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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세계/문학으로영화보기

"죽어도 좋아"에 대한 감상평

by 竹溪(죽계) 2005.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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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예술의 아름다운 만남, ‘죽어도 좋아’


‘죽어도 좋아’는 영화라는 예술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너무나 사실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진 두 노인이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나 담담한 시선으로 그림처럼 화면 속에 담은 것이 바로 ‘죽어도 좋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허리우드의 액션 영화를 보듯이 보아서는 아무런 흥미나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이야기 전개방식을 따라가면서 사건의 해결 과정을 지켜보고 그것이 어떻게 해결되는가를 보면서 재미와 감동을 느끼는 그런 영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보아야 하는 영화가 바로  ‘죽어도 좋아’인 것이다.

 

 관객이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바로 그 현실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어졌고 그렇게 감상되기를 감독은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이제 이 영화를 하나하나 감상해 보도록 하자.


‘죽어도 좋아’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화면의 진행이 왜 그리 느린가 하는 것이다. 두 주인공의 방사장면을 지겨울 정도로 길게 찍어 놓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젊은 사람들도 아닌 노인들의 쭈글쭈글한 몸이 그렇게 긴 시간 화면을 가득 메우면서 진행되는 영화를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감상방법의 특수함을 요구하는 이 영화만의 매력이다.

 

  영화 ‘죽어도 좋아’에서 관객은 객관적 방관자가 아니라 주관적 참여자가 되어야만 이러한 긴 호흡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노인의 생활이 어떠하며 어떤 속도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이해한 후에라야 왜 이 영화의 진행이 이렇게 느린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인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을 보는 것 자체가 고역일 수밖에 없겠지만 이것을 따뜻한 시선과 사랑을 동반한 감정으로 본다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진행이 바로 이 영화의 진행방식인 것이다. 객관적 방관자가 아니라 주관적 참여자가 될 때 비로소 이 영화의 모습이 우리 눈과 마음 앞에 뚜렷한 모습으로 顯現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시선으로 이 영화를 봐 나가면 두 사람의 정사장면이 길지도 않을뿐더러 추하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아름다운 정사장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정사장면이 바로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정사장면이 되는 것이다.

 

    쭈글주글한 몸이 하나로 되어서 몸부림치면서 연신 힘들어 죽겠다고 말하는 할아버지를 보면 사람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젊은이나 늙은이나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특히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인간이라는 사람의 범주에서 본다면 어린이나 어른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것은 절대로 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어린 아이가 뽀뽀하는 것은 추하지 않고, 젊은이들이 정사하는 것은 눈을 부릅뜨고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나이가 든 늙은이들이 하는 정사행위는 체통을 지키지 못한다느니 보기에 추하다느니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관념일 수 있지만 그것을 깨뜨렸을 때 이 영화를 바로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믿는다. 삶의 모습 그 자체로 보아달라는 주문이 바로 감동이 관객에게 하는 요구사항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정사장면에서도 평범한 빛 외에는 어떤 조명도 쓰지 않고 있지 않는가? 조명을 써서 우리의 눈을 잠시 현혹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되면 이 영화가 추구하는 예술적 가치가 아닌 전혀 다른 방향의 엉뚱한 방향으로 가치를 만들어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이든 사람들에 대한 공경만이 중심이 되던 그런 시대가 아니다. 노인을 공경하고 받드는 것은 젊은 사람들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이지만 그 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또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노인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노인은 약하기 때문에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미명 아래 우리는 노인들의 인생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들의 입장에서 사랑을 이해하려고 해 본적이 과연 있는가?

 

   나이 드신 부모님이 연애를 해서 애인이 있다고 하면 집안 망신이라고 야단법석을 떤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어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 사랑을 소중하게 보호해주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노인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되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공경하여 한쪽으로 모셔놓고 보이지 않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노인의 삶이요 사랑인 것이다. 그 사랑을, 그리고 그 슬픔을 진정한 사랑의 손길과 눈길로 감싸 안을 때 우리는 이 영화를 아름답다고 말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죽어도 좋아’를 보면서 느낀 또 다른 한 가지는 노인문제에 대한 인식 재정립과 함께 노인문제가 우리들의 생활 속에 아주 깊이 들어와 있으며 그것이 조만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란 사실이다.

 

    영화에서 이런 현실을 유추해낸다는 것이 약간 어색하지만 이미 우리들의 눈앞에 와있는 현실이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현재의 우리 사회라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안타까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서히 노인국가에 들어서고 있어서 불과 몇 년 후면 생산인구가 부양해야 할 인구가 지금보다 엄청나게 늘어나게 될 것이 확실하다. 거기에다 낮은 출산율로 인하여 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니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인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정치권에서는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노인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인 만큼 노인문제를 노인의 시각에서 다룬 ‘죽어도 좋아’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도록 하는데 충분한 것으로 사료된다.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인정하면서 그들에게 활력을 찾아주게 되면 훨씬 더 젊은 모습으로 노인들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죽어도 좋아’가 만들어진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극장에서 개봉되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광고벽보를 다시 보니 영화에 나오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아닌 50대의 중년 부부가 이불을 한 몸에 두르고 웃고 있지 않은가?

 

    죽어도 좋을 만큼 진솔한 그들의 사랑이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면 필자만의 어불성설이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한다면 그 이상으로 젊어질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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