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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세계/문학으로영화보기

설국열차 리뷰

by 竹溪(죽계) 2013.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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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2013)

Snowpiercer 
7
감독
봉준호
출연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 에드 해리스, 존 허트, 틸다 스윈튼
정보
SF, 액션, 드라마 | 한국, 미국, 프랑스 | 126 분 | 2013-08-01

설국열차- 회의와 반성, 그리고 이상적인 혁명에 대한 바람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인 ‘설국열차’는 두 개의 공간, 단절과 소통, 민주화와 혁명, 인간과 자연 등의 코드를 중심으로 하면서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의 부작용으로 시작된 빙하기라는 설정을 통해 인류의 멸망과 희망을 그려낸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 영화는 지금까지 다양하게 있어왔던 재난영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재난영화의 일반적인 공식은 거대한 힘을 가진 자연의 대반격으로 인해 인류가 멸망에 가까운 고난을 겪는다는 것인데, 설국열차는 이러한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재난영화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국열차는 어떤 종류의 영화이며, 어떤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지구의 모든 동물을 멸망시킨 것과 비슷한 수준의 빙하기라는 무시무시한 상황이 영화 전편에 등장하지만 감독이 그려내고 있는 작품의 중심은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반란으로 불리는 혁명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설국열차는 혁명영화인가? 그렇게 보기에는 작품이 진행되는 과정이나 결말 등이 혁명을 그린 것으로만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억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커티스가 열차의 맨 앞에 있는 엔진까지 가지만 그것이 짜여진 각본에 따라 움직인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혁명세력 전체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설국열차는 어떤 종류의 영화이며, 작품에 담겨 있는 감독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이 점을 밝혀낼 수 있다면 영화를 보는 재미는 배가 될 것이며,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글쓴이가 보기에 설국열차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1. 설국열차는 ‘설국’이란 공간과 ‘열차’라는 두 개의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것이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이야기와 사건은 열차 안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작품의 중심공간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열차다. 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은 그 안에서 먹고 자며, 사랑하고 미워하며, 싸우면서 화해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열차의 앞부분에 있는 사람들과 뒷 부분에 있는 사람들의 계층적 차별은 바깥세상에서 사람들이 만들었던 사회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열차를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엔진을 지니고 있는 열차는 하나의 체계이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통제와 인구의 조절 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무임승차한 꼬리 칸의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강요한다. 엔진이 고장 나거나 멈춰서 열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모두 얼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열차에 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러한 통제에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나친 억압과 불평등을 견디지 못한 꼬리칸의 사람들은 신성하고 영원한 엔진이 있는 앞 칸으로 가서 핵심부를 점령하고, 독재자인 월포드를 처치하여 새로운 지도자를 세움으로써 민주적인 열차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들은 길리암과 커티스의 지도 아래 혁명을 일으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대접을 하는 열차의 지도층을 향한 것일 뿐 열차 자체가 자신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체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열차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상태이다.

 

설국이라는 공간은 그것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다. 그곳은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죽음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즉, 영하 90도에 이르는 열차 바깥의 세상은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나가서는 안 되는 그런 곳이다.

 

결국 설국은 절대공포의 공간이 되는데,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는 인류 전체가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어떤 무엇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핵일 수도 있으며, 가난일 수도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열차 안의 사람들과 우리들에게 절대 공포로 느껴질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여기에 도전하여 그것과 맞서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설국이라는 절대공포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열차의 보안설계자인 남궁민수에 의해서다. 남궁민수는 어떤 경우에도 열차를 튼튼하게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설비인 보안체계를 만든 사람이지만 지도자들에 의해 감금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상태다.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칸과 칸 사이의 문을 여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커티스 일행은 무력으로 감옥 칸까지 진출하여 남궁민수를 구해내고 문을 열어주는 조건으로 크로놀이란 화학물질을 제공하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열차라는 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원동력을 촉발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열차의 보안설계자인 남궁민수에 의해 18년 동안 열지 않아서 벽처럼 생각되던 바깥으로 향하는 열차의 문은 폭파되고, 폭발에서 살아남은 민수의 딸과 흑인 소년만이 밖으로 나가 흰 북극곰을 만나게 된다. 생명체가 살 수 없다고 믿었던 그곳에는 하얀 털을 가진 북극곰이 18년 동안 아주 의젓하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다고 생각해서 열차 안으로만 피신했던 인간과는 달리 북극곰은 처음부터 설국이란 환경에 맞서서 의연하게 살아남았으니 오랜 시간 동안 구속의 체제만을 강요받았던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공포이며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고 믿었던 설국의 공간이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생존을 위해서는 절대로 필요한 공간이며 엄청난 어려움을 견디더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믿었던 열차 안의 공간이 실제로는 누군가를 위한 하나의 체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거나 이용당하기만 했던 길리암, 커티스, 남궁민수 등의 기성세대는 결국 열차 안에서 살아나오지 못한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를 비롯한 기성세대의 죽음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2. 재난영화의 틀을 빌린 혁명영화

 

작품의 배경 설정으로만 본다면 설국열차는 인류의 멸망과 희망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재난 영화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의 틀을 구성하기 위해 빌려온 것에 불과할 뿐 영화를 통해 보여주려는 메시지는 전혀 다르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를 보면 재난영화 치고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혁명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린 상태에서 겨우 두 사람만이 열차 밖으로 나간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결말이 이처럼 허무하다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재난영화가 아니라 감독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의미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작품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열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과 주인공이 알게 되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왜곡된 진실을 통해 그 동안 제대로 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허상이었음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설국열차를 통해 감독이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정확하게 짚어내기 위해서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몇 가지 장치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첫째, 열차 둘째, 18년이란 시간, 셋째, 신성한 엔진, 넷째, 월포드와 주변 인물들, 다섯째, 투쟁 혹은 혁명의 불편한 진실 등이다.

 

1) 열차

 

작품에 등장하는 지구순환열차는 인류를 생존할 수 있게 하는 마지막 기관이다. 빙하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열차 안에서만 생활하면서 서로가 바라는 바를 추구하며 열차가 안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열차에는 균형을 내세우는 운영자, 혹은 지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질서가 있으며 숨겨진 수많은 진실들이 존재한다.

 

열차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꼬리칸 사람들의 안전과 인권 등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열차를 잘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꼬리칸은 열차라는 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계속해서 제공해주는 바탕이 되어 체계의 필요악이 된다. 따라서 열차의 맨 앞 칸의 지도자와 맨 뒤 칸 지도자는 모종의 밀약을 성립시키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통제해 나간다. 이들에게 있어서 열차는 하나의 기획된 체계일 뿐이다.

 

2) 18년이란 시간의 의미

 

열차를 벗어나면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꼬리칸 사람들은 그들이 내세우는 강요된 통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시간이 바로 18년이었다. 작품의 구성으로만 본다면 단순한 시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현실과 연결시키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순응하기도 하고 투쟁하기도 하면서 버텨왔던 20세기 군부독재의 기간이 된다.

 

그 18년 동안 우리들은 영원성을 지니고 있는 추진동력, 혹은 성장동력인 엔진을 차지하고 운영자인 월포드와 같은 독재자만 처치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열차의 맨 앞 칸까지 가서 월포드를 만난 투쟁의 지도자인 커티스는 길리암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지금까지 믿지 않았던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길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월포드를 처치하고 열차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겠다던 커티스를 중심으로 한 투쟁 지도자들 역시 열차라는 체계를 그대로 이어받아서 또다시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마지막에 가서야 느끼게 된다. 이 진실이야말로 바로 감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이며, 지금까지 그가 믿었던 것들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다.

 

독재자를 죽이고, 열차 전체를 차지하더라도 그것을 깨뜨리고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앞 시대의 체계를 이어받는 상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한 것이다.

 

20세기에서 지금에 이르는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을 바탕으로 18년만에 독재자를 심판했으나 그 체제는 뒤로도 상당히 오랜 동안 유지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정 수준의 민주화를 달성하기는 했으나 진정한 개혁을 이룩하지는 못한 상태라는 사실을 감지한 감독은 지금까지의 투쟁과 민주화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회의와 반성이 바로 열차를 깨부수고 설국으로 나가는 행위로 나타난다.

 

3) 신성한 엔진

 

열차를 움직이는 원동력인 엔진은 그 안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 신성한 것으로 인식되고, 그것을 만들고 운영하는 월포드는 신의 능력을 지닌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이런 종류의 언사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표현이란 생각이 금방 든다. 바로 세계의 모든 독재자들이 버릇처럼 내뱉으면서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그것이다.

 

특히 엔진이 멈추면 우리 모두는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는 적당한 수준의 희생이나 인권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구호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무한경쟁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도 이러한 성장 엔진을 강요받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어야 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 지금도 그러한 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우리가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독재의 체계를 완전히 깨뜨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다.

 

열차라는 체계를 깨부수고 나가면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정말로 영원한 엔진인 자연이 버젓이 존재하는 데 아직까지 우리는 그 껍질을 벗어나지 못한 채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화에서는 인간의 피로 그 결점을 보완하면서까지 영원성을 추구하는 엔진을 멈추게 하고 바깥으로 나가는 장면이 연출된다.

 

4) 월포드와 주변 인물

 

이미 앞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기차를 만들고 엔진을 관리하는 월포드란 인물은 독재자다. 그 독재자는 자신이 만든 체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적과도 손을 잡으며,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그 동안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그토록 싫어해서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정치적 독재자를 상징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독재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월포드는 백인이다. 그리고 총리로 등장하는 사람 역시 백인이며 각자의 생각에 따라 떠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열차를 호위하기 위해 괴물과 같은 위력으로 무력을 행사하면서 길리엄을 죽이는 군인 지도자는 나치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옆에 붙어서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총칼을 휘두르는 사람은 일본말을 하고 있다.

 

 

또한 꼬리칸의 지도자인 길리엄 역시 월포드와 피부색이 같으며 친구 사이다. 그리고 투쟁 혹은 혁명을 이끄는 실제 지도자인 커티스 역시 백인인데, 그래서 그런지 월포드에 의해 차기 지도자로 지목받아서 붉은 종이에 쓰인 쪽지를 받고 그 지시대로 움직인다.

 

 

한편, 커티스가 이끄는 혁명에 동참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은 동양계와 흑인계다. 적외선 안경을 쓰고 혁명대의 74퍼센트를 죽이려고 하는 무장 행동대원들과 맞서기 위해 횃불에 불을 붙이는 아이는 첸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아이를 찾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마는 여인의 아들이면서 엔진을 유지하는 도구로 혹사당하는 아이로 인류의 희망을 쏘아 올리는 티미는 흑인계이다. 그리고 체계를 깨뜨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남궁민수와 아버지를 도와 문을 폭파하고 설국에 첫발을 내디디는 요나는 바로 한국계이다.

 

 

월포드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20세기의 인류 사회와 우리 사회를 혼란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장본인들이다. 인종문제를 꺼내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20세기의 현실이 그랬고, 작품 속에 나타는 현상이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볼 수밖에 없다.

 

 

월포드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에 대한 감독의 생각은 이들이 살아 있고, 이들이 만든 체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에는 혹독한 억압의 체제 아래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설국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감독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회에 대한 갈망이고 희망인 것이다.

 

5) 투쟁 혹은 혁명의 불편한 진실

 

꼬리칸의 사람들은 열차 안에서 생활하는 18년 동안 자신들의 상황을 개선해보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지배자들에 의해 반란으로 치부되기는 하지만 앞 칸으로 가기 위한 여러 차례의 시도, 열차 밖으로 탈출하려는 시도 등 매우 다양한 투쟁을 기울인다.

 

 

그들은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며, 최고의 탈출로라고 생각하고 이 투쟁에 온 힘을 기울였다. 영화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커티스 역시 이러한 생각으로 열차 내의 혁명을 이끌어왔고, 엔진 칸으로 가는 데까지 성공한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힘을 바쳐 성공시킨 혁명의 마지막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매우 불편한 진실들이었다. 사람들이 신성하고 영원하다고 말하던 엔진은 인권을 무시한 상태에서 어린 아이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는 상태였으며,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길리암 역시 모든 것을 월포드와 상의하면서 철저하게 짜여진 각본에 의해 자신을 엔진 칸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 그를 경악하게 한다.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룩한 혁명의 결과에 분노한 커티스는 그 동안 미친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남궁민수에게 바깥으로 통하는 열차의 문을 폭파시키라고 한다. 자신이 믿고 따랐던 것들과 그 동안의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감독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체계를 통째로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한 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면서 진행시켜왔던 우리 사회의 혁명과 민주화 뒤에 얼마나 불편한 진실이 감추어져 있는지를 알리고 싶었으며, 그것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3. 설국과 곰의 관계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 되지 않지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설국과 곰이라고 할 수 있다. 빙하기로 대표되는 설국은 지구 전체를 생명체가 없는 상태로 만드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영화를 잘 살펴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의미를 포착해낼 수 있다. 영하 90도라는 빙하기에 해당하는 정도의 상태에 빠진 지구는 인간에 의해 개발된 CW-7이라는 화학물질에 의해 공포의 환경으로 바뀌고 말았지만 그것을 원 상태로 돌려놓는 것은 바로 자연이라는 사실이다.

지구를 포함한 인류 전체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주체가 다름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함과 동시에 자연에 순응하면서 그것과 맞선다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공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무서워서 18년 동안 열차 안에 숨어있기만 했던 인류와는 달리 정면으로 혹한에 맞서 싸우면서 의연히 살아남았던 흰색의 곰을 통해 형상화된다. 그리고 열차 안에서 태어나 인류 멸망의 공포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던 요나와 티미에 의해 설국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18년 동안 꿋꿋한 의지로 설국의 환경과 맞서 싸우면서 살아남았던 곰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빙하기가 닥쳤을 때 곰은 과거의 환경을 유지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것과 맞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관한 존재로 그려졌다.

 

 

누군가에 의해 조성된 절대공포를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개척할 수 있는 존재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흰 털을 가지고 있는 곰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회의와 반성을 통해 감독이 지향하고자 하는 이상의 혁명이며, 자신이 우상으로 여기는 어떤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어떤 나라일 수도 있고, 어떤 인물일 수도 있으니 각자의 개인적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4. 2013년의 우리 현실과 설국열차

 

재난 영화가 아닌 설국열차는 그 동안 우리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추진해왔던 투쟁과 혁명, 민주화가 회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통해 통렬한 반성을 할 때만이 새로운 사회를 향한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18년간의 군부독재, 독재자의 죽음으로 붕괴될 것 같았던 그 체계는 다른 독재자들에 의해 대체되었고, 꼬리칸의 지도자와 같았던 존재 역시 그 체계 안에서 민주화를 진행시킬 수 있는 정도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지도자 또한 군부독재 때 형성된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지도력을 유지해나갔고, 인정하기 싫기는 하지만 이러한 현실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감독의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설국열차는 우리의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하면 한층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면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감독의 이상을 보여주려 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평을 마무리하면서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회의와 반성을 통해 한 단계 앞으로 나가자는 주장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동안에 기울여왔던 우리 모두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결과도 있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재도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함께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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