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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의세계/황진이

화담 서경덕에 대한 역사기록(1)

by 竹溪(죽계) 2006.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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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 서경덕에 대한 기록


1. 국조보감 제26권 선조조 3 8년(을해, 1575)


○ 고(故) 처사(處士) 서경덕(徐敬德)을 의정부 우의정에 증직하였다. 경덕은 개성(開城) 사람인데 가세(家世)가 외롭고 한미하였으며 농사를 생업으로 하였는데 몹시 가난하였다. 경덕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였고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 일찍이 어버이의 명령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곧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화담(花潭) 곁에 집을 짓고 도의(道義) 공부에 마음을 쏟았는데, 그의 학문은 오로지 궁리(窮理)ㆍ격물(格物)을 일삼아서 혹은 여러 날 묵묵히 앉아 있기도 하였다. 그가 궁리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려면 천(天) 자를 벽에 써놓고서 연구하였고 이미 궁구한 뒤에는 다시 다른 글자를 써놓고 차분히 생각하고 힘써 연구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여러 해를 이와 같이 하여 자신도 모르게 환히 꿰뚫은 뒤에 독서하여 터득한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스승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공부하는 데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 그러나 후세 사람이 나의 말을 따르면 나와 같은 수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학설은 대부분 횡거(橫渠)의 학설을 주장하여 정자(程子)ㆍ주자(朱子)와는 약간 달랐으나 마음에 자득(自得)하여 만족스럽게 스스로 즐기며 세상의 시비(是非)ㆍ득실(得失)ㆍ영욕(榮辱)에는 털끝만큼도 개의하지 않았으며 집에 먹을 것이 자주 떨어졌으나 태연스럽게 지냈다. 어느 날 그의 문인(門人) 강문우(姜文佑)가 찾아왔었는데 경덕이 못가에 앉아 있었다. 시간은 이미 정오가 되었으나, 함께 학문을 토론하면서 전혀 피곤한 모습이 없었다. 문우가 부엌에 들어가 집안 사람에게 물었더니 전날부터 양식이 떨어져 밥을 짓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중묘조(中廟朝) 때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명묘조(明廟朝) 때 호조 좌랑에 증직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정 의논이 증직을 더 높여 표창하려고 하였다. 박순(朴淳)과 허엽(許曄)은 그의 문인이었으므로 매우 강력히 주장하였다. 상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덕의 저술(著述)을 보니 기수(氣數)에 대하여 논한 것이 많고 수신(修身)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으니 이는 수학(數學 상수학(象數學))인 듯하다. 그의 공부가 의심스러운 곳이 많은데 무엇 때문인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경덕이 항상 말하기를, '학자들이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사선생(四先生)을 거쳤으므로 말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기설(理氣說)만은 미진한 점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공부는 끝내 의심스러우나 지금 사람들이 그에 대해 칭찬하고 미워하는 것이 모두 공평함을 잃었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그의 공부는 학자들이 법으로 삼을 바가 못 됩니다. 그의 학문은 대체로 횡거에게서 나왔는데, 신은 그가 저술한 것이 성현(聖賢)의 설과 꼭 들어맞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의 이른바 학자라는 자들은 성현의 말만을 모방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얻는 것이 거의 없지만 경덕은 깊이 사색하고 독자적인 조예를 가져 스스로 터득한 묘리가 많으므로 언어나 문자만을 힘쓰는 학문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따랐으므로 이 증직이 있었다.


2. 국조보감 제20권  중종조3  39년(갑진, 1544)


○ 5월. 서경덕(徐敬德)을 후릉 참봉(厚陵參奉)으로 삼았다. 서경덕은 송도인(松都人)이다. 화담(花潭) 가에 집을 짓고 무리를 모아 강학(講學)하였는데, 학문을 연구하여 스스로 터득한 것은 횡거(橫渠)와 유사하였고, 가슴속이 툭 트인 것은 강절(康節)과 유사하였다. 유수 송겸(宋㻩)이 효행(孝行)으로 계문하여 정려(旌閭)하려 하였다가 서경덕이 관아에 가서 간절히 사양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이때에 이르러 천거되어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3. 갑진만록(甲辰漫錄)


○ 경술년 10월에, 송도(松都) 유생 하위량(河偉量) 등이 상소하여 서경덕(徐敬德)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는 예조에 내려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였다. 회계(回啓)에,

“좌상 이항복(李恒福)은 ‘일찍이 듣건대, 서경덕은 총명이 월등한 자질로, 학문이 끊어진 황무지에서 태어나 학문은 철저히 연구함을 힘쓰고 지식은 사색에서 얻어졌다 하니, 이야말로 단번에 도를 얻은 사람이라 할 수 있고, 또한 당대의 호걸지사(豪傑之士)라 하겠습니다.

같은 고을의 여러 선비들이 그의 유풍(遺風)을 듣고 칭찬하는 것이 또한 이런 까닭이겠습니다. 오직 유감스런 일은 신이 어려서부터 게을러 학문을 잃었고, 늦게야 후회하여 조금 경전(經傳)을 익혔으나, 애를 써도 능하지 못하고, 다만 바로 앉아 허물을 반성하는 지엽적인 일과 청소하고 응대(應對)하는 법에 불과할 뿐, 그 고인(古人)을 벗으로 하고 옛것을 품평하는 견식은 모두 어두운 바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런 내용의 논의에 대해서 비록 한두 가지 얕은 소견이 있다 하더라도 망령되게 제 의견을 주장할 수 없으므로 일체 전인(前人)들의 설을 따라서 근거를 삼고자 합니다. 선왕(先王) 초년에 사대부의 습속이 크게 변화되고 석학들이 다 모였으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때에 의론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모두가 신처럼 지리멸렬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국조(國朝)의 여러 학자 중에서 네 명의 신하를 표출해서 문묘에 배사(配祀)하기를 청한 것도 그 말이 허술한 것이 아니고, 그 뜻도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깊이 믿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항상 오현(五賢)의 숫자에 대해서는 감히 많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적다고 감히 꺼리는 것도 아닙니다.

뒤에 근세 유학자들의 논의를 보면, 서경덕이 자득(自得)한 기미가 많다 하여 이황(李滉)과 같이 거론하며, 그 존숭함이 극에 달했다 하겠으나, 담일청허(淡一淸虛)하다는 논의에 이르러서는, 전적으로 일기장존(一氣長存)의 설에서 나와 기(氣)를 이(理)라고 인식한 병폐가 있기 때문에, 이황이 서경덕을 공격한 이론은 매우 그의 병폐에 적중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어찌 그 첫머리의 사색이 너무 지나쳐 그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에 있어서 《대학(大學)》이나 선유(先儒)들의 설과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깊은 뜻은 신이 천박한 학문으로 귀로는 비록 얻어 들은 바가 있으나, 미처 터득함이 있지는 못하니, 지금 어찌 감히 망령되이 운운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애당초 문묘에 종사(從祀)할 사람을 논정할 적에 당시 선비들이 그토록 많았는데도 당시 어떠한 의견에 근거하여 이 네 사람을 정하고 다섯 명으로 하지 않았는지 신이 알 수 없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으므로 지금도 감히 함부로 정론(定論)할 수가 없습니다.

관직에는 비록 크고 작은 것이 있으나 견식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유림의 큰 일은 자급을 따라서 높게 된 자의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상소로써 널리 묻고 찾아서 결정한다면 부족할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우상 심희수(沈喜壽)는, “신이 어려서부터 죽은 교리 강문우(姜文佑)에게 구두(口讀)를 배웠는데, 문우는 일찍이 자기의 스승 화담(花潭)서경덕의 도덕과 학문에 탄복하여 말하기를,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마음이 고명(高明)하여 실로 열심히 노력하여 천지를 두루 보는 깊은 식견이 있다.」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도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당시에야 어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필 수 있었겠습니까. 차차 장성하여 선생과 장자(長子)들이 이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되었는데, 모두 「효제 충신(孝悌忠信)하고 청명 순수(淸明純粹)하며, 스승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은 철저히 연구하기를 힘써 한 가지도 빠뜨림이 없고, 굳건히 힘써서 신명(神明)에 감통(感通)하며, 높은 덕과 넓은 업적이 독실하고 빛이 났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담집(花潭集)》 중의 원리기(原理氣) 등의 여러 설을 보면, 깊이 들어가서 자득(自得)한 묘리는 전현(前賢)이 밝히지 못한 바를 밝혀서 사문(斯文)에 끼친 공이 크옵니다. 우리 나라 유생들이 태산과 북두칠성처럼 받들기 지금까지 오래된 것은 마땅한 일이가 하옵니다.

우리 선종대왕(宣宗大王)께서 크게 존숭하여 포증(褒贈)을 추행(追行)한 것이 지극히 높았으니, 지난 여러 현자들을 돌이켜 보건대, 마땅히 종사(從祀)의 전례(典禮)에 함께 의논하여 서로 차이가 없게 하여야 할 터인데, 끝내 그렇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후생 말학(後生末學)으로 그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오나, 대개 한때의 크고 넓은 의론이 이 사람의 학문은 상수(象數)를 주로 삼아서 사색(思索)이 너무 지나쳐 현묘(玄妙)하고 적멸(寂滅)한 데에 가까운 것 같고, 일생을 이 일에 힘을 기울여 스스로 이르기를, 궁극심미(窮極深微)하였다고 하나, 마침내 이(理) 자의 해석이 불투명하여 기이하고 오묘한 것을 이야기하여도 형기(形氣)의 거칠고 약한 한 편에 떨어져 있음을 면치 못하여 주렴계(周濂溪)나 정이천(程伊川) 형제 등 여러 학자의 설과 자못 서로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는가를 의심하는 이가 있다고 하여 숭상하는 일이 이처럼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 기(氣)가 있기 전에 이 이(理)가 먼저 있다고 하니, 본연의 성(性)에 따라 철저히 연구하는 공부를 다한다면 필경에는 성(誠)과 정(正)의 경지에 똑같이 들어가게 될 것이오니, 무슨 크게 《대학》의 가르침과 어긋남이 있겠습니까.

소강절(邵康節 옹(雍)의 시호)의 학술과 덕행을 겸비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이 비록 두 정씨(程氏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의 매우 귀하게 여기는 바는 되지 못하였으나, ‘원회운세(元會運世)’ 네 글자만으로 천지 만물을 꿰뚫었으니 어찌 일세에 뛰어난 호걸이 아니며, 백세에 남을 명유(名儒)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소강절이 주렴계ㆍ정명도ㆍ정이천ㆍ장횡거(張橫渠)ㆍ주회암(朱晦菴)과 함께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지 못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새로 큰 법을 세워 크게 교화(敎化)를 밝히는 날을 당해서,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차별이 없을 수 없으니, 과연 유림에 있어 하나의 흠이 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이는 실로 국가의 중대한 일이오니 어찌 40년 이래에 모든 사람이 같은 소리로 하루가 급하다고 서두른 5현신(賢臣)의 일을 끌어대어 다만 몇 사람의 대신에게만 물어서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널리 조정의 의론을 모아 여러 사람의 찬성을 기다린 뒤에 일체 거행함이 타당하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영부사(領府事) 윤승훈(尹承勳),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 등이 모두 널리 조정 의론을 모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일이 중대하니, 서서히 뒷날을 기다리오.”

하였다.


5. 백사별집 제3권  의(議) 무제(無題)


○ 신이 일찍이 듣건대, 서경덕(徐敬德)은 총명(聰明)이 뛰어난 자질로 도학(道學)이 끊어진 황무(荒蕪)한 지역에서 태어나 학문을 하는 데는 물리(物理)를 궁구하는 것을 힘쓰고, 앎을 이룸은 생각하여 얻는 것으로 말미암았으니, 이는 일거에 도(道)에 이르렀다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또한 한 시대의 호걸지사(豪傑之士)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향(同鄕)의 많은 선비들이 풍문을 듣고 그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또한 반드시 이 때문인 것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신은 소년 시절에는 나태하여 학문을 못하였고, 늦게서야 비록 뉘우칠 줄을 알고 경전(經傳)을 약간 익히기는 했으나, 제대로 하지는 못하면서도 잗단 노력이나마 했던 것은 고작 똑바르게 앉아서 허물을 반성하는 말단적인 일과 쇄소 응대(灑掃應對)의 절차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옛사람을 벗으로 삼고 옛일을 평론하는 식견은 전혀 어둡기 때문에 무릇 이런 논의에 있어서는 설령 한두 가지 좁은 견해나마 있더라도 감히 함부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지 않고 일체 전인(前人)의 설(說)을 찾아서 표적(標的)으로 삼고자 합니다.

선왕(先王) 초년에 사습(士習)이 크게 변하여 큰 선비들이 다 모였었으므로,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일찍이 ‘그때의 수많은 논자(論者)들은 모두가 신처럼 학문이 지리멸렬한 사람들이 아닌데, 그들이 국조(國朝)의 여러 유신(儒臣)들 가운데서 사신(四臣)을 표출(表出)하여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한 것은 말도 초초하지 않고 뜻도 우연한 것이 아니다.’라고 여기어 마침내 깊이 믿어 의심하지 않았고, 항상 오신(五臣)의 숫자에 대해서는 감히 많다고 꺼리지도 않았고 또한 감히 적다고 혐의스럽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뒤에 근세(近世) 유신(儒臣)들의 논의를 보건대, 서경덕이 자득(自得)한 기미(氣味)가 많다 하여 이에 이황(李滉)과 병칭(竝稱)하였으니, 서경덕을 추존(推尊)한 것이 극에 달했다 이를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담일 청허(淡一淸虛)의 논(論)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오로지 일기 장존(一氣長存)의 설(說)에서 나와서 기(氣)를 이(理)로 잘못 인식한 병통이 있다 하여, 이황이 서경덕의 논을 공파(攻破)한 것을 가지고 그의 병통을 잘 맞추었다고 여기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첫머리의 사색(思索)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그 격물 치지(格物致知)의 과정에 있어 《대학(大學)》 및 선유(先儒)의 설과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오묘한 뜻에 대해서는 신이 말학(末學)으로서 귀로는 비록 들을 수 있으나 마음으로는 미처 얻지 못한 것이니, 지금 어찌 감히 함부로 무어라 운운하겠습니까.

오직 당초에 종사(從祀)의 반열을 논정(論定)할 적에 한때의 선비들이 그토록 굉박(宏博)하였는데도 당시에 무슨 소견으로 이쪽만 취하고 저쪽은 빠뜨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정히 이런 곳에 있으나, 지금 또한 감히 함부로 정론(定論)을 내리지도 못하겠습니다. 관직은 비록 대소(大小)의 차이가 있으나 식견에는 고하(高下)의 차이가 있고, 또 유림(儒林)의 대의(大議)는 연한(年限)에 따라 높은 지위에 이른 자들이 감히 단독으로 결단할 문제가 아니니, 지금 이 소문(疏文)을 가지고 널리 자문하여 결정한다면 거의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상께서 재결하소서.


6. 상촌선생집 제55권 선천규관(先天窺管)


화담(花潭) 서씨(徐氏 서경덕(徐敬德))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 대수(大數)를 뽑아 내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3백 60에 시(時)이다. 3백 60을 곱하면 12만 9천 6백 년이 된다.

○ 12만 9천 6백 년에 일(日)이다. 12만 9천 6백 년을 곱하면 1백 67억 9천 6백 16만 년이 된다.

○ 1백 67억 9천 6백 16만 년을 월(月)이다. 자승(自乘)하면 2만 8천 2백 11조(兆) 9백 90만 7천 4백 56억이 연(年)이다. 된다.

○ 2만 8천 2백 11조 9백 90만 7천 4백 56억을 12개의 기간으로 나누면 하나의 기간이 13억 9천 9백 68만을 기준수로 하는 1백 67억 9천 6백 16만[一十三億九千九百六十八萬之一百六十七億九千六百一十六萬]이 된다.1백 67억 9천 6백 16만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셈할 경우 하나의 기간이 13억 9천 9백 86만이 다시 살펴야 할 것임. 된다.

○ 1백 67억 9천 6백 16만을 10으로 나누면 각각 16억 7천 9백 61만 6천 년이 된다.

○ 매년 6일이 더 나아갈 경우 12만 9천 6백 년에서는 12만 9천 6백이 6개인 셈이다. 그래서 12만 9천 6백 년 동안 6일을 더 나아간다고 한 것인데, 이는 12만 9천 6백을 1일로 계산하면 바로 6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 1백 67억 9천 6백 16만에서 매년 6일을 더 나아갈 경우 1백 67억 9천 6백 16만이 6개인 셈이다. 그런데 이를 10으로 나눌 경우 각각 16억 7천 9백 61만 6천 일 되는 것이 6개인데 이런 것을 10개 합치면 60일이 되는 것이다.

○ 12개의 기간으로 나눌 경우 한 기간이 13억 9천 9백 68을 기준수로 한 1백 67억 9천 6백 16만 년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6일씩 더 나아간다면 그 기간의 수와 같은 일수(日數)를 6개 얻게 된다.

○ 기간의 수를 10개로 나누면 1억 3천 9백 96만 8천 년이 되는데 이 수와 같은 일수를 얻는 것이 6개이니 이런 것 10개를 합쳐 계산하면 60일이 된다.

○ 기수(朞數)는 3백 66일이요 세수(歲數)는 대략 3백 60일이요 역수(曆數)는 3백 54일에 여분이 있다.

○ 자월(子月)에서 사월(巳月)까지 쓸데없이 남는 음(陰)과 양(陽)이 각각 6개이고 오월(午月)에서 해월(亥月)까지 쓸데없이 남는 음과 양이 각각 6개이다.

○ 3백 60일에 쓸데없이 남는 음·양의 수 24를 합하면 3백 84효(爻)와 일치된다. 체수(體數) 3백 84에서 건(乾)·곤(坤)·이(離)·감(坎) 괘(卦)의 24효를 빼면 3백 60이 되니 이 3백 60이 용수(用數)이다. 다음 3백 60을 10으로 나눈 뒤에 그것을 3으로 떼낸 것이 교수(交數)이고 7로 곱한 것이 용수(用數)이니, 이렇게 해서 2백 52일이 다시 용수(用數)가 된다. 이것을 절반으로 나누면 1백 26일이 되는데 6분(分)이 더 나아간다. 1일에는 밤과 낮이 있으므로 12분(分)을 이룬다. 그리고 10일마다 1분씩 나아가 모두 4개월 동안에 12분이 나아가게 된다. 나머지 6일은 6리(釐)가 더 나아가는데 교수(交數)의 6일과 합치면 모두 12리가 나아가게 된다. 분은 1일의 3분의 1이다. 4개월을 세 곱하면 1년 3백 60일이 되고 12분을 세 곱하면 36분이 되는데, 3분을 1일로 하는 만큼 일(日)로 환산하면 12일이 된다. 또 12리를 세 곱하면 36리가 되는데, 10리가 1분인 만큼 분으로 환산하면 3분하고 6리가 남게 된다.

○ 대체로 볼 때 1년 3백 60일에 나아가고 물러가고 하는 것이 6일씩이니 모두 12일이 된다. 그리고 남는 수[餘數]와 교수(交數)를 합하면 36일이 된다. 그런데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을 18리씩 하여 모두 36리가 되니 1일은 6리가 된다. 윤일(閏日)로 남는 것이 모두 12일이니 남는 수와 교수의 나머지 일수를 미루어 나가면 모두 1일이 6리가 된다.

○ 용수(用數)로 기능하는 2백 52일에 교수(交數)인 12일을 더하면 2백 64일이 되는데 이것이 실제로 쓰는 숫자이다. 15년 동안의 용수의 날짜가 쌓여야만 10년의 일수를 채울 수 있다.

○ 10년 동안 나아가고 물러가는 사이에 60일이 윤일로 남는다. 10년 동안 남는 수와 교수(交數)인 36일을 축적하면 3백 60일이 된다. 10년 동안 1일에 6리씩 축적해 나가면 모두 10일에 60리가 된다. 10리를 1분(分)으로 환산하면 모두 6분이 되고 3분을 1일로 환산하면 2일이 된다. 그러면 모두 12일이 되는데, 이는 1년의 윤일의 수를 꼭 알맞게 채우고 있다.

○ 12만 9천 6백 년에서 남는 수와 교수의 날을 헤아려 나갈 경우 1년은 3백 60일인 만큼 1만 2천 9백 60년 동안 6일씩 나아가게 되고 따라서 1만 2천 9백 60년 동안 7만 7천 7백 60일이 되는데, 6일씩 물러가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2만 9천 6백을 일(日)이라 할 경우 1일씩 남는 것이 2만 5천 9백 20이 되는데 이 수는 12만 9천 6백 일의 10분의 2에 해당한다. 12만 9천 6백 년의 모든 남는 수와 교수의 윤일은 12분씩 나아가고 물러가는데 1일 2분이다.

○ 12만 9천 6백을 3으로 나눈 것이 교수(交數)이고 7로 곱한 것이 용수(用數)이다. 12만 9천 6백을 10으로 나누면 각각 1만 2천 9백 60이 되고 여기에 7을 곱하면 9만 7백 20년이 되고 이를 반으로 나누면 4만 5천 3백 60년이 되는데 1년에 6일씩 나아갈 경우 4만 5천 3백 60일이 6개 있게 된다. 하루에는 낮과 밤이 있으니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하루에 모두 12일이다. 3천 6백 년마다 1일이 나아간다면 4만 3천 2백을 일수로 쳐서 한 단위로 삼을 경우 4만 3천 2백 년에 12일이 나아가게 된다. 나머지 2천 1백 60년 동안에는 나머지 6분(分)이 나아가는데 교수의 2천 1백 60년을 합하면 모두 12분이 나아가게 된다. 9만 7백 20년은 곧 용수가 기능하는 2백 52일이 축적되어 얻어진 것이다. 말하자면 2백 52일의 용수에 매일 3백 60의 숫자가 부연된 것이니, 2백 52에 3백 60을 곱하면 9만 7백 20의 수를 얻게 된다. 나머지 2천 1백 60년 동안에 나머지 6분이 나아간다고 했는데 이것은 즉 나머지 6일로서 6리(釐)씩 나아가는 것이 축적되어 얻어진 것이다. 나머지 6일에 매일 3백 60의 수가 부연되면 2천 1백 60년이 된다. 교수 2천 1백 60년 역시 6분씩 나아간다고 했는데 이것은 즉 교수 6일로서 6리씩 나아가는 것이 축적되어 얻어진 것이다. 교수 6일에 매일 3백 60의 수가 부연되면 역시 2천 1백 60년이 되고 6리 역시 그렇게 할 경우 2천 1백 60리가 된다. 3백 60리를 1분으로 하면 6분이 된다. 30리를 1일로 하면 2천 1백 60리에서 72일을 얻게 되는데 매일 3백 60일이 부연되면 2만 5천 9백 20일이 된다.

○ 4만 3천 2백을 3배하면 12만 9천 6백 년이 되고 남는 수와 교수인 12분을 3배하면 36분이 된다.

○ 4만 3천 2백 년에 12일 나아가는데 12일을 3배하면 36일이 되고 3일을 1일로 치면 모두 12일이 된다. 36분에 대해서도 3분을 1분으로 치면 모두 12분이 된다. 12만 9천 6백 년에 6일 나아가고 6일 물러나는 것이 윤일(閏日)이 되며 나머지 분(分)도 6분 나아가고 6분 물러난다. 그러므로 소운(小運)의 변화는 12와 30을 곱하고 60에 이르게 되는데 그러면 3백 66일을 나아가게 된다. 물러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 용수(用數)는 9만 7백 20년인데 이것이 축적되어 2만 8천 2백 11조 9백 90만 7천 4백 56억이 된다. 이것은 소운에서 60번 변화하여 얻어진 것이다.

○ 3백 60에 3백 60을 곱하면 12만 9천 6백 년이 되고, 12만 9천 6백에 12만 9천 6백을 곱하면 1백 67억 9천 6백 16만 년이 된다.

○ 1백 67억 9천 6백 16만에 1백 67억 9천 6백 16만을 곱하면 2만 8천 2백 11조 9백 90만 7천 4백 56억 년이 된다.

○ 2만 8천 2백 11조 9백 90만 7천 4백 56억을 12개의 기간으로 나누면 하나의 기간이 13억 9천 9백 68만을 기준수로 하는 1백 67억 9천 6백 16만이 된다. 1백 67억 9천 6백 16만을 하나의 단위로 하여 셈할 경우 하나의 기간이 13억 9천 9백 68만이 된다.

○ 1백 67억 9천 6백 16만을 10으로 나누면 각각 16억 7천 9백 61만 6천 년이 된다.

○ 12만 9천 6백 년에 6일을 더 나아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12만 9천 6백을 1일로 쳐서 셈할 경우 6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 1백 67억 9천 6백 16만을 1일로 쳐서 셈할 경우 6을 얻게 된다. 10으로 나누면 각각 16억 7천 9백 61만 6천이 된다. 이것을 1일로 쳐서 셈할 경우 6일을 얻게 된다. 나뉘어진 날 10개를 합하면 60일이 된다.

○ 2만 8천 2백 11조 9백 90만 7천 4백 56억을 12기간으로 나눈다.

○ 하나의 기간은 13억 9천 9백 68만을 기준수로 한 1백 67억 9천 6백 16만이 되는데 6일씩 나아갈 경우 그와 같은 숫자를 6개 얻게 된다. 이것을 또 10으로 나누면 각각 1억 3천 9백 96만 8천을 기준수로 한 1백 67억 9천 6백 16만이 되는데 6일씩 나아갈 경우 나뉘어진 날 10개를 합하면 60일이 된다. 기간이 모두 6개이니 3백 60일을 나아가게 되는데 여기에 나머지 교수(交數)인 6분(分)을 더해 축적해서 셈할 경우 3백 66일을 나아가게 된다.

○ 13억 9천 9백 68만을 기준수로 한 1백 67억 9천 6백 16만을 1일로 하면 6분(分)을 얻게 된다. 이렇게 나뉘어진 것을 10배하면 60분이 되어 6일을 얻으니 6개의 기간에는 36일이 된다.

○ 12만 9천 6백 년에 6일씩 나아가는데, 12만 9천 6백 일을 1일로 하기 때문에 10일을 물러나는 이유는 아래 숫자와 같다.

○ 1백 67억 9천 6백 16만에 60일 나아가는데 1만 2천 60일을 1일로 한다. 1원(元)의 일수(日數)도 이와 같은데 4천 6백 65만 6천 분(分)을 1일로 한다.

○ 3백 60을 12만 9천 6백에 곱하고 다시 여기에 3백 60일을 얻게 되면 1백 67억 9천 6백 16만이 된다. 3백 60을 1일로 칠 경우 4천이라는 일수를 얻게 된다.

서씨(徐氏)가 추산(推算)한 것이 명쾌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여기에 기록하여 후학들이 참조할 자료로 제공한다.

화담 서씨의 이름은 경덕(敬德)이고 자(字)는 가구(可久)인데 개성부(開城府) 사람으로서 본관은 당성(唐城 남양(南陽)의 고호(古號))이다. 우리 나라는 본디 역학(易學)이 발전되지 않았으므로 유선(儒先) 중에 그 누구도 핵심 부분을 계발시켜 준 이가 없었고 논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저 글 뜻과 같은 부분적인 것을 해설하는 정도로 그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화담 혼자서 멀리 강절(康節 송(宋) 소옹(邵雍))을 이어 곧바로 그 경지를 엿보았으니 정말 세상에 드문 호걸이라 하겠는데, 상기(上記) 해설들은 우리 나라 제유(諸儒)가 미처 내놓지 못한 것들이었다.


7. 성소부부고 제24권  설부 3(說部三) 성옹지소록 하(惺翁識小錄下)


공헌왕(恭憲王 명종(明宗)의 시호) 때에 사인(士人) 이언방(李彦邦)이란 자가 노래를 잘했다. 가락이 맑고 높으니 감히 그와 재주를 겨루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최득비여자가(崔得霏女子歌)를 불렀는데, 온 좌석이 모두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

서경(西京)에 유람했는데 교방(敎坊) 기생이 거의 이백 명이 되었다. 방백(方伯)이 열지어서 앉힌 다음, 노래에 능하거나 못하거나를 가리지 않고 도상(都上)에서 동기(童妓)까지 한 사람이 창(唱)하면 언방이 문득 화답했는데, 소리가 모두 흡사했으며 막힘이 없었다.

송도(松都) 기생 진랑(眞娘)이 그가 창을 잘한다는 것을 듣고서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언방은 자신이 언방의 아우인 양 속이면서,


"형님은 없소. 그러나 나도 제법 노래를 하오."

하고 드디어 한 곡조 불렀다. 진랑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나를 속이지 마시오. 세상에 이런 소리가 어찌 또 있겠소. 당신이 바로 진짜 그 사람이요. 모르기는 하지마는 면구(綿駒)와 진청(秦靑)인들 이보다 더 잘하겠소?"

하였다.


진랑(眞娘)은 개성 장님의 딸이다. 성품이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했다.

일찍이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풍악(楓岳 금강산의 별칭)에서 태백산(太白山)과 지리산(知異山)을 지나 금성(錦城)에 오니, 고을 원이 절도사(節度使)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는데, 풍악과 기생이 좌석에 가득하였다. 진랑은 해어진 옷에다 때묻은 얼굴로 바로 그 좌석에 끼어 앉아 태연스레 이[虱]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여러 기생이 기가 죽었다.

평생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墅]에 가서 한껏 즐긴 다음에 떠나갔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 선사(知足禪師)가 30년을 면벽(面壁)하여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하였다. 죽을 무렵에 집사람에게 부탁하기를,


"출상(出喪)할 때에 제발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

하였다. 지금까지도 노래하는 자들이 그가 지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또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진랑이 일찍이 화담에게 가서 아뢰기를,


"송도(松都)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

하니 선생이,


"무엇인가?"

하자,


"박연폭포와 선생과 소인(小人)입니다."

하니, 선생께서 웃었다. 이것이 비록 농담이기는 하나 또한 그럴듯한 말이었다.

대저 송도는 산수가 웅장하고 꾸불꾸불 돌아서 많은 인재가 나왔다. 화담의 이학(理學)은 국조(國朝)에서 제일이고, 석봉의 필법(筆法)은 해내외에 이름을 떨쳤으며, 근자에는 차씨(車氏) 부자와 형제가 또한 문명(文名)이 있다. 진랑도 또한 여자 중에 빼어났으니, 이것으로써 그의 말이 망령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8.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권  개성부 하(開城府下) 개성부 하


【사원】 계성사(啓聖祠) 영종 16년에 성균관에 거둥하였다가 건립하기로 발의하였다. 묘정비(廟庭碑)가 있는데 경도(京都) 편에 상세하다.

○ 송양서원(崧陽書院) 재남산(在男山) 동쪽에 있는데, 포은(圃隱)의 옛터이다. 선조(宣祖) 계유년(1573)에 건립하였고 을해년에 사액(賜額)하였다. 문충공(文忠公)의 초상화와 묘정비가 있다. 정몽주(鄭夢周) 경도 문묘(文廟) 편에 보인다. 우현보(禹玄寶) 자는 원보(原寶)이고,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벼슬은 시중(侍中) 단산백(丹山伯)이었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서경덕(徐敬德) 자는 가구(可久)이며, 호는 화담(花潭)이고, 본관은 당성(唐城)이다. 벼슬은 후릉 참봉(厚陵參奉)이었는데,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김상헌(金尙憲) 경도 문묘 편에 보인다. 김육(金堉) 자는 백후(伯厚)이며, 호는 잠곡(潛谷)이고,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벼슬은 영의정이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익(趙翼) 수원(水原) 편에 보인다.

○ 화곡서원(花谷書院) 화담(花潭)의 옛터에 있는데, 광해주 기유년(1609)에 세웠고, 인조(仁祖) 을해년(1635)에 사액하였다.서경덕(徐敬德) 위에 보인다. 박순(朴淳) 자는 화숙(和叔)이며, 호는 사암(思庵)이고,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벼슬은 영의정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허엽(許曄) 자는 태휘(太輝)이며, 호는 초당(草堂)이고,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벼슬은 부제학이었다. 민순(閔純) 자는 경초(景初)이며, 호는 행촌(杏村)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벼슬은 장령이었다.


9. 연려실기술 제9권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중종조의 유일(遺逸)

서경덕(徐敬德)


서경덕은, 자는 가구(可久)이며, 호는 화담(花潭)이요, 본관은 당성(唐城)이다. 신묘년에 진사가 되어 후에 참봉이 되었고, 좌의정을 추증 받았다. 시호는 문강(文康)이고, 병오년(1546)에 죽으니 나이 58세였다. 기묘년에 현량과의 천거를 받았으나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손자 우신(佑申)은 무과에 올라 벼슬이 남병사(南兵使)에 이르렀다.

○ 아버지는 수의부위(修義副尉) 호번(好蕃)으로서, 대대로 풍덕(豊德)에 살다가 개성으로 장가들어 거기에서 살았다. 공은 15세가 가까워 비로소 글을 읽을 줄을 알았다.

○ 어머니 한씨(韓氏)가 일찍이 공자의 사당에 들어간 꿈을 꾼 후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며, 과단성이 있고 굳세고 정직했다.

○ 송도의 화담(花潭)에 살았는데, 총명하고 굳세고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었다. 18세에 비로소 《대학》을 읽었는데,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 오로지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하고, 경전을 가져다가 읽어본즉 옛 성현의 뜻에 절로 통하는 것 같았다. 이에 더욱 침잠하고 수양해서 성리(性理)의 학문으로 자임하였으며, 더욱 역경(易經)에 대한 연구를 깊이 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거상(居喪)할 때에 소금과 나물도 먹지 않고, 평생을 특별히 남과 다른 행동을 하지 않으며, 시골 사람과 이야기할 때에도 기이함을 보이지 않았다. 부친의 명으로 일찍이 신묘년 진사에 나가서 합격했으나, 그 뒤로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중종 말년에 대신의 천거로 후릉(厚陵) 참봉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마침내 포의(布衣)로 마쳤다. 저술한 것으로 <태허설(太虛說)> <원리기(原理氣)>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스스로 호를 복재(復齋)라 했고, 배우는 제자들은 화담선생(花潭先生)이라 일컬었다. 《패관잡기》김안국(金安國)이 천거해서 참봉을 제수했다.

○ 어렸을 때 이웃 집 선비에게 《서전》을 배우는데 기삼백(朞三百) 대목에 이르자, 그 책장을 가르치지 않고 다음 책장으로 넘어갔다. 공이 그 까닭을 물으니 선비는 말하기를, “온 세상에 이 장을 아는 이가 없어서 사람마다 읽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에 공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만일 실지로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옛 선비들이 무엇 때문에 이 경전에 실었으랴 하고 그 구두만 떼어 주기를 청해서 15일 동안에 몇천 번을 외워 자연히 터득하여 알게 되었다. 《전언왕행록》

○ 오로지 이치를 연구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혹 여러 날 동안을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 궁리하는 방법은,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려면 천(天)자를 벽에 써놓고 연구하다가 이미 궁리한 뒤에는 다른 글자를 써서 연구하였으니, 그 정밀하게 사고하고 힘써 구하는 자세는 다른 사람이 따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가 되자 모든 이치에 환하게 밝아졌다. 그의 학문은 글 읽는 것을 일삼지 않고 오로지 이치를 찾는 것을 위주로 했으며 이미 이치를 터득한 뒤에 글을 읽어서 증명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나는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에 공력이 이렇게 몹시 들었지만 뒷사람들은 내 말대로 하면 공력을 나같이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였다. 그의 이치를 논하는 것은 장횡거(張橫渠)의 학설을 주장한 것이 많고 정자ㆍ주자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으나 자득의 즐거움은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었다. 항상 만족해 하고 기뻐해서 세간의 득실과 시비의 영욕이 모두 그의 가슴 속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석담일기》

○ 물건의 이치를 궁리할 적에 목록을 나열해 써 놓고 차례로 끝까지 궁리해 나갔는데 바야흐로 한 물건을 생각하다가 끝내지 못하고 변소에 가면 변소에서 오로지 계속 생각하여, 얼마 후에 이해하고 일어났으니 이렇게 힘들여 공부하기를 3년 동안 했다. 낮이면 밥먹는 것을 잊고 밤이면 잠자는 것을 잊었으며, 혹 며칠동안 문을 닫고 나무판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아무것도 깔지 않았다. 기혈이 막혀 무슨 소리를 들으면 문득 놀래곤 하였다. 이에 삼남 지방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1년 만에 돌아오니 그후로는 몸이 충실하고 건강해서 움직이나 쉬나 모두 편안하였다. 산수의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문득 일어나 춤추었고 용모가 밝고 쾌활했으며 눈이 샛별처럼 빛났다. 《전언왕행록》

○ 전혀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아서 자주 먹을 것이 떨어져 굶주림을 참는데 다른 사람들로서는 감히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그는 태연히 처하였다. 문하생 강문우(姜文祐)가 쌀을 가지고 와서 뵈니 경덕이 화담(花潭)위에 앉아서 해가 한낮이 지나도록 이야기하는 것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조금도 피곤한 빛이 없었다. 문우가 부엌에 들어가서 그 집 사람에게 물으니,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서 밥을 짓지 못했다.” 하였다. 《석담일기》

○ 논의한 것이 때로 옛 성현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황은, 그를 유학의 정통은 아니라고 하였다. 《석담일기》

○ 이웃 사람들이 그 덕에 감화해서 서로 다투는 일이 있으면 관청에 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판결을 요청하였다.

○ 명종조에 호조 좌랑을 증직했고 선조조(宣祖朝)에 더 증직할 것을 청했는데 박순(朴淳)ㆍ허엽(許曄)은 그의 문인이기 때문에 그 의논을 더욱 힘써 주장했다. 이때 임금이 이르기를, “경덕이 저술한 책을 내가 가져다가 본 즉 몸을 수양하는 일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그러면 이것은 수리학(數理學)이 아닌가. 그 공부가 의심할 점이 많다.” 하니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경덕의 학문은 횡거(橫渠)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의 저술한 글이 성현의 뜻에 꼭 맞는다는 것은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깊이 생각하고 조예가 심원하여 스스로 터득한 묘리가 많아 문자나 언어의 학문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명하여 우의정을 증직했고, 시호를 문강(文康)이라 하였다. 《석담일기》

○ 허엽이 매양 공을 존경해서, “기자(箕子)의 정통을 이을 만하다.” 하였는데, 이이가 경덕의 학문이 횡거에게서 나왔다고 논했다는 것을 듣고 허엽이 이이를 책하여, “그대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깊이 근심하는 바이다. 만일 화담의 학문이 소강절ㆍ장횡거ㆍ정자ㆍ주자를 겸했다고 하면 옳을 것이니, 그대가 전심하여 10여년을 글을 읽은 뒤에 화담의 지위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이이가 말하기를, “만일 내가 글을 더 오래 읽으면 읽을수록 공의 의견과 반대될 것이오.” 하였다. 이보다 먼저 허엽이 이황에게 말하기를, “화담은 횡거에게 비교할 만합니다.” 하니 이황은, “화담이 지은 글이 무엇을 횡거의 <정몽(正蒙)>에 비할 것이며 무슨 글을 횡거의 <동서명(東西銘)>에 비할 수 있는가” 하니 허엽이 아무 말도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히 과장하였으니 알지 못하고 망녕되이 말한 것이었다. 《석담일기》

○ 화담은 바탕이 질박한 것 같으나 실상은 허탄하고 그 학문은 높은 듯하나 실상은 잡되어서 그 이기(理氣)를 의논하는 것이 무질서해서 전혀 알 수가 없다. 《퇴계집》

○ 일찍이 시를 지어,


글 읽는 당일에는 경륜을 뜻했더니 / 讀書當日志經綸

나이 늙어 다시 안씨(顔氏 안자)의 가난함을 달게 여겼네 / 歲摹還甘顔氏貧

부귀는 다툼이 있는지라 손을 대기 어렵고 / 富貴有爭難下手

산수는 금하는 이 없으니 몸을 편안케 하리 / 林泉無禁可安身

산나물 뜯고 낚시질하여 그런대로 배를 채우고 / 採山釣水堪充服

달을 읊고 바람을 노래하니 마음이 상쾌하네 / 咏月吟風足暢神

학문이 의심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니 참으로 쾌활하구나 / 學到不疑眞快活

헛되이 백년 살다간 인간이 되는 것을 면했구나 / 免敎虛作百年人


라고 하였으니 그 뜻의 있는 바를 상상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촌집(象村集)》

○ 조용문(趙龍門)에서 시 한수를 가지고 와서 보이는 자가, “이것은 화담이 지은 글입니다.” 하였는데 그 시에,


몸을 중천(中天)에 세워도 부끄럽지 않으니 / 將身無愧立中天

흥취가 맑고 화한 지경에 들어감이로다 / 興入淸和境界邊

내 마음이 경상(卿相)을 박하게 여김이 아니라 / 不是吾心薄卿相

원래 본 뜻이 임천(林泉)에 있음이로다 / 從來素志在林泉

성(誠)ㆍ명(明)의 학업은 여유있게 칼날을 놀리고 / 誠明事業恢遊刃

현묘(玄妙)한 기관(機關)을 잘 수렴하도다 / 玄妙機關好着鞭

경(敬)을 위주로 하는 공부는 바야흐로 하늘을 대하는 듯하니 / 主敬工夫方對越

창에 가득한 바람과 달은 스스로 유연하구나 / 滿窓風月自悠然


하였다. 용문은 그의 자부함이 지나친 것을 매우 의심해서 드디어 그 시를 차운하여


지극한 사람의 마음과 행적은 본래 하늘과 같은데 / 至人心迹本同天

작은 지혜들은 구구하게 한쪽 끝에서 막히는도다 / 小智區區滯一邊

공연히 초헌(軺軒)과 예복이 구속이 된다고 말하지만 / 謾說軒裳爲桎梏

성시(城市)가 바로 임천(林泉)임을 누가 알랴 / 誰知城市卽林泉

배는 급한 물을 만나면 돌리기 어려우며 / 舟逢急水難回棹

말은 먼길에 오르려면 채찍질을 받아야 하느니 / 馬在長途合受鞭

성경(誠敬)이란 진실로 용이하게 얻는 것이 아니어든 / 城敬固非容易做

그대의 아름다운 글귀를 외우고 보니 과연 그런가 묻고 싶노라 / 誦君佳句問其然


라고 지어서 소매 속에 넣고서 화담을 찾아 보고, “가구(可久)의시를 보니 시도 매우 성명(誠明) 사업이 이미 이루어져서 아득히 하늘에 이르렀도다. 가구의 학문이 이 경지에까지 도달하였으니 어찌 우러러 보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화담은 종시 변명하여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여 용문도 드디어 화답하는 시를 내보이지 않았다. 그 뒤에 《화담집(花潭集)》이 간행되었는데 이 시가 그 속에 있고 글 제목에,<조경양(趙景陽)에게 주노라>하였으니 경양이란 용문의 자(字)이다. 그 시를 전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용문의 아들 공빈(孔賓) 등이 일찍이 들은 화담의 변명을 가지고 이제신(李濟臣)에게 말하기를, “실상은 지금 재상 아무개가 젊을 때 호기로 이 시를 지어 희롱삼아 화담의 글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후청쇄어(鯸鯖瑣語)》

○ 허엽이 일찍이 7월에 공이 거주하는 화담에 가는데 이미 6일째 가을 장마가 계속되어 물이 넘쳐 건너지 못하더니 날이 저물자 물결이 조금 줄어 겨우 건너서 공의 처소에 이르렀다. 이때 공은 거문고를 타면서 글을 높이 읊는데 허엽이 자기 먹을 저녁밥을 지으려 하니 공은 말하기를, “나도 역시 먹지 않았으니 함께 밥을 지으라.” 하였다. 종이 부엌에 들어가 보니 이끼가 솥 속에 가득하였다. 허엽이 괴이히 여겨 그 연고를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물에 막혀 집사람이 6일째 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오래 먹지 않아서 솥에 이끼가 생겼나보다.” 하였다. 그러나 허엽이 그 얼굴을 우러러 보니 조금도 굶주린 빛이 없었다. 《지소록》

○ 진랑(眞娘 황진이)은 개성에 살던 여자 소경의 딸이다. 성품이 쾌활해서 남자와 같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하며 일찍이 산수 간에 놀기를 좋아하며 풍악산으로부터 태백산ㆍ지리산을 지나 금성(錦城)에 이르렀는데 마침 그 고을 원이 잔치를 베풀어 감사를 대접하고 있었다. 노래하는 기생이 좌석에 가득한데 진랑이 떨어진 옷, 때묻은 얼굴로 바로 그 상좌에 나가 앉아서 이[蝨]를 잡으면서 태연히 노래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여러 기생들은 기가 질렸다. 평소에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매양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화담의 거처를 찾아 실컷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노선(知足老禪)은 30년을 벽을 쳐다보고 앉아서 공부했어도 역시 나에게 무너졌지만 오직 화담선생은 여러 해 동안을 친하게 지냈으나 마침내 흔들리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성인(聖人)이로다.” 하였다. 일찍이 화담에게 말하기를, “송도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 하였다. 공이 묻기를, “무엇이 삼절인고?” 하니, 진랑은 말하기를, “박연폭포와 선생과 저입니다.” 하자 공이 웃었다. 《지소록》


유우(柳藕)서봉처사(西峰處士)ㆍ《조야첨재》에 공이 죽은 것을 특히 썼다.


유우는, 자는 양청(養淸)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인데, 어떤 이는 진주(晋州)라고도 한다. 사섬시 정(司贍寺正) 자빈(自濱)의 아들이니 나이 65세에 죽었다.

○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우기를 청해서 뜻을 가다듬고 부지런히 공부해서 성명(性命)의 학문에 마음을 두고 육경을 공부하며 염락(濂洛)의 학문에 통했다. 실제적인 일에 힘쓰고 헛된 이름을 피해서 사람들이 아는 이가 없었다. 그 학문이 점점 노성(老成)하자 덕행도 더욱 높아져서 고금에 통달하고 천지 사이에 읊조리며 천운(天運)의 변화에 밝고 세상의 변천을 관찰하여 호연히 은둔하고 유연히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일찍이 배우는 자에게 말하기를, “사방 나라의 이름이 모두 그들의 품성에 따라 그 이름을 구별했으니 남만(南蠻)은 벌레로써 이름을 지었고, 북적(北狄)은 개로써 지었고, 서융(西戎)은 창으로써 지었고, 동이(東夷)는 사람으로써 지었으니, 동쪽 땅이 세 지방과 다른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한 활을 더했기 때문에 활은 잘 쏘고 글에는 게으른 것이다.” 하였다. 또 허노재(許魯齋)의 출처를 의논하여 말하기를, “후생들의 알 바는 아니나 다만 맹자가 제(齊) 나라ㆍ양(梁) 나라 임금들에게 왕도를 행하라고 권한 것을 가지고 평한다면 그 요체는 잃지 않았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김동봉(金東峰 김시습)은 대현(大賢)인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대현이란 안자(顔子)처럼 바가지로 물 마시며 누추한 골목에 살아도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는데 동봉은 호방하고 쾌활한 점은 있으나 아마 안자와 같은 이러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명신록》

○ 공은 겉으로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고 맑고 화평하고 장중하여 남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남의 착한 것은 말하기 좋아하고 나쁜 말은 입에 내지 않았다. 자기가 먼저 실행한 뒤에 남에게 미치니 사람들도 즐거이 따랐다. 처와 자식이 굶주림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여도 태연하게 처하여 깨끗이 쓸고 단정히 앉아 오직 후배들을 가르치는데 힘썼으니 인재를 기르고 키우는데 공로가 실로 많았다. 천문ㆍ복서ㆍ율려(律呂)ㆍ산수ㆍ서화에 각각 그 정묘를 터득하였다. 연산군 갑자년에 정원으로 불러서 그 배운 바를 묻고는 물러가게 하여 마침내 화를 입지 않았다. 나이 65세에 죽었다.

○ 김굉필이 화를 당하자 3년을 심상(心喪)했다.

○ 어머니가 오랜 병이 있었으므로 의술을 공부해서 손수 약을 지었다.

○ 일찍이 말하기를, “기묘년 때 선비들(조광조 일파)은 자기들의 공부가 다 되지 않았는데 곧 바로 남을 다스리려 했기 때문에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았고 현량과는 더욱 구차스런 일이었다.” 하였다.

○ 일찍이 연못과 샘이 변괴로 메워지고 물고기들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사물도 이와 같으니 사람에게 재변이 있을 것도 자연 알 수 있다.” 하였는데, 이로부터 해마다 흉년과 가뭄으로 백성이 날로 곤궁해지자 공의 말이 비로소 증험되었다.

○ 일찍이 말하기를, “《대학》은 덕(德)에 들어가는 규모이니 집으로 비유하면 간살[間架]같고 그 나머지 육경과 《논어》 《맹자》 《중용》은 창문과 벽과 지방을 장식한 것과 같으니, 비록 딴 경서를 읽더라도 《대학》을 옆에 두고 때때로 항상 보는 것이 좋다.” 하였다.


10. 《반계수록》


○ 서경덕(徐敬德)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예전에 총인(冢人)이라는 벼슬이 있어서 공묘(公墓)의 땅을 주관하였는데, 공묘지를 한 곳에 정하고 그 지역을 구별하여 도면을 만들어서 선왕(先王)의 장지는 중간에 두고, 소ㆍ목(昭穆)을 좌우로 버리고, 또 같은 성(姓)의 제후ㆍ대부(大夫)ㆍ사(士)는 앞뒤로 장사하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풍수설(風水說)을 따라 세대마다 각각 점유하며, 산릉을 이룩할 때마다 비록 종척(宗戚)의 무덤이라도 모두 파내며, 산밖 백성들의 전지도 모두 묵게 될 뿐만 아니라 한 능을 들이는데 매우 넓은 땅을 차지하므로 풀 뜯고 소 먹일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융성한 나라 운수가 멀리 천세(千世)에 이르러 산릉이 교기(郊畿) 밖에 서로 연하여 전지와 들이 모두 묵고, 땅이 남지 않을 것이며, 백리 안에 인적(人跡)이 끊어질 것이니, 폐해가 이에 이르면 신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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