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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육신관련/사육신기록

사육신 '동광'의 기록

by 竹溪(죽계) 2006.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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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명 동광 제25호 

호수 제25호 

발행년월일 1931-09-04 

기사제목 神童의 이름 높은 東峯 金時習  

필자 한결 

기사형태 문예기타  


金時習은 江陵人이며 字는 悅卿인데 世宗 17년 乙卯에 낫습니다. 난 지 여덟 달에 글씨를 알앗으며 세 살에 글(文)을 잘 짓게 되엇고 다섯 살에는 庸學에 통하게 되어서 소문이 嘖嘖하게 되엇습니다. 聖主 世宗은 인재를 극히 사랑하고 장려하시던 터라 時習을 부르라 명하시어서 朴以昌으로 하여금 시험하여 이르기를

『童子의 學은 白鶴이 靑空의 끝에 춤추는 듯하고나.』

한 즉 時習은 곳


『聖主의 德은 黃龍이 碧海 가온대에 나르는 듯 하외다.』

하여 應口 輒對함으로 以昌은 무릎 우에 앉히고 여러 번 詩로써 시험하여 보앗으나 번번이 빠르게 대답하고도 또 매우 아름답앗습니다. 世宗께서는 극히 칭찬하여 신동이라 하고 장성하거던 크게 쓰겟다 하시면서 옆에 선 世子(文宗) 世孫(端宗)을 돌아보면서 時習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의 임금이 될 터이니 잘 알아 두어라.』


고 소개하신 뒤에 상으로 비단(帛) 50필을 그 앞에 쌓아 놓으시고 마음대로 가지고 가라 한 즉 時習은 바눌을 청하더니 그 끝을 맞붙인 뒤에 끌고 나아갓습니다. 그리하여 宮門 내외에 이 신동을 보려고 둘러선 이가 담을 이룬 듯 하엿습니다. 그리하여 이름이 전국— 퍼지게 되엇습니다. 시습이 장성한 뒤까지라도 사람들이 『金五歲, 金五歲』하고 부르게 됨도 이 까닭이엇습니다. 時習이 자라매 徐居正과 사귀어 놀게 되어 문학을 서로 다투엇습니다. 居正은 일쯕이 貴官이 되엇으나 時習은 이러한 일을 즐기어 하지 아니하고 항상 산중에 들어가 글 읽기를 좋아하엿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듯 하여 世宗이 돌아가시고 世子가 서더니 또 未幾에 그도 돌아가시고 世孫 즉 端宗이 즉위하게 되엇으나 世祖에게 내어 «“기어 魯山君이란 이름으로 寧越 淸冷浦에서 귀향살이를 하게 되다가 世宗의 舊臣 朴彭年, 成三問, 李塏, 柳誠源, 河緯地, 兪應孚(이른바 사육신)과 함께 魯山君도 죽임을 당하게 되엇습니다. 이 때 漢東 水落山 中에 잇던 金時習은 이 변을 듣고 통곡하면서 책을 다 불살우고 儒衣를 찢어 버리고 생으로 미친병을 가지게 되엇습니다. 그때 元昊 李孟專, 趙旅, 南孛溫, 成聘들도 時習과 같이 節을 지키엇는 고로 이들을 생육신이라 부르게 되엇습니다. 이때부터 時習은 머리를 깎고 중(僧)이 되어 스스로 雪岑이라 이름하기도 하고 혹은 淸寒子라 하기도 하엿습니다. 時習이 벼슬은 아니하엿으나 자기가 5세 때에 聖主 世宗에게 알리어 가지고 또 3대를 배슕�하는 동시에 遺命까지 받앗는 고로 참아 魯山君을 배반할 수 없는 동시에 首陽大君(즉 世祖)을 섬길 수 없다 하면서 밤낮 우짖고 「발광」하엿습니다. 베옷조각을 걸치고 새끼로 동이어 거지(걸인)노릇을 하엿습니다. 하로는 漢陽 城中에서 사람들이 宰相 徐居正의 入朝함을 보고 잇을 때 길에서 중 하나가 그 앞에 나타나면서 宰相을 향하여

『여보오 剛中(徐居正의 字)! 요사이 평안하시오.』

한 즉 徐씨는 失心한 듯이 사례하고 맞우 서서 서로 정답게 이야기하는 고로 보던 무리는 다 놀랏습니다. 그 중에 알던 이가 잇어 말하기를

『그이는 옛적 金五歲외다.』

하엿습니다. 世祖는 불교를 좋아하여 전국 중의 高僧을 부르매 중들은 다 雪岑이 득도하엿다고 말함으로 雪岑을 부르라 명하시엇습니다. 雪岑이 오매 世祖는 齋戒하고 여러 신하와 중들을 모아서 雪岑의 불법 설교를 들으시려 하엿습니다. 이때 雪岑이 도망하엿다 告함으로 왕은 찾으나 보이지 않더니 밖의 사람들이 「거리 厠間 중에 웬 중이 하나 잇는데 머리와 얼골이 더럽어서 가깝게 갈 수 없다.』고 지꺼림으로 나아가아 본 즉 그가 곳 金時習이엇습니다. 신하들이 『時習은 미친 書生인데 어떠케 불법을 알겟느냐.』고 말씀을 올림으로 그만두고 말은 일이 잇습니다. 그러하나 중들은 雪岑이 生佛되엇다고 많이 말하엿습니다. 時習 자신도 불법을 안다 하엿습니다. 그러하나 寧齋 李建昌은 時習이 실상은 불법을 몰랏다고 하엿습니다.(「淸隱傳」중 金時習傳) 그는 奇才가 잇고 하고저 함이 잇엇으나 世祖시대에서는 일을 할 수 없고 뜻을 일울 수 없는 고로 佛에 핑게 대고 못난이짓을 한 것이라 하엿습니다. 時習의 爲人이 모양은 추악하고 키는 적어 威風이 적으나 성질이 강직하고 豪邁하여 남에게 굴하지 아니하엿습니다. 그러하나 시대를 분개함이 심하여 상심됨이 과함으로 사람을 맞나도 울고 일을 당하여도 울며 말하기를 『斯民 何罪냐.』고 하엿습니다. 목소리가 청초하여 달밤이면 離騷를 고성으로 외오다가 또 울다가 함으로 늘 옷깃을 적시엇습니다. 술을 몹시 즐기어 술만 취하면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英陵(世宗의 陵인데 驪州에 잇음)이 보이지 않는 고로 심히 슬프다.』하엿습니다. 徐居正이 일쯕 呂尙의 釣魚圖를 보이면서 詩를 쓰라 할 때 詩習은 곳

『風雨蕭蕭拂釣磯

渭川魚鳥却忘機

如何老作鷹揚將

空使夷齊餓採薇』

라 하는 고로 居正이 잠잠하엿습니다. 나이 47에야 처음으로 머리를 기르고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게 되엇습니다. 여러 사람이 仕宦을 권하엿으나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여전히 산수간에 방랑하엿습니다. 산천 도처에 그의 발자취가 및지 아니한 곳이 없엇습니다. 혹은 法庭에 들어가 굽은 것(曲)을 가지고 곧다고 궤변을 벌이면 송사에 지는 일이 없엇습니다. 그러하나 이기게 되면 나아와서 仰天大笑하면서 그 反券을 다 태우어 버리엇습니다. 얼마 아니되어 처자가 다 죽어버린 고로 다시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 갓습니다. 그러하나 이 때에는 중이라 하지 않고 頭陀라 하면서 江陵 襄陽간에 배회하엿습니다. 그때 襄陽을 맡아 다스리던 柳自漢이 時習에게 가업을 회복하기를 권할 때 時習은 글로 回謝하여 이르기를

『落魂하면서 세상에 살음이 逍遙하면서 自適함만 같지 못하다.』

고 하엿습니다. 가을마다 높은 나무에 잎이 지게 되면 산에 올라〈48〉 물 맑은 폭포의 급류처에서 슬픈 노래와 賦詩를 잎에 써서 물결에 흘리어 보내되 한 잎을 뜨이고 한 번씩 울매 곡성이 山谷을 振動하엿습니다. 그 시에는 무엇이라고 하엿던지 時習이 전하지 아니하고 산수가 말이 없으니 알 길이 막연합니다. 그러하나 울 때에 가끔 世宗을 불럿다고 합니다. 그 뒤에 麟蹄 雪岳으로부터 鴻山 無量寺에 다달아 59세로 세상을 버리고 말앗습니다. 火葬하지 말고 儒衣冠으로 장사하라한 고로 절 곁에 탑을 세우고 간직하엿습니다. 그러하나 3년이 지나도록 얼골이 산 것 같고 썩지 아니함으로 태우고 말앗다 합니다.

세상이 그를 梅月堂이라 함은 金鰲山에 거처할 때에

『矮屋靑氈暖有餘,

滿堂梅影月明初.

挑燈永夜焚香坐,

閑著人間不見書.

玉堂揮翰己無心,

端坐松窓夜正深.

脊罐銅甁烏丸靜,

風流奇話細搜尋.』

이라 한 『金鰲新話』에 쓴 시의 梅月의 뜻을 취한 것이라 합니다. 梅月堂 故址는 慶州 金鰲山 南邊洞에 잇습니다. 公의 사적은 栗谷 李珥 奉敎撰인 傳記에 실리어 잇고 공의 저술로는 梅月堂集(17권 9책)이 잇습니다. 그 밖에 金鰲新話가 전하고 또 散逸된 것도 많이 잇는 모양이외다. 金鰲山新話 끝에다가 『書甲集後』라고 詩 한 편을 쓴 것은 甲集 이하 續集이 잇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뒤 正宗 甲辰(서기1484)에 吏判을 進贈하고 謚를 淸簡이라 하엿습니다.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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