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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육신관련/유성원

필원잡기 사육신유성원 기록

by 竹溪(죽계) 200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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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원잡기 제2권



○ 세종 때에 《송사(宋史)》가 본국에 오지 않아 세종이 누차 전달하여 간청하였으나 하사를 받지 못하였다. 어느 날 집현전의 여러 선생들이 송나라 인물을 논평하는데 나 또한 그 말석에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송사》를 짓는다면 왕안석(王安石)은 응당 어느 전기[傳]에 있어야 할 것인가.” 하니 여러 선생들이 모두 말하기를, “응당 간신전(奸臣傳)에 있어야 한다.” 하였는데, 한두 사람의 반박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왕안석이 새 법을 만들어 천하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소인이다. 그러나 왕안석의 문장과 절의는 가히 청송할 만한 것이 많이 있으며, 그의 본심을 살펴본다면 일찍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근심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가 천하를 그르친 것은 바로 말과 행동이 사리에 맞지 않고 집요한 데서 온 것이니, 진회(秦檜)와 채경(蔡京)의 짝에 나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응당 열전에 있어야 한다.” 하였는데, 유성원(柳誠源)이 강력히 이 논의를 주장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송사》가 왔는데 왕안석이 과연 열전에 있었다. 유성원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옛날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이 우리나라에 이르기 전에, 이익재(李益齋 이제현) 선생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무후기(武后紀)를 읽고 길게 한숨짓고, 시 한 연(聯)을 지어 말하기를


어찌하면 주(후주)의 여분을 가지고 / 那將周餘分

우리 당의 세월을 이을고 / 續我唐日月


하였던 바, 뒤에 《강목》을 얻어 보니 주자는 과연 주를 배격하고 당을 높여 놓아 익재 선생도 자못 자부하였던 것이다. 나 유성원은 비록 감히 익재 옹에 비유하지는 못하나 마땅히 제군에게 항복을 받아야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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