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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의세계/기생이야기

한말의 명기 채금홍

by 竹溪(죽계) 2006.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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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末의 名妓 蔡錦紅


  日帝時代 大正年間에 평양은 물론이고 경성을 비롯한 각 도시에서도 蔡錦紅이라는 기생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사정으로 인하여 평양 기생양성소에 입학하여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금홍은 인물이 절색일 뿐 아니라 가무에 능했으며 많은 서적을 섭렵하여 현대적 학문과 사상에 눈을 뜬 재원이기도 하였다. 학문적인 소양이 깊었던 그녀는 平南 漢學界의 거두인 崔在學을 선생으로 모시고 한문과 한시를 공부하였으며 사서삼경을 익혔다. 그런가 하면 타고난 詩才가 있어 재치있는 시를 많이 남긴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평양은 색향이라 불리웠으며 많은 명기를 배출하였다. 義妓 계월향도 평양 기생이요, 詩妓 김부용이 그 재능을 발휘한 곳도 평양이며 근대 한 말 명기 채금홍 또한 전형적인 평양기생이라 하겠다.  그 중 계월향은 임진왜란때 왜장 小西行長의 부장에게 잡힌몸이 되었다가 김응서와 짜고 부장을 죽인 후 자신은 자결하고 김응서는 탈출시켜 왜란을 평정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의기이다. 평양에서는 이 의기를 위하여 사당을 짓고 매년 춘추 2회로 추모의 奉祭를 하여 왔는데 이곳이 바로 의열사이다.

  1919년 3월 조선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사상적으로 계월향을 추종하던 금홍은 독립만세로 천하가 소요하자 의열사를 참배하고 추모시를 지었다.


嗟歎前朝桂月香

芳魂何處獨悽傷

練光亭上朱欄朽

義烈祠前蔓草長


풀이하면, 「슬프다, 조선의 명기 계월향이여, 꽃다운 혼백은 어디에서 홀로 상심하는가 연광정의 붉은 난간 바스라졌고 의열사 앞뜰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이다. 이 시를 본 금홍에게 한시를 가르쳤던 최재학은 감개한 나머지 무릎을 치며 눈물까지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 시는 널리 퍼져 많은 사람이 애송하게 되고 이를 탐지한 평양경찰서의 고등계형사 中村眞三郞은 금홍의 사상을 의심하여 혹독한 취조를 했다. 그리고 10일간의 구류처분까지하니 그때 금홍의 나이 겨우 스무살이었다.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춘원 이광수, 천풍 심우섭이 금홍과 함께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즐기게 되었다. 천풍은 금홍이 지었다는 義烈詞 추모시를 보고는 놀라 믿지를 않았다. 천풍은 필경 금홍이 남의 시를 借作한 것으로 의심하고 우리가 이렇게 함께 놀다가 내가 먼저 죽었다고 가정하고 추모시를 한 수 지어보라고 하자 금홍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獨依浮碧樓

浿水帶愁流

同乘人何處

空見夕陽舟


풀이하면 「홀로 부벽루에 기대어 있자니 대동강물은 근심을 두른 채 흘러만 가네. 함께 탔던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헛되이 석양의 쪽배만 바라보네」이다. 이를 보고 천풍은 옛시절 부용 못만난 것을 한 할 게 없다하며 금홍이 있는데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고 찬탄하였다. 그날을 기념하여 금홍이 시조 한 수를 지어 남기게 된다.


大同江 푸른 물결 西海갔다 다시 오며

綾羅島 盛한 버들 가는 春風 잡아매자

靑春을 虛送치 말고 三春行樂 하리라.


  조국독립에 대한 사랑과 염원이 담긴 일화가 또 하나 있다. 금홍은 순종께서 승하하여 국상이 나자 서울로 올라왔다. 창덕궁 앞에서 인산인해를 이루며 통곡하는 남녀노소의 광경을 목도하고 순종의 죽음을 한 나라가 망하는 국가의 운명으로 보고 애통해 하는 내용의 시조를 지었다.


昌德宮 바라보며 통곡하는 老少男女,

臣民된 義가 重해 哀悼하는 心情이랴.

純宗이 韓末이기에 그를 슲어 하리라.


  그녀의 詩才에 얽힌 이야기 중 평양의 기자림 뒤 娥眉山 공동묘지를 보고 쓴 시조가 있다.


娥眉山 공동묘지 높고 낮은 저 무덤엔

朱門 白屋 구별없고 양반상놈 차별없다.

가련타 人間公道를 여기서만 보노라


朱門은 富家를 말함이고, 白屋은 貧家를 말함이다. 인간의 공평한 도를 공동묘지에서만 볼 수 있다는 그녀의 한탄이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황학루에 얽인 이야기도 있다. 금홍은 어느 날  최재학선생을 비롯한 평양의 여러 詩人墨客과 함께 황학루에 오르게 된다. 원래 황학루란 중국의 양자강가에 있는 정자다. 이태백이 그 곳에 올라 현판을 둘러보다가 최호의 시를 보고는 그만 기가 죽어 시를 짓지 못하고는 결국엔 봉황대로 가서 「봉황대」라는 시를 지었다는 고사가 있다. 대동강의 동쪽에 절경 三十秋同天의 삼등 누각이 있는데 이 누각이 바로 황학루이다. 금홍이 이 누에 올라 명사들을 통해 황학루에 대한 고사를 듣고는 즉석에서 한 수 읊었다.


崔顥初登黃鶴樓

李白再登黃鶴樓

柳京佳人與才子

今日三登黃鶴樓


풀이하면, 「최호가 처음으로 황학루에 오르고 이백이 다음으로 황학루에 올랐지. 평양의 미희와 재자가 모여서 오늘은 세 번째로 황학루에 올랐네.」 이다. 柳京은 평양을, 佳人은 채금홍 자신, 才子는 최재학선생을 비롯한 평양의 여러 詩人墨客을 말하는 것이니 崔顥와 李白과의 대등한 위치에 놓아 노래한 것이 된다. 실로 그녀의 시재에 놀란 그들은 당시 江東郡守 金壽哲의 발의로 금홍의 시를 새긴 편액을 만들어 황학루에 걸어놓았다. 천한 신분이었던 기녀의 시가 이곳을 거쳐간 내노라하는 명사들의 시와 함께 나란히 겨루게 되었으니 대단한 사건이었음이 분명한 일이었다.


  금홍은 이재에도 밝았다. 자기 형제들을 모두 일본유학을 시킬만큼 재물을 끌어모았으며, 야망도 큰 여자였다. 금홍의 도움으로 큰 오빠는 早田대학, 작은 오빠는 明治대학, 막내동생은 大阪上船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사랑의 시련이 찾아온다. 24세가 되던 해 靑年文士와 열렬한 연애에 빠져 기생노릇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금홍의 어미가 이를 못마땅히 여겨 극력 반대하고 청년문사와의 相從마저 못하게 하자 고통을 이기지 못한 금홍은 긴 머리를 잘라버려 당시 사회에 일대 파문을 일으켜 매일신보에 事實小說로 5회에 걸쳐 연재되기도 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비관하고 30살이 되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天下無依客

江湖斷髮嬪

憐我同垂淚

只有鏡中人


풀이하면, 「하늘 가 의탁 없는 나그네 신세, 세상에 버림받는 삭발한 여인. 가련타 나와함께 눈물 흘린 이, 거울속의 한 사람 그 뿐이로다.」 절세의 미인으로 태어나 기생으로서의 가무에도 평양 제일이었고, 문학적 재능과 詩才에도 뛰어남을 보여주었던 그녀였으나 사랑을 얻지 못함에 대한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가히 佳人薄命이라함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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