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城의 花柳界
一記者
一, 妓生의 由來
京城의 花柳界를 말하자면, 먼저 妓生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妓生은 京城의 名物, 아니 朝鮮 名物인 동시에 그 歷史가 또한 오래다. 往古檀箕時代는 史籍이 자세하지 못한 즉 妓生이 잇던 與否도 可考할 바가 없으나 女紅余志 등의 여러 기록에서 수록된 것들과 新羅 金庾信이 女妓 天官의 家에 宿하였다는 事를 綜合하여 보면, 三韓時代와 三國時代에 이미 一種의 類似 妓生이 있던 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特히 官許의 專門職業妓生이 있기는 高麗朝로부터 비롯하였다.
즉 高麗建國 前에 韃靼으로부터 咸鏡道를 經하여 全國各地에 漂入한 揚水尺의 種族이 마치 今日 日本의 賣春婦와 같이 公然히 醜業을 行하다가 그 후 妓籍에 編入되어 子孫이 遂히 世世專業을 하게 되었다.
比風이 漸次 蔓延되매 비록 良家의 여자라도 貧困 또는 墮落의 結果로 역시 妓籍에 入하여 그 數가 遂年 증가되니 麗末李朝는 可謂 妓生의 전성시대였다. 전국 중, 대도시에는 대개 官妓가 있고 宮中에도 女妓가 있어 讌樂의 詩와 接待의 際에 반드시 妓樂을 이용하였으니, 그 李太祖 開國宴에 政丞 裵克廉이 당시 명기 雪梅에게 嘲笑를 당한 奇語는 또한 이것을 가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太祖開國宴中有妓雪梅者才貌課入而喜淫, 政丞裵克廉戱曰汝朝從東家食, 暮從西家宿, 亦爲老夫薦枕否, 妓曰以東家食西家宿之賤妓, 得侍承王氏之政丞則宣乎, 善裵氏麗朝舊臣故雪梅朝之也)
이후 太宗朝에 이르러 淫風이 더욱 심함으로 太宗이 이를 廢止하려고 의논하였다가 정승 許稠의 반대로 인하여 중지되었으니 이러한 許藻의 의견은 今日 所謂 公娼廢止反對論者의 주장과 같이 남녀의 욕망은 人情의 자연스러운 일일진대 만일 이를 금지하면 靑春의 자제나 기타 有力者가 반드시 양가 부녀를 汚辱하는 일이 있으리라는 견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邇來 五百有餘年에 비록 時의 盛衰와 俗의 變遷은 있을지라도 화류의 색은 조금도 盛衰치 않을 뿐 아니라 官吏의 腐敗, 부호의 타락은 점차 기세를 더하여 妓生은 당연히 사교상 필요한 자로 변하여 금일까지 이르렀다.
二, 妓生의 種類
妓生에는 一牌, 二牌, 三牌의 區別이 있었다. 牌는 官의 帳面에 記載한 순서를 말함이니, 一, 二牌는 妓生이요, 三牌는 準妓生이다. (三牌는 賣淫을 公認하였으니 申泰休警務使 時代에 詩洞에 集居케 하고 賞花室이라 門楣에 摘함) 一牌 중에도 또한 等級의 順序가 있고, 成績과 行狀에 의하여 三牌로부터 二牌에 階次하고 一, 二牌로부터 三牌에 貶하는 일이 있었다.
又 往昔에 妓生이라 하면 依例 官妓를 意味함인데 그 官妓는 廣狹 二種의 뜻이 있으니 廣義로는 地方과 中央을 불문하고 관청에 속한 자를 총칭함이요, 협의로는 왕실에 속한 자를 칭함이다.
妓生을 宮中에 두는 것이 何時부터 비롯하였는지 歷史가 자세치 못하나 高麗樂制에 女妓가 있는 것을 보면 麗朝에 妓生이 宮中에 출입한 것을 알 수 있고, 李朝에서도 그 관습을 인용하다가 패해가 있음을 알고
成宗朝에 正殿에 女樂을 사용함은 古法이 아니라하여 禮宴에 女樂을 금하고 妓生을 다만 內醫院 惠民署의 女醫(所謂 藥房妓生) 또는 尙衣院의 計線婢(所謂 針房妓生)의 名義로 채용하고 특별히 敎坊에 이름을 올린 妓生과 합하여 宮中 燕樂의 때에 歌舞로 酒宴에 시중들게 하여 興을 돕게 하고
그 중에 총애를 바든 자는 특히 官爵을 주었으니 所謂 玉堂妓生이 그것이다.(玉貫子를 붙인 자) 또 지방의 妓生은 지방관청에 전속하여 入籍, 敎養, 落籍 기타 進退에 달하기까지 전혀 官의 指揮에 복종하고 의무로 관리 또는 관청연회에 대하여 盃를 幹旅하고, 가무를 演하였으니 이는 대개 往時에 外官이 獨身으로 赴任하믕로 그 孤寂한 울적한 마음(鬱愁)를 위로하고 또 중앙정부로부터 巡視하는 官吏를 접대하고 위안하기 위하여 생긴 제도이다.
三, 奴隸業으로부터 自由業에
이상에 말함과 같이 전일 妓生은 宮中이나 또는 지방관청에 전속하여 관리의 노예가 되고 하등의 자유가 없었다. 정조의 蹂躪은 물론이고, 어떤 때는 생명까지도 자유가 없었다. 노력에 대하여 특별한 보수가 없고 단지 자의로 의복기타 물품 등을 贈與할 뿐이다.
마치 畜生에게 식물을 與하는 것과 같았다. (관리 외지인에게 密賣淫하는 것은 別問題) 특히 宮中연회시(如誔辰, 嘉禮)에 지방에서 선출하여 京城에 來하는 妓生은(所謂 進宴參禮)지방관청이나 宮中에서 여비를 별도로 지출치 않고 자비로 무리하게 참가케 된즉 지방妓生이 宮中연에 참가하는 것은 표면상 一大光榮이나 내면에는 무한의 고통이 많았었다.
그럼으로 부득이 掖隸別監等(所謂 誤入匠)에게 잠시 의탁하여 의복과 음식을 의뢰하게 되었었다. (그가 所謂 抱主의 기원인데 其實은 오입장이가 자청하여 妓生을 救護함이다) 그러나 甲午更張이후 官紀의 肅淸은 그 관청 專有의 花柳界에 일대폭풍우였다. 즉 宮中과 지방관에 속한 妓案을 革罷하였다.
所謂 삼백의 粉黛가 일시에 皆散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지식의 정도가 淺薄하고 경제의 自活力이 없는 당시의 妓生들은 數百年間을 呻吟하던 노예의 網을 벗어나고도 신성한 자유의 생활을 못하고 전일보다 더욱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다.
京城에서는 所謂 抱主(妓夫)의 노예가 되고 지방에는 所謂 收養父, 收養母의 노예가 되어 무한한 壓迫과 强制下에서 고통의 생활을 한다. 花朝月夕에 張三李四를 送迎하여 양심에 불허하는 가면의 笑와 무정의 春을 賣한다.
그러던 중 그 불의의 收入은 전부 포주 또는 수양부모의 손에 들어가고 몸을 희생에 바치는 자기에게는 何等의 관계가 없다. 또는 營業의 기한도 없다. 다만 豪俠兒, 遊治郞이 조속히 落籍하기만 고대할 뿐이었다. 이것이 어찌 인간사회의 죄악이 아니랴.
그러나 신성한 자유의 바람은 花柳界까지 불기를 시작하여 비록 천업을 할지라도 자기의 자유업으로 하려는 思潮가 膨大하여 혹은 好誼로, 혹은 爭訟으로 포주 수양모등과 분리하여 대개 所謂 無夫妓의 자유업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근래 京城花柳界의 일대혁명이다.
四, 組合의 內幕과 妓生의 現況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團體的 생활이 필요한 것은 妓生의 사회에서도 또한 覺悟하였다. 距今 17년전 甲戌에 漢城妓生組合(所謂 有夫妓組合이니 전일 官妓를 중심으로 한 자)이 嚆矢로 창립되고, 그 후에 그 有夫妓組合을 對抗하여 茶洞組合(所謂 大正券番이니 평양의 無夫妓가 중심이 됨)이 설립되었다.
그 외에 三牌로 組織한 新彰組合(후에는 京和券番이라 改稱함)과 경상, 전라 양도 妓生을 중심으로 한 漢南券番(大正 六年 二月 創立)과 大正券番에서 분리하여 純 平壤妓로 조직한 大同券番이 일어났다.
그러나 한성, 한남 양 券番을 제한 外諸券番은 內幕이 자못 複雜하였으니, 즉 大正券番의 배후에는 설립 초부터 宋秉畯 色爵이 있어 자기의 經營하는 大成社(高利貸金業)로 그 券番을 管轄하여 間接으로 妓業을 하다가 그 券番에 감독으로 있던 河奎一이가 宋과 意思가 衝突(실은 宋派 安淳煥과 충돌됨)되어 퇴사하게 되니 다년간 河氏의 노련한 歌曲과 風趣에 醉한 妓生들은 일시에 낙망되어 風前의 落花와 같이 四券番으로 離散하니 전일에 繁華하던 대정券番은 가위 門前落冷鞍馬稀 悲運에 이르렀다.
宋氏는 如斯히 失敗를 당함에 空殼6)의 券番을 보수함이 쓸모없는 일로 알았던지 그 권리까지 抛棄하얏다. 此 機會를 勝하여 또 野心을 起한 者는 自來로 大同券番에서 視務하던 洪炳殷이엿다.
즉 洪은 日本人 長野에게 負債가 多하되 補償의 道가 無함으로 此無主人 大正券番을 長野에게 讓與하고 長野는 資本金 五千圓으로 所謂 株式會社 大正券番을 조직하니 表面은 비록 회사나 사실은 長野의 單獨營業이다.
즉 長野의 經營하는 鷄林社所管이 되얏다. 또 작년 八月頃에 설립된 朝鮮券番은 京華券番의 後身이니 河圭一이가 大正券番을 辭退한 後로 前日 緣故가 有하던 妓生과 合力으로 京華券番을 매수하야 新히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이 券番도 今에는 또한 宋秉竣 色爵의 買受한 바가 되얏다. 宋氏와 妓生券番은 不可離할 前生에 奇緣이 有한 것 갓다.
현재 京城의 四券番 중(大同券番은 看板만 有하고 廢止狀態에 在함으로 論外함) 純朝鮮人의 經營하는 것은 漢城·漢南 뿐이오 其他는 日本人 또는 준일본인의 경영이다. 그의 세력이 花柳界까지 위대한 것은 참 주목할 일이다. 그 券番은 비록 名色은 妓生券番이나 사실은 본인이 朝鮮女子를 買受하야 榮樂하는 遊廓과 同一한 感이 있다. 이것은 朝鮮人妓生 각자가 覺悟할 일이다.
그러면 현재 四券番의 妓生 상황은 如何한가. 此를 各論하면 漢城券番은 營業者 一七七, 童伎 百人이니 原籍別로는 京城 二二一人이 最多하고 其次는 平安道 四0, 慶尙道 一0, 黃海道 三, 全羅道 二, 咸慶道 一인데, 其 中 金彩仙, 鄭柳綠, 金花香, 宋蓮花, 姜花仙, 李琦花, 等이 最著名하고 특히 裵竹葉, 韓山月, 宋蓮花의 書藝는 錦上添花라 可謂하겟으며 老當益甚한 柳鶯仙의 京城아리랑打令도 風流郞의 耳를 奪한다.
此에 六四人의 營業者와 三二人의 童伎를 有한 漢南券番은 비교적 人數가 少하다. 原籍別로는 京城三四, 全羅四, 忠淸 二, 慶尙 五五인데 萬人의 寵愛를 受하는 吳柳色의 三千六百圓(昨年度時間帶)의 收入은 總督府高等官俸給을 凌駕하고, 百戰老美人인 吳蓮花의 구슬푼 노래는 白首寒山에 心不老를 歎하는 不遇客의 同感을 起한다.
且 日本人의 新主人을 마진 大正券番은 李源宇 其他 某某가 他券番의 妓生을 爭奪하고 老隱한 退妓를 다 겪어온 까닭인지 比較的 名妓도 만코 人數도 만타. 키크고 허울좋은 洪彩鳳, 西洋눈이 崔春紅, 有情하고도 無情한듯이 崔松鶴, 슬기구멍 만은 崔蟾紅, 金小玉 등이 다 有數한 妓生이다.
原籍別로는 平壤 一00人이 最多하고 慶尙 一五, 京城 五人이오, 此外에 童伎가 五十人이란다. 尙又 宋伯爵券番 卽 朝鮮券番은 아즉 設立이 未久하야 營業者 六0, 童妓 三0人에 不過하는데, 原籍別로는 京城 삼칠, 平安道 四六, 慶尙道 七人이고, 昨年度 收入成績은 金蘭珠, 崔可佩가 優等이라 한다.
賣上의 會計를 보면 藝妓의 總數가 四二一人이고 童妓가 二一人이오, 原籍別로는 京城 二九七人 外 平安道 一八六이 最多하고 其次는 慶尙 一二七, 全羅 一六, 黃海 三, 忠淸 二, 咸境 一이오, 江原道는 全無하다. 此를 見하면 各道의 人情風俗을 可察할 수 잇다.
五, 昔日의 妓生과 今日의 妓生
年年歲歲花相似하되 歲歲年年人不同이라는 古人의 詩句는 이 妓生界을 대하야 말하야도 適宜하다. 妓生界야말로 참 變遷이 만타. 年年이 人物도 變하고 風俗도 變하고, 奢侈品도 變하고, 技藝도 變한다.
昔日의 妓生은 貴族的이나 今日의 妓生은 平民的이다. 昔日의 妓生은 비록 賤業을 할지라도 禮義와 廉恥를 尙하더니 今日의 妓生은 但히 金錢을 崇拜한다. 金錢만 주는 以上에는 禮義도 廉恥도 다 不願한다.
所謂 賣唱不賣淫이라는 傳來의 語는 名詞지 업서지게 되얏다. 純然히 商品化하얏다. 鄙劣한 愁心歌 難逢歌는 잘 할지언저 高尙한 時調歌詞는 별로 알지 못하고 장고통 가리채는 잘 만질지언정 검은고 가야금은 줄도 고를 줄 아는 자가 적다.
鴨綠江부시 이소부시 등의 반벙어리 일본노래는 드를 수 잇서도 昔日 成川의 芙蓉, 開城의 黃眞, 平壤의 蘆花와 가튼 이의 시를 볼 수 업다. 康明花, 李花蓮은 戀愛를 위하야 泉臺의 不歸魂이 되고 姜香蘭, 丁琴竹은 一時的 好奇心으로 斷髮美人의 稱號를 어덧지만은 國家를 爲하고 民族을 爲하야 身을 犧牲에 供하던 晋州의 論介와 平壤의 桂月과(속칭 月仙)가튼 女丈夫를 다시 볼 수 업다.
南原의 春香(事實有無는 別問題) 春川의 佳心이 가튼 貞節도 볼 수 업다. 前日의 所謂妓生宰相이라던 評은 變하야 妓生砒霜 妓生苦生이 되게 되얏다. 이것은 時代의 關係도 물론 잇지만은 엇지 妓生의 墮落이라 云치 안이할가.
六, 日本人의 藝妓와 遊廓
日本人 藝娼妓가 朝鮮에 入하기는 한 數十餘星霜이 되얏다. 當初에는 南大門通 太平通에 五六戶의 暖昧屋이 잇서서 御料理의 看板을 부치고 十餘의 賣春婦가 密業을 하더니 日露戰爭詩 日本人의 激增함을 隨하야 藝娼妓가 增加되고도 色鬼 伊藤 統監이 政界에 執擔을 執한 後로 淫靡의 風이 南村全市街를 捲起하야 所謂 春風紫陌人人醉 晧月紗窓處處歌의 盛況을 成하니 伊藤統監時代는 京城花柳界의 全盛時代다.
藝妓의 番도 생기고 娼女의 遊廓도 생겻다. 그러나 其後 硬骨總督 寺內가 莅任하야 官紀肅淸함매 花柳界는 다시 大打擊을 受하야 秋風古柳와 가티 蕭條寂寞을 다 면치 못하다가 歐洲戰爭詩에 成金家의 關係로 花柳界에도 影響이 波及하야 俄然이 頭를 擡하더니 其後 財界의 不況, 震災의 關係로 今日에는 沈衰의 境에 瀕한 것이다.
現在 藝妓券番은 京城券番, 中券番이 잇스니 藝能者가 二六八人이오 又 新町券番은 娼妓券番이니 日本人 娼妓가 三四0人, 此外 朝鮮人 娼妓 一等(日本人營業) 三九人, 二等 二二八人, 外國人 三人이 잇고, 又 龍山에 彌生町 遊廓이 잇다.
花柳界 이악이 해 문득 생각나는 것은 名妓 黃眞의 詩歌이다. 한번 불너볼가!
靑山裏 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워라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여간들 엇더하리
(개벽 48호 192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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