체다. 이들 역시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능력은 뛰어나지 못한 존재들이지만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분연히 떨쳐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의사, 신부, 피부과의사 등은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관망 세력들이다. 이들은 누가 어떤 힘을 가지고 권력을 잡더라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 세력들이다. 오직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나 구성원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짚어야할 것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거나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곡성(哭聲)’에서는 사건이나 공포의 시작과 진행은 있지만 원인은 알 수 없으며, 해결의 방향이나 결론을 제시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작품 속의 캐릭터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와 아주 미약한 힘을 가진 존재, 혹은 세력들로 양분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미약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작품에서 주체를 담당하지만 이들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을 내리는 것 자치가 불가능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정도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바이며,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곡성(哭聲)’은 주제도 없고, 결론도 없으며, 해결책도 보이지 않고 제시하지도 않는다. 보는 사람이 알고 느끼는 만큼만 보라는 식의 불친절한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인지 능력의 차이에 따라 느끼는 것은 천차만별로 다를지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공감이 불같이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라고 글쓴이는 생각한다. 그것이 꼭 21세기 현재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