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추악함과 어둠의 성스러움이 하나되는 영화 '나쁜 남자'
영화 '나쁜 남자'는 나쁜 남자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표면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분명 자신을 모욕한 천사같은 여주인공을 타락시킨 나쁜 남자의 복수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그 정도의 내용이 아니다. '나쁜 남자'는 성스럽다고 할 정도로 맑은 영혼을 가진 한 남자를 나쁜 남자라는 표면적 현상으로 그린 영화다. 그러면 이제부터 영화 '나쁜 남자'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영화는 빛과 어둠를 두 축으로 하면서 빛과 어둠이 서로 소통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빛과 어둠이 하나로 통합되어 진정한 사랑을 이루어내는 사랑의 소통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빛과 어둠의 두 축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빛과 어둠이 가지는 영화 속의 의미이다. 빛은 밝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밝음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추악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한 행동들과 일들이 바로 빛 속에서 일어난다. 이와 반대로 어둠은 표면적으로는 어둡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가장 맑고 가장 성스러운 것들이다. 이 어둠 속에서 남자 주인공의 성스러운 사랑이 추악함으로 가득찬 빛의 세계에 대한 소통을 시도하고 그 시도를
통해 사랑을 완성시켜 나간다. 영화에서 빛과 어둠이 가지는 의미는 추악함과 성스러움이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인 한수는 두 명의 깡패를 거느린 두목이다. 그런데, 깡패로서의 한기를 눈여겨 보면 흥미 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깡패의 두목이면서 싸움 실력이 대단한 것으로 나오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한수는 계속해서 얻어맞거나 찔리거나 머리가 깨지거나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늘 빛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 또한 눈여겨 보아야 한다. 밝음으로 빛나고 있지만 추악함으로 가득한 빛의 세계에서 한기는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기의 본성이 아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한기의 본성은 어둠 속에서 발휘된다. 어둠 속에 숨어서 여주인공인 선화를
지켜보는 모습이나 부하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칼을 숨기는 행위 등은 모두 어둠 속에서만 일어난다. 빛의 세계에서는 나타나지 못하는 한기의
본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기의 행위는 빛의 세계에서는 타락한 세상을 타락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행위가 되고, 어둠의 세계에서는 가장
맑은 영혼을 가진 주인공이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위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둠과 빛은 서로 통할 수 있는
소통의 창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기는 늘 숨어서 선화를 지켜보기만 할 뿐 어둠 속에서는 실제 행동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선화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란 빛의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추악한 행동 뿐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또 있다. 왜 한기는 다른 부하들이나 경찰
처럼 사랑의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선화가 이 남자의 맑은 영혼을 알아볼 정도로 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선화는 추악함이 판치는 빛의 세계에 아직도 있는 관계로 어둠 속에 감추어진 성스러운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기는 선화를 빛의 추악함 속에서 최대한으로 타락시킴으로서 어둠의 성스러움을 깨닫게 하려고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천사같은 삶을 살고 있는 선화는 자신을 천사라고 믿기 때문에 매춘을 통해 타락해가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게된다. 그런 상태에서 선화는 한기를 절대로 사랑할 없기 때문에 현상적인 하강을 통해 성스러움이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로
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하강이지만 영화에서 진정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실제적 상승이다. 즉, 성스러운 사랑의 세계로의 상승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한기는 선화에 대한 사랑을 하나 하나 인식시켜 나간다. 그러나 빛의
추악함이 그 행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한기는 깨지고 찔리고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주의해야할 것은 찔리고
깨지면서 한기가 보이는 중요한 행위는 그의 눈빛은 늘 선화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는 맑은 영혼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선화에게 보내는 통로는 눈빛밖에 없다는 것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화의 마음은 아직 한기의 마음을 이해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창가에서 도망가기도 하고, 물에 빠져 죽는 모양을 보이기도 하고, 나중에는 혼자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선화의 마음은 차츰 변하여
간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게 되는데, 출옥한 한기가 어둠 속에서 불을 켜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이다. 이 때 비로소 어둠과
빛은 소통을 시작한다. 그 동안 꽉막혀 있었던 소통의 창이 열린 것이다. 거울은 깨지고 한기와 선화는 처음으로 포옹한다. 그러나 한기는 아직
혼란스러워서 빛의 세계에 적응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선화를 차에 태워서 처음 만났던 곳에 내려주고 이별을 고한다. 혼자 남겨진 선화는 트럭
운전수와 매춘을 한 다음 길을 가다가 옷가게에 걸려 있는 붉은 옷을 보고 깨닫는다. 자신의 사랑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영화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트럭에 침대를 놓고 해변에서 매춘을 시작한다. 매춘이 끝난
뒤에 아주 밝은 빛 속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이 때 두 사람의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얼굴임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비로소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져서 하나가 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필자가 본 '나쁜 남자'라는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내용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장치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첫째, 거울의 이중성이다. 거울은 빛은
통과시키는 유리이면서 한편으로는 반사하기도 하는 존재로 어둠과 빛이 소통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장치이다. 이 막힘을 완전한 막힘이 아닌 것으로
돕는 보조장치가 바로 해변가에서 찾아낸 얼굴 없는 사진이다. 얼굴이 있었다면 그 사진은 소통의 보조수단이 될 수 없다. 빈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감각적으로 한기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둠의 세계인 유리 쪽에는 한기가 있고, 빛의 세계인 거울 쪽에는
선화가 있다. 한기는 행동할 수 없지만 볼 수는 있고, 선화는 볼 수는 없지만 행동할 수 있을 뿐이다. 한기는 보면서 선화에게로 가고, 선화는
타락한 행동을 통해서 한수에게 가는 것이다. 둘째, 두 사람의 선화이다. 바닷가에서 물에 빠져 죽은 선화, 사창가에서 탈출한 선화에게 옷을
입혀주는 선화 등은 모두 자신이 천사처럼 살았다고 믿는 빛의 세계의 선화이다. 또 한 사람의 선화는 그 과정에서 점차 한수의 성스러움을
깨달아가는 사창가의 선화이다. 이 두 선화가 하나로 되는 그 순간 비로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셋째, 선화와 한기가 겪는 육체적
시련이다. 선화는 매춘 행위를 통해서 육체적 고통을 겪고, 한기는 찔리고 상처입는 것을 통해 육체적 고통을 겪는다. 이것은 두 사람의 진정한
결합을 위한 하나의 의식행위나 마찬가지이다. 넷째, 빛과 어둠이 가지는 영화 속에서의 의미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빛은 천사,
어둠은 악마라는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반대라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빛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도 추하지 않은 것이 있었던가? 하고 반문하는
듯이 영화에서 빛은 추악함 그 자체이다. 그리고 어둠은 한기에게 독점되어 있는 것으로 추악함의 반대라고 할 수 있는 맑음과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을 이해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일반적으로 파악하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자신에게 맞추어서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것이라는 말 또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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