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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세계/문학으로영화보기

'친구'에 대한 감상평

by 竹溪(죽계) 200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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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친구'의 올바른 감상을 위하여

'친구'는 우리의 머리 속에 과거의 일로 남아있던 아련한 추억들을 끌어내 주는 영화다. 까까머리에 검은 교복, 그리고 이상하게 쓴 모자와 옆에 끼는 가방 등이 우리의 추억들을 살려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친구'는 그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만약 '친구'가 아련한 추억 정도를 이끌어내 주는 것에 그칠 수 있는 영화라면 그렇게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친구'를 보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여 작품에 대한 간략한 평을 올려보고자 한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는 물론 친구의 우정이다. 이 영화는 친구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 진정한 우정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친구'라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마력 같은 매력 은 과연 어디에서 오며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라는 하나의 예술이 가지는 치밀한 전개에서 오는 유기체적 구성에 있다. 그런데, 감독은 이러한 유기체적 구성을 누구나 알 수 있게 만들어놓지는 않는다. 어린아이라도 척 보면 알 수 있을 정도의 구성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쉬워서 어른들이 보기에는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보든지 그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주제가 무엇이며, 감독이 어떤 장치를 통해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려고 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친구'의 구성은 큰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준석이라는 인물의 축이고, 하나는 동수라는 인물의 축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두 축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정도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첫 번째 장치는 기본 축에 연결된 보조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에서 주인공들이 갖는 두 개의 축에 보조수단으로 동원되는 축은 바로 준석과 동수의 아버지라는 축이다. 동수의 아버지는 장의사이고, 준석의 아버지는 건달 두목이다. 이 두 아버지의 축은 두 주인공의 인생역졍을 설정하고 지배하는 기초적인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준석은 어릴 때부터 건달의 두목격이었고, 나이가 들어서도 건달의 두목이 된다. 이것은 아버지가 살았던 인생 역정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동수의 아버지는 장의사이고 동수의 삶도 장의사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겉으로는 동수도 건달의 세계에서 큰 몫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달로써 동수의 삶은 바로 장의사인 아버지의 삶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의사의 특징은 누군가의 지시나 부탁에 의해 뒤처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동수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준석이 동수에게 하는 말에 '우리는 시키는대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냐'고 한다. 어릴 때 부두목이었고, 돈을 의리로 아는 건달의 밑에 들어가서 배신과 뒷처리를 통해 동수는 성장해 간다. 바로 장의사가 하는 뒷처리가 바로 건달이 된 동수에게 주어진 몫인 셈이다.

 

그러나 준석은 동수와 다르다. 준석은 돈을 의리라고 강조하는 건달에게 칼로 얼굴을 난도질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의지를 꺾지 않는다. 그러나 동수가 그 건달의 밑으로 들어가면서 이 둘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만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두 사람이 하나로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원한 수평선을 그리고 달릴 것 같던 두 사람의 관계는 영원한 우정을 지키려는 준석에 의해 다시 만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동수를 찾아가서 화와이로 피신할 것을 권유하다가 실패한 준석은 자신이 스스로 준석을 죽임으로써 이 둘의 영원한 우정은 완성을 보게 된다. 길에서 동수를 칼로 찔러서 죽게 했던 사람은 바로 준석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를 부하들이나 다른 사람의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준석은 한번도 직접 손을 쓴 적이 없지만 친구의 가는 길에는 스스로 손을 씀으로써 두 사람의 우정을 완성하는 것이다. 준석이 왜 그 길을 택하느냐 하면 그 길밖에는 우정을 완성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동수의 삶은 그냥 두면 누군가에게 비참하게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준석은 동수를 하와이로 가도록 주선하려 한다. 이를 거부한 동수에게 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손으로 친구를 죽이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수는 죽는 순간에 편안한 마음으로 아주 부드럽게 이제 그만 찌르라고 말한다. 그 말이 가진 어감에는 따뜻한 애정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관객은 감지해야한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에 담겨 있는 솜처럼 부드러운 애정의 감정이 들어가 있는 그 말 한 마디에 준석과 동수의 우정은 어느 정도 완성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진정한 우정은 법정에서 준석이 스스로 살인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것과 마지막에 감옥에서 모범생 친구에게 한 '쪽 팔리니까'라는 말로 완성된다. 준석이 감옥에서 모범생이었던 이 영화의 화자에게 한 '쪽 팔린다'는 말은 자신의 체면이 깎인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되면 동수의 체면이 깎일 것이고, 그에 따라서 자신의 체면도 깎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얀빛이 쏟아지는 문을 지나 준석은 비로소 동수를 만날 수 있게 되고 진정한 우정은 완성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우정일 수 있듯이,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주는 것도 우정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보조 장치로 등장하는 건달 두목으로 설정된 준석의 아버지와 뒷처리를 직업으로 하는 장의사인 동수의 아버지가 바로 두 주인공의 기본 축을 보조하는 것이고, 친구로서의 우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준석이 스스로 동수를 죽인다는 사실을 알고서 이 영화를 본다면 자신들의 추억 속에 있는 옛날의 과거 속으로 돌아가는 정도 이상의 감동과 재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글을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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