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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비사육신관련/금성대군

학봉일고 금성대군 기록

by 竹溪(죽계) 2006.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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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일고(鶴峯逸稿) 부록 제3권  학봉김문충공사료초존(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 하

  

《금대유고(錦帶遺稿)》 [금대 이가환(李家煥)]


학봉 김 선생이 올린 신미년(1571, 선조 4) 상소의 발문(跋文)

일에는 천만 사람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한 사람이 말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일러 ‘공언(公言)’이라고 하고, 천만 사람이 말하려고 하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을 한 사람이 말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 일러 ‘감언(敢言)’이라고 한다. 무릇 천만 사람이 말하려고 해도 능히 말하지 못한 것을 한 사람이 말한다면, 이 사람은 천만 사람의 한 사람인 셈인데, 학봉 선생이 올린 이 상소가 그런 것이다. 그 뒤에 단종(端宗)이 복위(復位)되고 사육신(死六臣)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잇달아 신원(伸冤)된 것은 모두 이 상소에서 발단된 것이다.

 

이 상소는 처음에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았는데, 200여 년이 지난 뒤에 옛 책상자 속에서 나와 속집(續集)에 편입되었다. 이에 온 세상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읽고 외우게 되었다. 내가 또 선생의 7세손인 김상호(金相虎)에게서 원고(原稿)를 얻어 보았는데, 주석을 달고 문장을 고친 자취가 완연하였다. 종이는 해지고 먹물은 변했지만, 옛날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니, 보배로 삼을 만하다.

 

일본(日本) 사람 도국흥(陶國興)이 보낸 편지의 발문

목릉(穆陵) 23년 경인(1590)에 학봉 김 선생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원릉(元陵) 40년 갑신(1764)에 조공 상관(趙公相觀)이 통신사(通信使)를 따라갔다가 이 글을 도국흥에게서 얻어왔다. 시대의 거리가 235년이 되었는데도 해외의 비록(秘錄)과 본조(本朝)에 전해진 것이 마치 부신(符信)이 서로 맞듯이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 기이한 일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생의 사적(事蹟)이 이 글이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야 없겠지만, 이 글에는 귀중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충신(忠信)을 오랑캐 지방이라도 행할 수 있음을 알게 하여, 성인(聖人)의 훈계가 더욱 높아지게 한 것이 첫 번째 귀중한 것이고, 착한 행실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이를 알아주어서 반드시 남모르게 수양을 더욱 힘쓰도록 한 것이 두 번째 귀중한 것이고, 성심(誠心)으로 구한다면 얻지 못할 것이 없는바, 효성의 생각을 더욱 도탑게 한 것이 세 번째 귀중한 것이다.

 

내가 또 듣건대, 동명(東溟) 김공(金公)은 왜인들에게서 받은 금(金)을 개울에 던져버렸고, 용주(龍洲) 조공(趙公)은 왜인들에게서 받은 칼을 바다에 던져버렸는데, 두 분 다 지금까지 일본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에 뒤에다가 이 사실을 이어 써서, 이분들의 뜻을 계승하여 사신 가는 사람이 있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