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단상/고향이야기

생전 처음 밝히는 비밀-1

by 竹溪(죽계) 2005. 12. 18.
728x90
SMALL
 

 생전 처음 밝히는 비밀1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이 집이었던 나는 영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3학년 1학기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었다.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북바우, 피끈, 장수고개, 귀네, 서천교를 거쳐 학교까지 가곤 했는데, 겨울에는 죽령재를 넘어서 풍기를 거쳐 내리치는 북서계절풍 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귀네에서 부터는 내성천이라고 하는 낙동강의 둑을 따라 몇 킬로를 내려오는데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은 발가락을 마비시킬 정도였고,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눈사람이 되다시피 해서 학교에 들어서곤 했었다.

 

  2학년 말의 어느 추운 겨울날 엄청나게 내리던 눈을 옴팍 맞고 교문을 들어서서 교실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문을 들어서려는데, 교련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는 잠깐 들어오라고 하셨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난로를 피워놓아서 훈훈한 기운이 몸을 녹여서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였다. 집이 12킬로 떨어진 북쪽에 있다는 말을 들으신 교련 선생님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난로를 쬐서 몸을 녹인 뒤 가라고 했지만 그런 곳에 오래 있으면 오히려 동상에 걸리기 십상이므로 교실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눈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자전거와 관계된 에피소드이다.

 

  3학년을 올라간 새 학기가 되어서는 날씨가 따뜻해졌고, 훈훈한 봄바람을 맞으면서 학교로 내려가는 길은 상쾌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었다. 신나게 자전거를 달려 강바람을 맞으면서 내려와 서천교를 건너면 내성천의 물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멀리 북서쪽으로 보이는 소백산에는 아직도 눈이 하얀데, 눈 녹은 물이어서 그런지 내성천의 물은 맑고 푸르기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서천교의 동쪽에 올라서기만 하면 다리 반대편에서 땋은 머리를 흔들며 걸어오는 영주여고 3학년 학생과 매일 만나게 되었다.

 

   하루 이틀 그런 일이 생기자 그 여학생을 만나는 일이 학교 가는 길의 가장 중요한 즐거움이 되었고, 이것에 재미를 붙인 나는 반드시 그 시간을 맞추어서 서천교의 다리 동쪽에 도착하곤 했었다.

 

  아침이 약간이라도 늦어지면 학교에 늦겠다고 안달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짜증을 있는대로 다 부리고는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전거를 내리 달려 단숨에 서천교에 다다르곤 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 여학생 역시 같은 시간에 반대쪽 다리 위에 올라서곤 했었는데, 이런 일이 무려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그 동안 나는 학교의 서쪽 마을에 자취하는 친구들을 통해서 그 동네에 사는 여학생이 누구이며 이름 정도는 알게 되었다. 박 * *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여학생은 정말 양귀비처럼 아름답고 천사처럼 착한 모습으로 내게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매일 만나는 그 여학생에게 말을 한번 걸어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연습을 하고 또 연습을 하였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면서 서천교 다리로 갔지만 그 아름다운 여학생 앞에만 가면 말을 하지 못하고 얼굴은 빨개져서 더 빨리 페달을 밟아 쏜살 같이 지나가곤 하기만 했었다.

 

  매일 매일을 그렇게 보내면서 항상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숫기가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나로서는 천사 같은 여학생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정말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달을 그렇게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내게 있어서는 엄청난 일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그날도 나는 같은 시각에 서천교 동쪽 다리 끝에 올라섰는데, 그날따라 그 여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때의 초조하고 허탈한 마음이란 그 어디에도 비견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온 몸에 힘이 빠져 버린 상태로 아쉬움과 허탈감을 안고 천천히 자전거를 달려 다리의 서쪽 끝에 이르렀을 때였다.

 

  약 100미터 정도 앞에 그 여학생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지 않는가? 그 때의 환희와 기쁨을 어디에 또 비견할 수 있었으랴? 나는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다시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그 여학생 앞으로 거리를 좁혀갔다.

 

  다리에서 학교 쪽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 모래길이면서 약간 경사가 져 있어서 속도를 많이 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매일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던 그 여학생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쳐다볼 수 있었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까만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때의 놀라움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두려움으로 인하여 나는 더욱 속도를 내서 그 옆을 지나가려고 했는데, 아뿔사! 이게 왠 청천날벼락인가?

 

  정신이 많이 산란해진 나는 그 여학생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 앞에서 모래에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좁디좁은 논둑길에서도 넘어져 본 적이 없는 실력이어서 자전거로 전국을 돌아다녀도 될 정도로 잘 탄다고 늘 자부하던 나로서는 정말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픈 것을 겨우 참고 일어서서 허둥지둥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하기는 했지만 살풋이 미소를 머금으며 총총 걸음으로 걸어가던 그 여학생의 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겨져 잊혀지지 않는다.

 

  꿈많던 사춘기의 학창시절에 내게는 천사같이 아름답기만 했던 그 여학생이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고 때때로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지금쯤 아마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원숙미를 풍기는 중년의 부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내 안에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로 늘 자리하고 있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