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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단상/고향이야기

씻을 수 없었던 표대등의 상처

by 竹溪(죽계) 200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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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을 수 없었던 表臺嶝의 傷處


   일곱 살 되던 해까지 동네 할머니들의 꼬마 전기수로 활약했던 나는 그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던 무렵에 순흥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버스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어머니와 둘째 누나와 나는 이삿짐 트럭에 앉아서 험하고 험한 산길 수십 굽이를 돌고 돌아 영주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당시 영주 땅의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는 정말로 처참했는데, 둑이란 둑은 다 무너져 있고, 논밭은 물에 휩쓸린 채로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삿짐 차가 진흙구덩이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하게 되자 어머니와 누나는 할 수 없이 10킬로 정도를 걸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누나의 등에 업혀서 갔는데, 날이 저물 무렵에 당도한 곳이 바로 야산 밑에 집 한 채만 달랑 있는 독가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낯선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이 장작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커다란 아궁이였다.

 

  그것을 본 나는 먼저 살던 집으로 도로 가자고 두 다리를 뻗대며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자 누나와 어머니는 나를 포기하신 양 내버려두고 들어가서 이사 짐 정리를 하셨다.

 

  그때 뒷산에서 무엇인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두려움을 느낀 나는 할 수 없이 울음소리를 내며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첫날밤을 보내고 이삿짐이 대강 정리되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고개 넘어 있는 마을로 가서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나와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사이좋게 지내라고 권유하기도 하셨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새로 이사온 집의 생활에 익숙해져갔지만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져 나를 괴롭히게 되었다. 먼저 살던 동네에서 골목대장이었다는 소문이 어떻게 해서 새로 이사온 동네에까지 퍼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모두 무서워하며 도망치는 바람에 함께 놀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당히 오랜 동안을 새로 이사간 동네에서 고독한 골목대장이 된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무슨 일만 생기면 무조건 내가 때렸다고 핑계를 둘러대는 바람에 동네 어머니들에게 원인도 모른 채 혼나기가 일쑤였다.

 

    어떤 경우는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항의하는 부모들도 생기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억울하다고 하소연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 마을아이들과도 어울리게 되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양오백년가를 어른 보다 더 잙읽었고, 삼국지를 여러번 볼 정도로 이미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어떠한 것에도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데리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거나 말썽을 피울 게 없을까 하는 궁리에만 열중하였던 것이다. 봄이 되면 보리밭에 가서 이리저리 뒹구는 것을 즐겼는데, 푸른 보릿대는 매우 부드러워서 비탈진 밭에서 어떤 식으로 굴러도 푹신푹신하여 기분이 좋았다.

 

   신나게 뒹굴다가 어른들에게 들키게 되면 산으로 도망가기가 일쑤였는데, 산으로 도망간 우리들에게는 또 다시 칡을 캐는 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잎이 넓고 넝쿨이 뻗어나가는 칡은 땅 속에 굵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캐서 먹으면 단물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들은 봄만 되면 그것을 캐러 온 산을 누비고 다녔다.

 

   칡은 뿌리가 뻗어나가다가 갑자기 굵어져서 둥글게 된 것이 가끔 있는데 이것을 칡봉이라고 했다. 칡봉을 잘 캐기 위해서는 넝쿨이 한 뿌리에서 여러 개 나온 것을 골라야하고 부드러운 흙 쪽으로 뿌리가 들어가 있는 것을 골라서 캐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유난히 칡봉을 잘 캐었던 나는 함께 간 아이들에게 부러움을 사곤 하였는데, 칡봉을 캐 가면 어른들이 칭찬을 많이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로 인해서 마을의 아이들은 여러 면에서 긴장과 압력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는 공부에서 내게 늘 뒤진다는 점이었다. 비록 학교 생활에 재미를 붙이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늘 우등생이었던 관계로 아이들의 부모들은 언제나 나를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 아이들을 야단 쳤던 것이다.

 

    특히 성적표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학기말이 되면 나는 맨 앞에서 통지표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아이들은 마을을 넘어가는 고개 위에서 해가 질 때까지 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부모들에게 들켜서 야단을 맞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

 

    그럴 때면 그 부모들은 일부러 내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독가촌의 아이만도 못하느냐고 야단을 치곤 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다른 곳에서 이사온 아이 하나를 당하지 못해서 온 동네 애들이 매일 도망만 다닌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딱지치기에서 내가 늘 이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종이가 귀하던 때라 종이로 접은 딱지가 많지 않았는데, 딱지를 많이 따는 사람이 최고의 우상이었다. 동네의 종이딱지란 딱지는 내가 모두 따버렸으므로 아이들은 딱지를 잃어서 속상한데다가 귀한 종이를 없앤다고 부모들에게 야단까지 맞을 것이므로 이중으로 내가 얄미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딱지치기를 할 때면 딱지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절대로 그냥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날이 어두워져서 동네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부르러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저물어서야 집으로 올 수가 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간 해의 봄에 드디어 압박과 설움에 시달리던 아이들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 쪼이던 어느 봄날 개구쟁이 아홉명 정도가 모여서 칡을 캐러가기로 했었다. 칡을 캐는 장소는 동네에서 가장 높은 표대등 부근으로 잡고 각각 흩어져서 칡을 열심히 캤다.

 

   나중에 모여서 캔 칡을 내어서 비교해본 결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굵고 둥근 봉을 가장 많이 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각자의 칡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양으로 막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여덟 명의 아이들이 나를 에워싸더니 그 중 가장 힘셀 것으로 보이는 한 아이가 나와 싸우고 싶다고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주의의 아이들을 둘러보았더니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빨리 항복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덤빌 것 같은 분위기에서 내가 느꼈을 공포감은 상당히 컸으며 충격 또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내가 너무 방심했구나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는 그 아이의 서릿발같은 말이 다시 입 밖으로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 아이의 손은 이미 내 턱을 강타했고, 난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이들의 싸움에서는 먼저 울거나 코피가 나는 쪽이 지게 되어 있는지라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그 아이에게 졌다고 하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런데, 진짜로 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나머지 아이들 일곱 명도 모두 나와 싸우겠다고 한 명씩 선포를 하고 나선 것이었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으로 나는 그날 여덟 명의 아이들 모두에게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로 어찌된 일인지 나는 우리 동네의 어떤 아이도 이길 수 없게 되었고, 동네에서 가장 싸움 못하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내가 마을의 모든 아이들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난 다음부터 학교에 갈 때나 집으로 올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른 동네 아이들까지 나서서 싸움을 걸어왔고 그 때마다 나는 졌다고 하거나 몇 대 얻어맞고 항복을 하곤 했었는데,

 

   상대방아이들이 혼자서 덤비는 경우는 거의 없이 꼭 몇 사람씩 짝을 지어서 덤비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심한 경우는 선배나 형을 데리고 와서 나를 때리거나 협박하는 아이들도 생기게 되었다.

 

   아이들 세계 역시 어른들 세계와 마찬가지로 약점을 노출시키기만 하면 덤벼서 물어뜯는다는 것을 뼈저리도록 느끼게 해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나는 아이들과 노는 일에 별로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혼자서 지내거나 자연이나 동물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이 오히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전공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에 내가 주로 놀이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하늘의 구름과 비오는 모습,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 두더지, 개미귀신, 개미, 굼뱅이, 쥐, 독수리, 새매, 꿩, 벌, 산토끼, 뜸부기, 개구리, 뱀, 닭, 개 등이었는데,

 

 이들과 함께 보내면서 살피고 익혔던 모든 것이 내 인생과 전공에 있어서 소중한 밑거름으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고전문학 연구에 엄청난 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친구들도 자세히 모르는 것들을 내가 유독 많이 알게 된 것은 바로 나를 집단 따돌림 시켜서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할 수 있게 해 준 동네 아이들의 덕분이다.

 

  그야말로 세상사 새옹지마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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