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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세계/우리문화칼럼

압구정의 의미, 유래

by 竹溪(죽계) 2008.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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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의 의미를 아십니까?

 

강남문화의 1번지, 부자들이 사는 대표적인 동네 등의 의미를 가지는 말 중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던 지역을 든다면 단연 서울의 압구정동일 것이다. 지금의 동호대교의 남쪽 일대를 일컫는 말인 압구정동은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던 별장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 별장의 이름이 바로 압구정인데,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가장 크고 화려함을 자랑하는 별장이었다는 기록이 왕조실록에 전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지명으로만 남아서 부()의 상징으로 뜻이 바뀌어 있는 상태다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간송미술관 소장)

이런 이유 때문에 압구정은 현대에 와서 정착된 의미인 부의 상징으로만 인식될 뿐 그것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그것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표기는 어떻게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한 번 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압구정이란 정자 혹은 별장을 지은 사람은 조선전기 세조 때의 문인으로 세종의 고명대신인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죽이고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사건인 계유정난을 일으킨 중심인물이면서,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켜서 세조의 왕권을 더욱 탄탄하게 해준 장본인인 한명회(韓明澮)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세운 여러 가지 공으로 인하여 세조때 부터 벼슬을 하기 시작한 한명회는 도승지,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두루 거쳐 영의정까지 지냈으며, 세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예종과 성종의 두 임금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서 임금의 장인인 국구(國舅)가 되어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기도 했다.

 

한명회가 얼마나 권세를 부렸는지는 성종실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압구정을 지은 후 그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압구정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치라고 했으며, 중국 사신이 오기만 하면 반드시 그곳에 초청해서 접대를 하곤 했는데, 어느 때인가 잔치를 할 때는 국왕만 쓰게 되어 있는 용봉(龍鳳)차일을 성종의 허락도 없이 몰래 가져다 쓸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으니 이름의 끝에 이라는 글자를 붙어 있는 것만 보면 압구정은 별로 크지 않는 아담한 정자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림으로 남아있는 자료를 토대로 해서 볼 때 이것은 정자라기보다는 화려한 별장에 해당되는 루()나 각() 정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루나 각 등은 화려하게 치장할 수도 있고, 사람이 거주할 수도 있으면서 높은 자리에서 자연을 바라다보면서 감상할 수 있는 정도의 집을 지칭하기 때문에 그림으로 남아 있는 압구정의 모습이 바로 루나 각 정도의 규모이기 때문에 정자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한명회는 이 압구정을 매우 사랑해서 이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에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도, 권력의 자리에서 떠나 있을 때도 늘 압구정에서 거처를 옮기지 않았으며,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이곳에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겸재 정선의 압구정도(비단에 담채 20.2 × 31.3㎝ 간송미술관)

 

지나치게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던 압구정이 지금에 와서도 화려함을 자랑하는 부의 상징으로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이런 현상을 미리 예견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죽은 한명회가 지금의 압구정 문화현상을 보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예상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압구정에 대한 오해 중에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것의 표기와 뜻에 대한 것이다. 압구정은 한자어로서 한명회의 호이기도 한데, 그것의 표기는 狎鷗亭이라고 써야 맞는데, 많은 사람들이 鴨鷗亭으로 알고 있거나 그렇게 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몇 년 전에 필자는 인천공항을 간 적이 있었는데, 압구정에서 공항까지 오가는 공항리무진버스에 커다란 글씨체로 鴨鷗亭이라고 표기한 것을 보고 너무나 놀라서 서울시 버스 운송조합에 건의하여 고친 적도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도 압구정에 대해 잘못 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압구정을 狎鷗亭으로 쓰지 않고 鴨鷗亭으로 쓰게 되면 그 뜻은 오리와 갈매가가 있는 정자란 말이 되어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이름이 되고 만다. 말로 하는 우리야 별 상관이 없지만 공항버스 같은 것에 잘못 표기해서 다닌다면 외국인 중에서도, 특히 중국인들이 본다면 무식하다고 비웃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표기를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압구정의 정확한 표기가 狎鷗亭이기 때문에 이 말의 뜻은 갈매기를 가까이 하면서 친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한 가지 놓치기 쉬운 의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의 뜻이다.

 

은 일반적으로 친하다, 가까이 한다 등의 뜻으로 이해되지만 이 글자의 진짜 속뜻에는 오만함과 방자함이 함께 들어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이 글자는 높은 위치에 있는 어떤 존재가 낮은 위치에 있는 어떤 존재를 상하 관계에서 사랑해주는 정도의 친함이며, 가까움이라는 속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압구정의 뜻은 사람인 한명회는 높은 자리에 거들먹거리면서 존재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갈매기를 사랑해주는 방식이 되어서 사람과 자연이 상하관계에 놓여 있는 친밀함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우습게 보는 한명회의 오만함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한명회가 압구정을 지은 후로는 이곳에 많이 오던 갈매기가 전혀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狎鷗亭의 뜻이 오만 방자하여 갈매기를 오지 못하게 눌러 버렸다는 의미의 押鷗亭으로 바꾸어서 부르는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한명회가 압구정이라는 별장을 짓자 많은 사람들이 시를 지어 아부하였는데, 판사 벼슬을 하는 최경립(崔敬立)이 지은 시는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운 풍자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했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다.

 

군주의 은근함을 세 번이나 받아 특별한 사랑이 도타우니, 비록 정자가 있다고 해도 와서 놀 수 있는 겨를이 없도다, 가슴 속에 진정으로 교사한 마음 없어 고요하기만 하다면, 벼슬길을 바로 앞에 두고도 갈매기와 친할 수 있을 것이네(三接慇懃寵渥優 有亭無計得來遊 胸中政有機心靜 宦海前頭可狎鷗). 이 시를 본 한명회는 자신을 흉보는 시라고 생각하여 정자에 걸지 않았다고 한다.

 

정자의 명칭이 가지고 있는 속뜻 하나만으로도 당시의 한명회가 세상을 얼마나 무시했으며, 얼마나 안하무인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그가 얼마나 무식한 사람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압구정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반구정(伴鷗亭)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한층 분명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伴鷗亭은 조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황희가 임진강 변에 세운 정자로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와 관광명소 쓰이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쓰인 반()은 두 존재가 완전히 평등한 위치에서 가깝게 친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짝할 반이라는 훈과 음을 가지고 있는 글자인 을 쓰고 있다

 

 

경기도 파주 임진강변에 있는 반구정

 

그러므로 반구정은 황희라는 인간과 갈매기라는 자연이 평등한 위치에서 대등하게 친구가 되는 뜻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인간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잘 보여주는 명칭이 된다. 따라서 반구정과 압구정은 글자 하나로 인하여 뜻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비록 글자 하나의 차이기는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볼 때 압구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주 화려한 거리로 바뀌었는데, 반구정은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주고 있으니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매우 교훈적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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