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요람(歷代要覽)
경태(景泰) 명 대종(代宗), 세종(世宗) 32년(1450년)
7년 병자년에 칠신(七臣)박팽년(朴彭年)과 박인수(朴仁叟)는 세종조(世宗朝)에 등제(登第)하여 성삼문(成三問) 등과 항상 집현전(集賢殿)에서 왕에게 중히 여김을 받았다. 을해년에 광묘(光廟 세조(世祖))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자, 팽년은 왕(단종)의 일은 마침내 할 수 없음을 알고 경회루(慶會樓) 못에 임하여 스스로 죽고자 하니, 성삼문이 굳이 제지하며 말하기를, “방금 왕위가 비록 옮겨졌으나 임금께서 아직도 상왕(上王)으로 계시니, 우리가 죽지 않으면 아직도 후일에 도모할 수 있다. 도모해서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늦지 않으니 금일의 일은 국가에 무익하다.”하니, 박팽년은 그 말을 좇아 드디어 성삼문과 몰래 모의하다가 얼마 후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가게 되었다. 광묘(光廟)에게 일을 아뢸 때에 신이라고 칭하지 않고 다만 ‘모관(某官) 박모(朴某)’라고 썼으나 조정(朝廷)에서는 알지 못했다. 이듬해에 들어와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어 성삼문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ㆍ무인(武人) 유응부(兪應孚)ㆍ문관(文官) 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愷)ㆍ유성원(柳誠源)ㆍ김질(金礩)ㆍ상왕(上王)의 외숙(外叔)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상왕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했다. 당시 명 나라의 사신이 와서 태평관(太平館)에 머물고 있었는데 광묘가 상왕(上王)과 같이 사신을 청하여 창덕궁(昌德宮)에서 잔치를 베풀고자 하니, 박팽년 등이 모의하기를, “이날 성승 및 유응부로 하여금 운검(雲劍)이 되어 연청(宴廳)에서 거사(擧事)하여 성문(城門)을 닫고, 왕의 우익(右翼) 되는 사람을 제거하면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으리라.”하였다. 유응부가 말하기를, “왕과 세자는 내가 맡을 것이니, 나머지는 여러분이 처치하라.”하였다. 모의가 이미 정해졌는데 마침 그날 왕은 명하여 운검(雲劍)을 파(罷)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세자 또한 병으로 따르지 않았으나 유응부는 오히려 들어가 치고자 하니, 성삼문이 제지하기를, “지금 세자가 본궁(本宮)에 있고, 운검은 쓰이지 않으니 이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다. 만약 여기에서 거사하였다가 세자가 경복궁(景福宮)으로부터 군대를 동원한다면 성패(成敗)를 알 수 없으니, 다른 날을 기다려 거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였다. 유응부가 말하기를, “일은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니, 만약 늦춘다면 훗날 일이 누설될까 두렵고, 세자가 비록 이 자리에 있지 않을지라도 우익(羽翼)들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금일에 다 죽이고 상왕의 호령을 받들어 무사(武士)로 하여금 그쪽으로 가서 세자를 제거하면 될 것이니 천재일시(天載一時)의 얻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완벽한 계획이 아니다.”하니, 드디어 멈추고 거사하지 않았다. 김질(金礩)은 일이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처부(妻父) 정창손(鄭昌孫)에게 달려가 모의하여 말하기를, “금일 세자가 왕을 수행(隨行)하지 않고, 특히 운검(雲劍)을 없애어, 박팽년ㆍ성삼문이 그 모의를 중지하였으니, 이것은 천명(天命)입니다. 먼저 고발하여 요행으로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하니, 정창손이 곧 대궐로 가 반역(反逆)을 아뢰어 말하기를, “신(臣)은 실로 몰랐고, 김질 홀로 거기에 참여하였으니, 김질의 죄는 만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였다. 왕은 김질 및 정창손을 특별히 용서하고 공신(功臣)에 올리도록 하고, 박팽년 등을 체포 문초하니 자백하였다. 왕은 그 재주를 사랑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귀순(歸順)하여 처음의 음모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숨긴다면 살 수 있다.”하니, 박팽년은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고 왕을 대하면 반드시‘나으리[進賜]’라 불렀다. 왕은 그의 등을 치게 하고 말하기를, “너는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고 칭하였으니 이제 비록 칭하지 않아도 소용이 없다.”하니, 대답하기를, “팽년은 상왕(上王)의 신하이므로 충청 감사(忠淸監司)에 임명된 지 1년 동안 나으리에게 아뢰는 문서에 일찍이‘신’이라 칭하지 않았습니다.”하였다. 사람을 시켜 그가 올린 문서를 조사하는데 과연 신이라는 글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 아우 박대년(朴大年)ㆍ아들 박헌(朴憲)과 함께 모두 죽고, 그 처(妻)는 관비(官婢)가 되었으나 종신토록 절개를 지키었다. 박헌은 생원(生員)에 합격하였고 또한 정직하였다. 형(刑)을 당함에 임하여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너는 나를 난신(亂臣)이라고 하지 말라. 우리들 죽음은 계유(癸酉)의 사람(김종서(金宗瑞) 일당)과 같은 것이 아니다.”하였다. 김명중(金命仲)은 다시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되었는데 사사로이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공(公)은 어찌하여 군부(君父)에게 효도하지 아니하고 이 화(禍)를 당하기에 이르렀소?”하니, 박팽년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마음 속이 평안(平安)하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였다. 윤훈(尹壎)은 박팽년과 성삼문과 종유(從游)했는데, 사람에게 말하기를, “성공(成公)은 농담하면 잘 웃고, 앉고 눕는 것이 절도(節度)가 없고, 박공(朴公)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衣冠)을 풀지 아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일으키게 한다.”하였다. 광묘(光廟)가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부중(府中)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 현악(絃樂) 울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만사 지금 도무지 모를래라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르러 동풍(東風)이 하늘하늘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밝아 봄날이 정히 더디도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대업은 금궤(金櫃 국가와 왕에게 관계되는 기밀문서를 보관하는 궤)를 열었고 / 先王大業抽金櫃
성주의 넓은 은혜에 옥배(玉杯)를 기울이네 / 聖主鴻恩倒玉巵
어찌 길이 즐기지 아니하리 / 不樂何爲長不樂
태평시절에 노래 화답하고 실컷 취해 춤추네 / 賡歌醉飽太平時
하니, 광묘는 좋아하여 칭찬하고 판(板)에 새겨 부중(府中)에 달았다. 박팽년은 성질이 침착하여 말이 적고,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닦고, 문장은 맑고 깨끗하고, 필적(筆蹟)은 종요(鍾繇 위(魏) 나라의 서예가)와 왕희지(王羲之 진(晉)나라의 서예가)를 모방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은 자(字)는 근보(謹甫)요, 창녕인(昌寧人)이다. 세종(世宗) 정묘년에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경연(經筵)에 오래 모시며 임금의 학문을 보좌하였다. 영묘(英廟)는 만년(晩年)에 묵은 병이 있어 누차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언제나 성삼문 및 박팽년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이개(李愷) 등으로 하여금 편복(便服 평복(平服))을 하고 어가(御駕) 앞에서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계유년에 광묘(光廟)가 김종서(金宗瑞)를 죽일 때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으로서 숙직하여 호위하였으므로 정난공신(靖難功臣)의 호(號)를 내려주었는데 성삼문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여 음식이 맛이 없었다 한다. 공신(功臣) 등이 돌아가며 연회를 베풀었는데 삼문만은 베풀지 않았다. 을해년에 광묘가 왕위를 이어 받을 때 땅에 엎드려 울며 덕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좌우의 종신(從臣)은 감히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성삼문은 예방승지(禮房丞旨)로서 국보(國寶 국왕의 인장)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성통곡(失聲痛哭)하자 광묘는 그때에 머리를 들고 바라보았다. 이듬해 병자년에 그 아버지 성승 및 박팽년 등과 더불어 노산(魯山)을 복위(復位)시킬 것을 모의하여 여러 사람이 집현전에서 회의하는데, 성삼문이 말하기를, “신숙주(申叔舟)는 나의 친한 벗이나 죄가 커서 죽이지 않을 수 없다.”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다.”하였다. 또 김질(金礩)에게 말하기를, “너의 처부(妻父) 정창손이 마땅히 수상(首相)이 될 것이다.”하고, 무신(武臣)으로 하여금 각각 죽일 사람을 맡게 하는데, 형조 정랑(刑曹正郞) 윤영손(尹寧孫)은 신숙주를 맡았다. 사신을 청하여 잔치하는 날에 운검(雲劒)을 파(罷)함으로써 계획을 정지하였으나, 윤영손은 알지 못하고 바야흐로 신숙주가 뒷방에서 머리를 감는데 윤영손이 칼을 어루만지고 앞으로 나아가니, 성삼문이 눈짓으로 제지하자 곧 물러갔다. 그 후 조금 있다가 일이 누설되어 성삼문에게 차꼬를 씌워 전정(殿庭)에 들이니, 광묘(光廟)가 친히 묻기를, “너희들의 이 거사는 어찌 된 일이며, 무엇 때문에 나에게 반역하느냐?”하니, 성삼문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전(前) 임금을 복위(復位)시키고자 할 뿐이오. 천하에 누가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겠소? 나의 마음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데, 나으리는 무엇이 이상해서 묻소? 나으리가 나라를 훔쳤으니, 저는 신하로서 차마 임금의 폐위(廢位)를 보지 못하겠소. 나으리는 평소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인용하였는데 주공도 또한 이러한 일이 있었소? 제가 이 일을 한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오.”하였다. 종실(宗室)에게 ‘나으리’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 사투리이였다. 광묘는 발을 구르며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처음 왕위를 이어받을 때 왜 제지하지 않고 도리어 나를 따르고서 이제 나를 배반하느냐?”하니, 삼문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금지할 수 없는 것은 사세가 그러했을 뿐이오. 내가 이미 나아가 제지할 수 없음을 알고 오직 물러가 한 번 죽음이 있음을 알 뿐이나, 죽기만 하면 무익하니 참고서 지금까지 이른 것은 일을 도모하고자 할 뿐이었소.”하였다. 광묘가 말하기를, “너는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고 부르니 너는 나의 녹(祿)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역하는 자이다. 너를 병방승지(兵房丞旨)에서 예방승지(禮房丞旨)로 바꾸었더니 반드시 이것을 원망한 것이다. 명분(名分)은 상왕(上王)을 복위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나 실은 제가 하려는 것이다.”하니, 성삼문은 말하기를,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는 어찌하여 나를 신이라 하오? 나는 정말 나으리의 녹(祿)을 먹지 않았으니 믿지 않거든 나의 집을 몰수하여 세어 보시오. 나으리의 허망(虛妄)함은 취할 것도 없소.”하였다. 광묘는 성을 잔뜩 내어 무사(武士)로 하여금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뚫게 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팔뚝을 끊게 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서, 천천히 말하기를, “나으리의 형벌이 참혹하오.”하였다. 그때에 신숙주(申叔舟)가 임금 앞에 있었는데, 성삼문이 그를 책하여 말하기를, “처음 네가 집현전(集賢殿)에 있을 때에 세종(世宗)께서 나날이 왕손(王孫)을 안고 뜰 안에 걸어나와 이리저리 거니시며 여러 유신(儒臣)에게 이르기를, ‘과인(寡人)이 오래오래 명대로 살다가 죽은 뒤에는, 경(卿)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생각하라.’하셨다.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데 너만 홀로 잊었느냐? 나는 네가 악한 짓을 하기를 이렇게 극도에 이를 줄 몰랐다.”하였다. 다시 문초할 때에는 왕은 신숙주로 하여금 피하게 했다. 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顔)이 연루되어 끌려와 고문해도 자백하지 아니하자, 왕은 성삼문에게 묻기를, “강희안이 모의에 참여했느냐?”하니, 성삼문은 말하기를, “정말 모르오. 나으리가 명사(名士)를 다 죽였으니 마땅히 이 사람은 남겨두어 쓰시요. 정말 현사(賢士)오.”하였다. 강희안은 이로 말미암아 화를 면하게 되었다. 성삼문은 수레에 실려 문을 나가는데 안색이 태연하여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현주(賢主)를 보좌하여 태평을 이루라. 나는 지하에 돌아가 옛 임금을 뵙겠다.”하고, 감형관(監刑官) 김명중(金命仲)에게 웃으며 일러 말하기를, “이 일이 무슨 일이냐?”하였다. 성삼문이 죽고 나서 그 집을 몰수하니 을해년 이후부터의 녹봉(祿俸)은 한 방에 따로 두어 모년(某年) 모월(某月)의 녹(祿)이라고 써 두었고, 집에는 남은 바가 없었으며 침방(寢房)에는 오직 거적자리가 있을 뿐이었다.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장남은 이름이 성원(成元)이었다. 처는 관비(官婢)가 되었으나 절개를 온전히 했다. 성승(成勝)의 사랑하던 종이 함길도(咸吉道)에 가서 살았는데, 일찍이 서생(書生) 정세린(鄭世麟)에게 이야기해 말하기를, “성승이 도총관(都摠管)이 되어 들어가 숙직하는 날에 선위(禪位)의 일이 있음을 듣고 종을 불러서 성삼문이 있는 승정원(承政院)에 보내어 국사(國事)를 물은 것이 그 횟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으나 삼문(三問)이 대답하지 아니하여 종은 헛되이 갔다가 헛되이 돌아왔다. 최후에 갔을 때에 성삼문은 일어나 변소에 가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한숨 쉬며 말하기를, ‘일은 끝났다.’하였다. 종이 이 사실을 아뢰니 성승 역시 한숨을 쉬고 곧 종을 시켜 말에 안장을 갖추고 나와 집에 이르렀는데, 종이 몰래 쳐다보니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은 병을 핑계로 관청에 나가지 않고 한 방에 누워 일어나 먹지 않으니 처자(妻子) 역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오직 성삼문만이 와서 좌우를 물리치고 함께 이야기할 뿐이었다.”하였다.
성삼문(成三問)
성삼문은, 자는 근보(謹甫)이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세종 무오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에 중시에 장원으로 뽑혔다. 병자년에 승지로서 아버지 승과 아우 세 사람이 모두 죽었다. 숙종이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주고,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홍주(洪州)노은동(魯隱洞 적동리(赤洞里)) 외가에서 났는데, 날 때에 공중에서 “났느냐.”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기 때문에 성삼문으로 이름 지었다. 사람됨이 소탈하여 얘기와 농담을 좋아하고 앉고 눕는 것도 절도가 없어 겉으로 보기에는 주장이 없는 것 같으나 속뜻은 단단하고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었다 한다. 《추강집》
○ 항상 임금을 경연청(經筵廳)에서 모시며, 보좌할 때가 많았다. 세종이 말년에 병이 있어 여러 번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편복(便服) 차림으로 늘 성삼문과 이개에게 대가(大駕) 앞에서 고문(顧問)에 응하게 하니, 당시에 영광으로 여겼다.
○ 일찍이 북경에 갔었는데 어떤 사람이 백로(白鷺) 그림에 넣을 시를 써 달라고 청하여서, 공이 건성으로 부르기를,
흰 눈으로 옷을 만들고 옥으로 발을 만드니 / 雪作衣裳玉作趾
갈대 숲 물가에서 고기 노리기 몇 번 이런고 / 窺魚蘆渚幾多時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림을 내 보이는데, 수묵(水墨)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어 아랫 구절을 채워서 이르기를,
산음 고을 우연히 지나다가 / 偶然飛過山陰野
왕희지가 벼루 씻던 못(池)에 잘못하여 떨어졌네 / 誤落羲之洗硯池
하였다. 패관잡기
○ 북경에 가는 길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에 쓰기를,
말머리를 잡고 두드리며, 그르다고 말한 것은 / 當年叩馬敢言非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났건만 / 大義堂堂日月輝
풀나무도 주 나라의 비와 이슬에 자랐는데 / 草木亦霑周雨露
부끄럽다, 그대 어찌 수양산 고사리는 먹었는고 / 愧君猶食首陽薇
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보고 충절이 있는 사람인줄 알았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짓기를,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落落)장송(長松)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이몸이 죽어가서 무어시될고 니 蓬萊山第一峯의 落落張松되여읜셔 白雪이 滿乾坤졔 獨也靑靑 리라]” 하였다.
○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원(元)이다. 그 아내가 관비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켰다. 《추강집》
○ 명 나라 급사(給事)장녕(張寧)이 시강(侍講)예겸(倪謙)문희(文僖) 에게 배웠는데, 예겸보다 십 년 뒤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나왔다. 그때에 나이 24세였는데, 성삼문 등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며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스승 예시강(倪侍講)이 동국에 재사가 많다고 말하였는데, 어찌 눈앞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가.” 하며, 이 때문에 시의 수창(酬唱)에 뜻이 없었다. 장녕이 지은 <예양론(豫讓論)>을 혹자는 의심하기를, “의도가 있어서 지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한다. 《지봉유설(芝峰類說)》
○ 중종조에 박호(朴壕)가 과거에 올라 육품관이 되었다가, 곧 정언을 제수받았는데, 대사간으로 있는 조(趙)라는 성을 가진 자가 반론하기를, “역신의 후손이 간관(諫官)이 될 수 없다.”고 논박하여 체직(遞職)시키자, 조(趙)의 동배(同輩)들이 책하기를, “네가 감히 명신의 후손을 탄핵하고 논박하니, 이렇게 무식하고서야 어떻게 그대로 간관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하였다. 조가 곧 병을 핑계하여 체직되고, 박이 도로 청반(淸班)에 올라 이조 판서까지 되었다 한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현종(顯宗) 임자년(1672)에 호조 아전[戶曹吏]엄의룡(嚴義龍)이 우연히 인왕산(仁王山) 비탈 무너진 곳에서 자기 그릇을 발견하였는데, 그 속에는 밤나무 신주 세 개가 있었다. 하나는 고(故) 승지성삼문의 것이요, 둘은 성삼문의 외손 참찬박호(朴壕) 부부의 것이었다. 성 승지의 신주는, 겉면(面)에는 성삼문(成三問) 무술생이라고 쓰고, 신주의 감중(坎中)에도 또 그와 같았다. 엄의룡이 놀랍고 이상하여 달려와 여러 사대부에게 고하더니 이에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몰려가서 배례를 하고 신여(神輿)에 담아 떠메고 와서 임시로 공의 외후손인 진사 박엄찬(朴嚴纘)의 집에 봉안하고, 곧 홍주에 사는 외후손들에게 기별하니 와서 받들고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홍주 노은골에 아직도 공의 옛 생가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경기 감사는 김우형(金宇亨)이었는데, 연로(沿路)의 관원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다. 각 고을 수령들이 영송함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고, 혹은 제수를 갖추어 제사지내는 이도 있었다.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이로 말미암아 감동하여 구택 옆에 사당을 세우고 거사 당시의 동지였던 다섯 분을 아울러 향사하기로 하고, 병진 여름에 녹운서원(綠雲書院)을 세웠다. 공이 순절한 뒤에 부인 김씨가 자기 손으로 신주를 써서 종에게 부탁하여 봉사하다가, 김씨가 죽은 뒤에 신주가 외손 박호에게로 돌아갔었는데, 박호 또한 자손이 없으므로 인왕산 기슭에 자기 집 신주와 함께 묻었다. 이백여 년 뒤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장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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