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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세계/우리문화칼럼

삼전도(三田渡)

by 竹溪(죽계) 2021.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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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三田渡)의 가을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삼전동은 석촌호수의 남서쪽에 있는 지명인데, 이 지역은 조선 중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한 후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으며, 청나라 임금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三田渡碑)가 서 있는 곳으로 치욕스러운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123층의 롯데월드타워가 세워지면서 석촌호수와 그 주변은 많은 사람이 찾는 서울 최고의 명소로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 지역을 오가면서 유흥을 즐기기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지만, 석촌호수 바로 북서쪽 모퉁이에 서 있는 삼전도비를 찾는 사람은 매우 드물거나 거의 없다. 역사교육의 허점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현실을 잘 반영한 현상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삼전도비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기보다 우리 말로는 삼밭나루, 뽕밭나루, 삼밭개 등으로 불리던 것이 왜 한자로 될 때는 마전도(麻田渡)로 되지 못하고 삼전도(三田渡)로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기록을 보면 이 지역이 삼전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세종 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7년(1425)때 기록부터 이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렸을까? 태조 때부터 시작된 왕조실록에는 조선이 세워진 직후인 태조 7년(1398)에는 마전포(麻田浦)로 불렸고, 세종 2년(1420)에는 마전도(麻田渡)로 불린 기록이 나타난다. 이러한 명칭은 삼베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 삼나무를 심어 가꾸었던 밭이 이곳에 있었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왜 세종 7년에 삼전도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일까?

 

삼전도라고 한 이유에 대해 민간에서는 조선의 왕인 인조가 청나라 왕에게 세 번 절하고 항복한 곳이라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든지, 이곳에만 물에 잠기지 않는 밭이 세 개가 있어서 붙여진 것(송파구청 홈페이지)으로 알고 있는 일도 있지만,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지금부터 그 오류를 바로잡도록 한다.

지금은 대단한 번화가가 된 잠실, 석촌호수, 삼전동 부근의 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한강을 마주하고 있었던 곳으로 모래톱이 발달하여 여러 식물을 가꾸기에 적합했다. 삼전동 부근에는 삼베의 원료를 만드는 삼나무를 심고, 잠실 부근에는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잎은 생산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었으며, 바로 건너 작은 섬(楮子島)에는 종이를 만드는 재료인 닥나무를 심어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했던 곳인 데다가 이곳에서부터 남한산성에 이르는 지역 전체가 왕실의 사냥터 겸 군사 훈련장이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큰 지역이다.

마전포, 혹은 마전도가 삼전도로 바뀌게 된 데에는 이러한 공간적 배경과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전(三田)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과거 왕권 국가에서는 왕과 왕실에 속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사냥을 즐겼는데, 그들이 독자적으로 이용하는 공간을 설정하여 왕실 사냥터로 삼기도 했다. 자연적인 환경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다양한 동물이 살도록 한 후 사냥을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왕실 사냥터는 매우 큰 규모였다. 조선의 왕실 목장이면서 사냥터로 삼았던 곳은 중랑천 동남쪽 들판인 뚝섬부터 장한평을 거쳐 아차산에 이르는 지역, 잠실부터 남한산성이 이르는 공간으로 매우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왕실 사람들이 사냥하는 것을 전렵(田獵)이라고 하는데, 들과 산을 달리면서 짐승(禽獸)을 잡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냥은 속도감과 스릴 때문에 중독성이 매우 강하여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정권과 나라를 망칠 수도 있으므로 역대 왕들은 후손에게 제위를 물려 줄 때 항상 경계하는 것이 사냥을 너무 즐기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 결과 왕이 사냥하는 횟수를 제한하게 되었는데, 일 년에 세 번만 하도록 규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것은 선조들에 의해 엄격히 지켜온 것이기 때문에 패륜적인 왕이 아닌 이상은 반드시 지켰다고 보면 된다.

 

왕 등이 매년 세 번만 사냥하도록 한 이러한 규칙을 일러 삼전(三田)이라 불렀는데, 세종 때에는 앞 시대 선조들이 남긴 교훈을 본받기 위해 마전에서 삼전으로 바꾼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종 이후의 기록에 삼전과 마전 등이 혼용되어 쓰인 것으로 보아 원래의 명칭도 그대로 보존되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삼전도라는 명칭이 오늘날에는 거의 유일한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어떤 이는 삼전이란 명칭보다는 마전이라는 것이 올바르므로 그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삼전으로 부르게 된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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