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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세계/寸鐵殺人

대통령기록물과 조선왕조실록

by 竹溪(죽계) 2022.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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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기록물과 조선왕조실록

뉴제주일보 승인 2022.04.10 19:00

손종흠 전한국방송대제주지역대학장·논설위원

대한민국 국보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록되어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부터 철종까지의 통치기록으로 해당 시기의 국가 공식 기록물인데, 현대 사회에서 이것과 비견되는 것을 든다면 대통령기록물을 꼽을 수 있다.

 

시대는 다를지라도 두 자료 모두 최고 권력자의 직무와 관련된 국가 공인기록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공정성과 객관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지만, 대통령기록물은 언제나 말이 많고 지금도 그런 상황이 여지없이 재현되고 있다.

 

대통령기록물이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최고 지도자의 직무 관련 내용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마땅하지만 왜 대통령기록물은 그렇지 못하다는 평가를 자주 받는 것일까?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정을 살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임시 기관으로 실록청을 설치하여 전왕(前王)의 통치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는 절차를 진행했다.

 

이때 이용되는 자료는 정부 각 기관에서 남긴 문서를 정리해 둔 춘추관시정기(春秋館時政記)와 사관들이 작성해둔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등 국가 주요 기관의 기록, 개인 문집 등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초이다.

 

사관은 당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관장하는 춘추관의 관직을 겸하는 사람으로 국왕의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는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을 지칭하는데, 대개 문과에 새로 급제한 젊은 선비들을 임명했다. 사관의 직위는 낮았지만, 항상 임금 곁을 지키면서 국가의 중대 회의에 모두 참석하여 그때그때 일어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사초를 중심으로 다양한 기록물들을 기초 자료로 하여 편찬되는 왕조실록은 초초(初草), 중초(中草), 정초(正草)의 세 번에 걸친 검수와 교정을 거쳐 완성된다. 여기에는 정치의 잘잘못, 왕의 선과 악, 신하들의 간사한 거짓 등이 사실대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사관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사초, 초초, 중초 등의 문서는 시냇물에 씻어 글자를 없애 버리도록 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비밀이 공개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승하한 후에 편찬되고 왕실 관련 인물은 실록 편찬에 관여할 수 없으며, 기록물, 특히 사초 등에 적힌 내용의 비밀은 철저하게 보호했고, 완성된 실록은 사관 외에 누구도 볼 수 없게 했다는 것 등을 핵심적인 특징으로 꼽는다. 이런 장치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었다.

 

현대 사회의 대통령기록물 역시 국가에서 공인한 것으로 소유권 또한 정부가 가지지만, 지금의 대통령은 재임하는 기간에 모든 자료를 스스로 선택하고 분류하며, 정보 보호기간까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러니 시민단체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청와대 특활비 정보를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았음에도 영부인의 옷값이 국가 기밀에 해당한다면서 이를 거부하고 항소를 하여 시간을 번 다음, 대통령기록물에 넣어 묻어버리겠다는 얄팍한 속임수를 부리려 하는 것이다.

 

한 나라를 일정 기간 책임지고 다스렸던 대통령이라면 최소한 국민에게 지탄받는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함은 물론,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행위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통령기록물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당 자료의 선택, 분류, 편찬, 보존 등의 작업을 차기 정부가 독립 기관을 통해 처리하도록 하고 해당 정부는 일체 관여할 수 없도록 하는 법적 장치를 반드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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