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6년 12월 22일 (정미)
군포의 폐단, 사육신과 황보인·김종서·김원량의 억울함에 관한 강화 유수 이선의 상소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선(李選)이 상소하여, 헛된 형식을 일삼지 말고 실제의 덕을 힘써 닦아서 모든 행동과 언어가 반드시 마음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없게 하여 민심(民心)에 부합되기를 구할 것과, 출척(黜陟)과 상벌(賞罰)을 행할 때는 반드시 민심을 거슬리지 않게 하여 천심(天心)에 부합되기를 구할 것을 청하였다. 또 죽은 자에게서 군포를 거두고 미성년자를 충군(充軍)시키는 폐단을 말하였으며, 또 노산군(魯山君)의 육신(六臣)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의 억울함을 논하며 말하기를,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천명(天命)을 받을 당시, 황보인·김종서 같은 신하는 일찍 스스로 귀부할 수가 없었고,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같은 신하는 망령되게 옛날 국사(國士)를 본받으려고 하다가 그 자신들이 극형을 면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죄인의 명단에 실려 있습니다. 저 신하들이 어찌 옛임금에게 천명이 이미 끊어졌고, 참다운 분에게 역수(曆數)가 이미 돌아간 것을 몰랐겠습니까마는 끝내 본래의 뜻을 지키다가 죽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던 것은, 신하는 각각 그 임금을 위해야 하는 것으로서 군신의 대의(大義)는 스스로 허물어버릴 수 없다고 여긴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조께서 비록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였으므로 이들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사실은 그들의 지조를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상시에 여러 신하에게 하교하시기를, ‘성삼문 등은 금세의 난신(亂臣)이나 후세의 충신이다.’ 하였고, 또 훈사(訓辭)를 지어 예종 대왕(睿宗大王)에게 보여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려운 시대를 만났으나 너는 태평한 시대를 만났다. 일은 세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만약 나의 행적(行跡)에 구애되어 변통할 줄을 모른다면 이는 이른바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깨우려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조께서 병환으로 계실 적에 예종 대왕이 동궁(東宮)으로 있으며 모든 사무를 결정하면서 맨 먼저 계유년과 병자년에 죄를 입었던 여러 신하를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는데 연좌된 사람이 무릇 2백여 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용서해주는 은전(恩典)이 이미 세조가 계실 때에 시행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선왕조 때의 유신(儒臣) 송준길(宋浚吉)이 성삼문 등의 일을 말씀드리니, 선왕께서 극히 감탄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성삼문은 곧 방효유(方孝孺)와 같은 유(類)이다.’ 하였으니, 거기에서도 더욱 열성(列聖)께서 김종서 등을 죄인(罪人)으로 대하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가 열성의 남기신 뜻을 받들어 여러 신하의 죄명을 씻어주는 것은 성상께서 그 뜻을 계승하는 데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마지막에는 김원량(金元亮)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말하고 신원해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걱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진언(進言)하는 정성은 내가 아주 가상하게 여긴다. 어찌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상소 중에 육신에 대한 일은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나 다만 건문(建文)의 여러 신하와는 이미 차이가 있고 열성조(列聖朝)에서도 죄를 용서한 적이 없다. 그 분묘를 봉해 준다던가 사림(士林)에서 존모(尊慕)하는 등의 일에 있어서는 굳이 금지할 필요가 없겠다. 그 밖에 별도로 은전을 베풀기는 어렵다. 원량의 일은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하여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김원량은 인조(仁祖) 때의 사람으로 본래는 서생(書生)이었는데, 정사 공신(靖社功臣) 3등의 훈적(勳籍)에 참여하였고 지평(持平)의 벼슬을 지냈으며 역적 이괄(李适)과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갑자년의 변란 때에 이괄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이르자 김원량이 취중에 구제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었는데, 그 때문에 구속이 되어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으나 대개 그 죄는 명맥하지가 않았으며, 그의 죽음에는 사실 김자점(金自點)이 크게 작용하였다. 김원량이 교제한 사람은 명사들이 많았는데, 모두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하였고, 이후원(李厚源)이 더욱 그의 원통함을 극력 변명하였다. 이선(李選)은 곧 이후원의 아들로 상소 중에 김원량의 일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 무릇 수천 마디였다. 대신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상진(李尙眞) 등이 의논하여 그의 억울함을 신원시켜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38 집 505 면
江華留守李選上疏請, 毋事虛文, 務修實德, 動靜語默之間, 必無愧乎吾心, 以求合民心。 黜陟賞罰之際, 必無拂乎民心, 以求合天心。 又言白骨徵布, 兒弱充軍之弊。 又論魯陵六臣及皇甫仁、金宗瑞之冤曰:
當我世祖大王受命之時, 有若臣皇甫仁、金宗瑞等以不能早自歸附, 有若臣成三問、朴彭年等以妄效古人國士之報, 不免身被極禍, 尙在罪籍。 彼諸臣者, 豈不知天命之已絶於舊主, 曆數之已歸於眞人, 而終守素志, 至死不悔者, 不過臣各爲其主, 君臣大義, 有不可以自毁也。 聖祖雖當危疑之際, 不得不誅除, 而實嘉其志操, 故當時下敎於群臣曰: “三問等, 今世之亂臣, 後世之忠臣。” 又製訓辭, 以示睿宗大王曰: “予當屯, 而汝當泰。 事隨世變, 若拘於吾跡, 而不知變通, 則所謂圓鑿而方枘也。” 故當聖祖違豫之時, 睿宗在東宮, 參決庶務, 首命悉放癸酉、丙子被罪諸臣緣坐凡二百餘人, 原赦之恩, 已行於聖祖臨御時矣。 記昔, 先朝儒臣宋浚吉仰陳三問等事, 先王極加歎賞曰: “三問乃方孝孺之類也。” 於此益見列聖之待宗瑞等不以罪人也。 恭承列聖之遺意, 爰滌諸臣之罪名, 其不在於聖明之繼述乎?
末言金元亮之冤死, 請伸雪, 上答曰: “憂愛進言之誠, 予庸嘉尙, 可不體念? 疏中六臣事, 予非不知, 但與建文諸臣, 旣有差異, 列聖朝亦未嘗宥罪矣。 若夫封植墳墓, 士林尊慕等事, 不必禁止而已, 此外有難別施恩典也。 金元亮事, 當令該曹, 議大臣稟處。” 元亮, 仁祖朝人, 本以書生, 參靖社三等勳, 歷官持平, 而與逆适爲至親。 甲子之變, 适擧兵報至, 元亮乘醉有營救之語, 以此被收, 遂誅, 蓋其罪不明。 其死也, 金自點實有力焉, 而元亮所交多名士, 皆言枉死。 李厚源尤力白其冤, 選卽厚源之子也。 疏中歷敍元亮事, 凡數千言。 大臣金壽恒、閔鼎重、李尙眞等議以爲, 宜許其伸雪, 上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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